독수리 날개로 우리를 업으시는 하나님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출애굽기 19장 4절).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저 또한 다른 아이들처럼 어머님의 등에 업혀서 길러졌을 것입니다.  특히 졸렸을 때 어머님에게 땡깡스면서 “엄마, 업어봐”라고 울면서 소리를 지르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기억이 어렴풋이 나는 것은 제가 제 아이들을 기를 때 아내가 아이를 업는데 사용하는 아기 보자기를 사용해서 제 아이를 업어본 기억은 납니다.  아이에게 ‘업으봐 업으봐’하면서 아이를 제 등에 업고 몸을 흔들어서 아이를 재우려고 시도한 기억이 납니다.  특히 아이가 졸려서 자기 두 발로 서 있기를 싫어할 때 업어달라고 저에게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출애굽기 19장 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독수리 날개로 그들을 업어 자신에게로 인도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치 어미 독수리가 자기 날래로 새끼 독수리를 업듯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업어서 인도하셨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제 자신에게 비춰볼 때 제가 과거에 제일 힘들었고 어려웠을 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마음이 너무 힘들고 괴로워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멍하게 있었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벌리신 팔고 주님께서는 저를 품어 앉으시사 저를 들고 그 고통의 통로를 걸어가 주셨던 기억이 납니다.  왜 하나님께서 저에게 그러한 큰 위기와 고통을 허락하셨는지 제 머리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분명히 제가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는 사실을 믿게하시므로 그 고통스러운 현실을 받아들이게 하셨습니다.  그 때에 저에게 큰 위로와 도움과 힘이 되었던 찬양은 바로 “주 날개 그늘 아래”란 복음성가였습니다: “주 날개 그늘 아래 주님의 거룩한 처소에서/ 나의 하나님 주를 기다리네/ 이 곳 주의 처소에서 주의 사랑이 나를 이끄시니/ 주 알기 위해 나를 드립니다/ 주 사랑으로 덮으소서 주님의 마음 깊은 곳으로 나를 인도하소서/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 나를 보호하소서/ 주 알기 원합니다.”  특히 저는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 나를 보호하소서”란 가사가 마음에 많이 다가왔었습니다.  주님의 날개 그늘 아래 보호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주님의 날개로 우리를 업어서 인도하셨기에 저희 부부는 첫째 아기의 질병과 고통과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굉장하고 기이한 사랑을 경험하였습니다.  결국 제 인생의 큰 위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러한 큰 위기를 겪도록 인도하셨을까요?  마치 어미 독수리가 자기 새끼 독수리를 자기 품에서 밀어 보금자리 끝으로 인도하는 것처럼 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저를 벼랑 끝으로 인도하신 것일까요? 

 

우리고 들어 좀 알고 있듯이 독수리는 새끼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다가 새끼가 반쯤 자라면 둥지에서 꺼내어 벼랑 끝에 둡니다.  벼랑 끝에 밀쳐진 새끼 독수리는 날개를 펴서 팔딱거리며 하늘을 나는 법을 배웁니다.  새끼의 날개 근육이 충분히 힘을 지닐 때가 되면, 어미 독수리는 새끼를 낚아채고 창공을 향해 질주합니다. 높은 곳에서 떨어뜨려 스스로 날게 합니다. 어미 품을 떠나 독립적인 존재가 되도록 훈련시킵니다(인터넷).  저는 이 어미 독수리가 자기 새끼 독수리를 훈련시킴에 있어서 벼랑 끝에 밀쳐내듯이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우리를 단련시키심에 있어서 우리를 벼랑 끝으로 인도하십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 바다 앞으로 인도하시사 그들로 하여금 갇힌바 되게 하신 것입니다(출14:1-3).  우리의 명철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는 우리의 명철로은 이해할 수 없는 인도하심으로 우리를 벼랑 끝으로 밀어내시사 마치 어미 독수리가 새끼 독수리를 밀쳐 내어 떨어뜨리듯이 우리도 그리하십니다.  그 때에 추락하는 우리들은 새끼 독수리처럼 우리의 힘으로 살아보려고 우리의 “날개”를 펴서 힘써 위로 날아보려고 하지만 믿음이 약하여 계속해서 추락합니다.  그 때 우리는 마치 몸둥이가 뒤집혀 아래로 추락하면서 허공에서 맴도는 어미 독수리를 쳐다보는 새끼 독수리처럼 우리 또한 우리를 하늘에서 쳐다 보고 계시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그리곤 우리는 주님을 앙망합니다.  그 때 마치 예수님께서 돌이켜 자기를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보신 것처럼(눅22:61) 우리를 주목하고 계시는 주님의 눈과 우리의 눈이 마주칩니다.  그 때 마치 어미 독수리가 허공에서 속히 내려와 자기 날개 위에 그 새끼 독수리를 업습니다[“업어”라는 히브리어 단어의 기본뿌리 의미는 “들어 올리다”(to lift)임(인터넷)].  “마치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그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신32:11) 하나님은 우리를 업으시사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그리고 마치 어미 독수리가 새끼 독수리를 날개의 업고 다시 창공으로 높이 솟아 올라가듯이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들어 올리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은 소성시키시고(57:10, 시119:25, 37, 40, 107, 154, 156)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사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이(사40:31)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따라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께가오니 날 새롭게 하시고  주의 은혜를 부어주소서

내안에 발견한 나의 연약함  모두 벗어지리라 주의 사랑으로

주 사랑 나를 붙드시고  주 곁에 날 이끄소서

독수리 날개쳐 올라가듯  나 주님과 함께 일어나

걸으리 주의 사랑안에

 

내안에 발견한 나의 연약함  모두 벗어지리라 주의 사랑으로

주 사랑 나를 붙드시고  주 곁에 날 이끄소서

독수리 날개쳐 올라가듯  나 주님과 함께 일어나

걸으리 주의 사랑안에  나 주님과 함께 일어나

걸으리 주의 사랑안에.”

 

(“주께 가오니”)

 

 

 

나를 업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하고 있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4년 1월 25일, 독수리 날개쳐 올라가듯 주니과 함께 일어나 저 높은 곳을 향하여 걸어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