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하지 마십시다.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 그가 거만하며 교만하며 분노함도 들었거니와 그의 자랑이 헛되도다  …  모압이 그 산당에서 피곤하도록 봉사하며 자기 성소에 나아가서 기도할지라도 소용없으리로다” (이사야 16장 6, 12절).

 

 

            어제 수요기도회 때 저희 교회 원로 목사님을 통하여 “유대인의 죄”(롬2:17-29)에 대한 말씀을 받았습니다.  그 유대인의 죄란 “도둑질”(21절), “간음”(22절), 우상숭배(22절)와 같은 것들로서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23절).  마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하나님께 선택 받은 유대인들이요 할례를 받은 자들인데 오히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만 특혜로 주신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들이 그리 죄를 범한 원인은 “교만”이었습니다.  그들은 교만했기에 하나님께 범죄한 것입니다.  그들은 교만했기에 하나님을 욕되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유대인들이 교만해졌을까 생각해 볼 때 그 원인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만 주신 특혜(선택, 율법, 할례)를 겉으로는 지켰지만 마음으로는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이 교만해진 원인은 하나님께 받은 특혜에 대한 책임을 중심으로 지켜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들은 또 다른 큰 죄를 하나님께 범하였는데 그 큰 죄란 바로 “외식”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경건의 모양은 있었지만 그들은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며 살았습니다(딤후3:5).  결국 교만하고 외식하는 유대인들은 자기들 보기에는 철저히 종교생활을 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합당한 신앙생활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착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철저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아무 의미없는 헛된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특혜를 받은 것처럼 우리 또한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와 은혜로 선택을 받아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 66권을 주셨습니다(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을 주셨지만).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할례를 베풀어 주신 것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세례를 베풀어 주셨는데 지금 우리는 이 모든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자들로서 겸손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고 있기보다 오히려 마음이 교만해져서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하여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자랑하기보다 우리 자신이 주님과 주님의 몸된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행한 것들을 스스로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그러한 자랑은 헛된 것인데(사16:6) 지금 우리는 이러한 헛된 자랑을 하면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롬2:23).  분명이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일을 열심히 행한다고 말하고 또한 실제로 행하고 있는데 그 모든 행함이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 의미도 없고 헛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주님을 위하여 행하는 일이 아무 의미가 없고 헛된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교만한 마음으로 주님의 일을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이사야 16장 6절과 1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모압의 교만을 듣고 들으셨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6절).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압 사람들이 심히 교만한 가운데서(6절) “피곤하도록 봉사하며 자기 성소에 나아가서 기도”하는 것이 아마 소용이 없다(12절)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는 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할 때 이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만한 마음으로(이사야 16:6) ...

피곤하도록 봉사하는 것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2절).

성전에 나아가서 기도할지라도 소용이 없습니다(12절).

자랑하는 것 헛됩니다(6절).

주님께서는 교만한 마음에서 나오는 즐거움과 기쁨의 소리를 그치게 하십니다(10절).

그리고 주님은 그 즐거움과 기쁨을 돌이켜 슬픔과 근심(7절)과 눈물과 울음으로(9절) 바꾸십니다.”

 

이 얼마나 비극 중 비극입니까?  나는 주님의 몸된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답시고 몸이 피곤하도록 열심히 봉사하고 있는데 만일 하나님 보시기에 나의 봉사가 아무 의미도 없고 아무 소용도 없다면 이 얼마나 비극 중 비극입니까?  분명히 지금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주님의 일이 의미가 있고 소용이 있다고 철저히 믿고 열심히 몸이 피곤하도록 봉사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아무 의미와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얼마나 절망적입니까?  또한 내가 새벽기도회 때와 수요기도회 때와 금요 철야 기도회 때 그리고 주일 예배 때 예배당에 올라가서 수 없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 의미와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왜 이 모든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무의미하고 소용이 없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교만한 마음으로 이 모든 일을 행하였고 지금도 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행함(봉사, 기도 등등)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컽으로 행하는 모습을 보고 계시기 보다 우리의 중심을 보고 계시는데 지금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이 아니라 교만한 마음이 싹이 자라나 많은 열매를 맺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열매 중 하나가 바로 자랑입니다.  지금 우리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자랑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지금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랑하며 높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을 높이기보다 우리 교회를 높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랑하기보다 우리의 선행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심비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행하신 일을 더 깊이 기록하고 있기보다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행하는 일을 더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우리 마음에는 은혜의식보다 공로의식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교회 사람들이 우리의 공로를 인정해 주실 바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정해 달라고 요구까지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심지어 하나님 앞에까지 나아가서 우리 자신의 공로를 자랑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눅18:11-12).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였던 세리처럼 고개도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면서 회개기도를 해야 하는데 말입니다(13절).  지금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약1:22).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더 이상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우리는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여금 우리 양심을 찌르게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성령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교만함을 들춰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교만한 마음을 찌르시고 부서트리시므로 우리의 죄를 자복하며 회개케 하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 예수 십자가의 흘리신 보혈을 의지하며 우리의 죄를 자복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할 때 성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벌리신 팔로 우리를 용납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할 때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게 하실 것입니다(빌2:5).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마11:29)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오직 하나님을 자랑하며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게 하실 것입니다.

 

 

 

착각의 늪에서 빠져나와 실감의 물 댄 동산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잠기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3년 7월 25일,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을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