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잔인한 징계

 

 

“너를 사랑하던 자가 다 너를 잊고 찾지 아니하니 이는 네 악행이 많고 네 죄가 많기 때문에 나는 네 원수가 당할 고난을 네가 받게 하며 잔인한 징계를 내렸도다 너는 어찌하여 네 상처 때문에 부르짖느냐 네 고통이 심하도다 네 악행이 많고 네 죄가 허다하므로 내가 이 일을 너에게 행하였느니라” (예레미야 30장 14-15절).

 

            어제 금요일 저녁, 저는 목양실에서 함께 있었던 사랑하는 딸 예리와 대화하다가 이러한 질문을 던져보았습니다: “Who is a good pastor?”(누가 좋은 목사님이니?).  그랬더니 예리는 아무 말 없이 자기 손가락을 저에게 가리켰습니다.  그래서 저는 에리에게 ‘그게 아니라 예를 들어 좋은 목사님은 무엇을 행하는지, 누가 좋은 목사님이냐?’라는 식으로 다시 물어보왔습니다.  그 때 예리는 좀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마침내 입을 열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The good pastor is the one who fears God and puts God first”(좋은 목사님이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첫째로 두는 분입니다).  저는 예리의 답변을 듣고 마음이 기쁘기 보다 무거웠습니다.  그 이유는 저는 제 자신이 ‘좋은 목사’가 아닌 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딸 예리가 이 아빠를 “좋은 목사님”으로 보고 있다니 마음이 무거웠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저는 슬펐습니다.  오늘 새벽에는 잠에서 깼을 때 예리가 말한 ‘좋은 목사님은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첫째로 두는 분입니다’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 말이 생각났을 때 다시금 제 마음은 무거워지기 시작했고 슬펐습니다.  지금도 그 때 그 순간을 기억하며 예리의 말을 되새기며 적을 때 마음이 슬픔니다.  그리고 더 슬퍼지고 싶은게 제 솔직한 심정입니다.

 

            지난 1-2주 동안 새벽기도회 때 예레미야서를 묵상하면서 저는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 때의 거짓 선지자들의 모습 속에서 제 자신과 우리 시대의 목사님들의 모습을 엿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거짓된 사상을 섞어서 거짓을 예언한 예레미야 시대 때 거짓 선지자들처럼 지금 나는,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순전한 말씀을 그대로 선포하지 않고 그 말씀에 순전하지 못한 나의 생각, 우리의 사상을 섞어서 하나님의 양 떼들을 먹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백성들은 순전한 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못할 뿐 아니라 세상에 나가서 빛과 소금의 역활을 못하고 있지 않나 생각되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양 떼들이 살진 골로 순전한 말씀을 먹지 못하고 있기에 영적으로 영향실조에 걸려 이리 저리 헤메고 다니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예레미야서를 묵상하면서 그 시대 유다 백성들의 악행의 원인이 거짓 선지자들의 책임이 크다는 생각 속에서 지금 21세기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악행과 허다한 죄가 우리 목회자들의 책임이 크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사랑하는 딸에게 “좋은 목사님”이란 말을 들을 수가 있겠습니까?  오히려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법에 따라 너를 징계 할 것이요 결코 무죄한 자로만 여기지는 아니하리라”(11절)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법에 따라” 저를, 우리를 징계하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하신다면 우리의 많은 악행과 많은 죄(14절)의 결과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악행이 많고 네 죄가 많기 때문에 나는 네 원수가 당할 고난을 네가 받게 하며 잔인한 징계를 내렸도다”(14절).  아니 어떻게 인자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잔인한 징계”를 내리실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하나님의 성품을 생각할 때 “잔인”이라는 단어를 그 분과 연관시킬 수가 있습니까?  잘 이해가 안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저주의 나무인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바라볼 때 좀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진노를 독생자 예수님에게 충분히 쏟으시사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에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잔인했던 것은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버리셨다는 사실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리하셨습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따라 온전하게 사셨던 예수님을 잔인하게 십자가에 처형하셨을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십자가에 버리신 것입니까?  바로 나의 죄,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걸머지시고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모든 형벌을 대신 십자가에서 받으신 것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사53:5).  그 분 몸의 못자국과 창자국은 바로 우리의 수 많은 악행과 수 많은 죄 때문에 십자가에 받으신 상처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에도 지니고 계섰던 이 상처들, 심지어 승천하셔서도 지니고 계신 이 영원한 상처들은 바로 우리의 죄악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악을 사하시고자 십자가에서 입으신 이 예수님의 상처들, 이 예수님의 불치의 상처들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이 죄 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나 같은 죄인을 위하여 십자가에 이 불치의 상처들을 입으신 예수님, 나의 모든 죄를 사하여주시고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말씀을 선포하는 주님의 종으로 삼으셨으니 이 크신 하나님의 은혜에 어찌 보답하리요.  내가 받아야 할 잔인한 징계를 대신 받으시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받으시므로 말미암아 나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 어찌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감사하지 않으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크신 사랑을 망각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며 범죄하고 있으니 이 어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자라고 말할 수 있으리요.  그러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신실하게 사랑의 매를 들어 징계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 그런데 나는 하나님의 징계로 인한 나의 지극히 작은 상처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고 있으니(15절) 한심하고 답답할 뿐입니다.  그러한 이 아빠를 보고 “좋은 목사님”이라고 생각하는 사랑하는 딸 예리를 생각할 때 마음이 뭉클합니다.  그리고 제 자신을 보니 마음이 무겁고 슬픔니다.  그런데 마음이 더 무겁고 마음이 더 슬펐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이 무너지고 부서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므로 나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아길 원합니다.  그리고 예리의 말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제 삶의 첫째로 두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잔인한 징계를 내 대신 받으신 인자하신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3년 8월 17일,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첫째로 모시는 삶을 사랑하는 딸 예리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