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렇다 저렇다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이제 당신들이 인자함과 진실함으로 내 주인을 대접하려거든 내게 알게 해 주시고 그렇지 아니할지라도 내게 알게 해 주셔서 내가 우로든지 좌로든지 행하게 하소서 라반과 브두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 (창세기 24장 49-50절).

 

 

            “’가’ 하시면 ‘예’ 하시고 ‘아니오’ 하시면 ‘아니오’ 하시길 바랍니다.”  이 말은 제직회 때 제가 제직 분들께 묻는 질문입니다.  그 질문의 뜻은 찬성하시면 “예” 하시고 반대하시면 “아니오” 하십시오 라는 의미입니다.  제직회 때 제가 이 질문을 던질 때마다 저희 교회 제직 분들은 항상 “예” 하시지 여탯것 한번도 “아니오”하시는 분이 한분도 없으셨습니다.  즉, 그 분들은 항상 “예” 사람(“Yes” wo/men)이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은 우리는 주님의 명령에 항상 “예”하는 사람들이 되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24장 49-50절을 보면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리브가의 집에 들어가서(32절) 그녀의 식구들에게 자기의 일을 다 진술 한 후(33절) 그 식구들에게 자기의 주인인 아브라함을 대접할 것인지 아니할 것인지를 알게 해 달라고 말합니다(49절).  그 때 리브가의 오라버니인 라반과 그녀의 아버지인 브두엘이  그 늙은 종에게 “이 일이 여호와꼐로 말미암았으니 우리는 가부를 말할 수 없노라”고 대답합니다(50절).  여기서 ‘가부를 말할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현대인의 성경에는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우리가 이렇다 저렇다 결정할 문제가 아니오.”  즉, 그들은 자기들에게 결정권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무슨 결정권을 말하는 것입니까?  자기의 누이요 자기의 딸인 리브가를 그 늙은 종과 함께 아브라함의 집으로 보내서 이삭의 아내가 되게하는 것을 찬성이나 반대할 결정권이 자기들에게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들은 자기에게 결정권이 없다고 이렇게 말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결정권이 주님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브라함의 늙은 종에게 대답하기를 “이 일이 여호와께거 말미암았으니 …”[The matter comes from the Lord(NASB)]라고 말한 것입니다(50절).  이미 주님께서 리브가를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삭의 아내로 주님께서 결정하셨음을 그 늙은 종의 진술을 통하여 깨달았으므로 그들은 그 늙은 종에게 “우리는 가불을 말할 수 없노라”(우리가 이렇다 저렇다 결정할 문제가 아니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아브라함의 종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리브가가 당신 앞에 있으니 데리고 가서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를 당신의 주인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51절).  그들은 주님께서 이미 결정하신 일에 이렇다 저렇다 말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리브가를 아브라함의 아들의 아내가 되게 하라고 아브라함의 종에게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리브가의 대답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나를 보내어 내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하소서”(56절라고 말했을 때 리브가의 오라버니인 라반과 그녀의 어머니가(55절) 리브가를 불러 그녀에게 “네가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가겠나이다”(I will go)라고 대답한 것입니다(58절).  아니 어떻게 그녀는 한번도 얼굴도 못보고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남자인 이삭의 아내가 되고자 아브라함의 종과 함께 아브라함의 집으로 가겠다고 말한 것일까요?  어떻게 그녀는 그리 결정할 수 있었을까요?  그녀 또한 그의 아버지와 오라버니처럼 “이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음을(50절) 알아서 그랬지 않아을까요?  그녀 또한 이미 주님께서 결정하신 일을 두고 자기가 이렇다 저렇가 결정할 문제가 아닌 것을 알았기에 자기의 어머니와 오라버니가 “네게 이 사람과 함께 가려느냐”고 물었을 때 “가겠나이다”라고 믿음으로 간략하게 대답한 것입니다(58절).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마태복음 21장 28-31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두 아들의 비유가 생각났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명하였을 때(28절) 그 맏아들은 “아버지 가겠나이다”라고 말한 후 가지 아니한 반면에(29절) 둘째 아들은 “싫소이다”라고 말했지만 그 후에 뉘우치고 아버지의 명령에 순종하여 포도원에 갔습니다(30절).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31절).  그 때 제자들은 “둘째 아들이니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31절).  저는 이 예수님의 두 아들을 비유를 생각할 때마다 왜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만 비유로 들으셨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세 아들 비유를 드시면서 아버지의 명령에 “예”라고 대답한 후 순종하여 포도원에 가서 일하는 또 다른 아들을 비유에 넣치 않으셨을까 생각해 볼 때 그러한 아들은 오직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다 맏아들 아니면 둘째 아들 같이 주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던지 아니면 즉각 순종을 안하던지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시고자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항상 “예” 하시는 아들이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주님 앞에서 항상 “예”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주님의 주님되심을 겸손히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주권을 겸손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뜻하시고 명하셨다면 우리는 결정권이 우리에게 없음을 알고 무조건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부를 말할 수 있는 있는 자들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다 저렇게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항상 주님께 “예” 할 수 있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은,

 

제임스 목사 나눔

(2014년 1월 7일, 적어도 예수님의 두 아들 비유에 나오는 둘째 아들처럼 주님의 명령에 ‘싦습니다’라고 말했다가도 뉘우쳐 후에라도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세움 받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