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한 사람은 …

 

 

“왕께 아뢰되 왕께서 사람을 존귀하게 하시려면 왕께서 입으시는 왕복과 왕께서 타시는 말과 머리에 쓰시는 왕관을 가져다가 그 왕복과 말을 왕의 신하 중 가장 존귀한 자의 손에 맡겨서 왕이 존귀하게 하시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 옷을 입히고 말을 태워서 성 중 거리로 다니며 그 앞에서 반포하여 이르기를 왕이 존귀하게 하기를 원하시는 사람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게 하소서 하니라” (에스더 6장 7-9절).

 

 

            처음에는 겸손해 보이던 사람이 나중에 가서는 교만해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작게 여기고 낮게 여겼는데 나중에 가서는 자기 자신을 크게 여기고 또한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게 여깁니다.  그리고 그 교만한 사람은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좋아하되 어디까지 높임을 받기를 원하는 것인지 그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에스더 6장 7-9절에는 교만한 사람 하만이 그의 왕 아하수에로에게 하는 말이 적혀 있습니다.  그 말 내용에는 하만이 아하수에로 왕에게 존귀하게 여김을 받고 싶은 마음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그가 어느 정도로 아하수에로 왕에게 존귀하에 여김을 받고 싶어했냐면 그는 왕이 입은 왕복과 왕이 타는 말과 왕이 머리에 쓰는 왕관을 원했습니다.  그 정도로 하만은 존귀하게 여김을 받고 싶어했습니다.  참으로 마음에 교만이란 위험합니다.  에스더 3장 1절에 갑자기 등장한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 아하수에로 왕이 그의 지위를 높이 올려 함께 있는 모든 대신 위에 두었음에도 불구하고(3:1) 그는 그 지위로 만족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그는 들어 왕의 모든 지방관이나 신하들보다 높였음에도 불구하고(5:11) 그는 왕처럼 왕복을 입고 왕의 말을 타고 왕관을 쓰고 성중 거리로 다니면서(6:9)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 앞에서 왕같이 높임을 받길 원한 것 같습니다.  이 얼마나 분수에 지나친 생각입니까? (참고: 민 16:3, 7)  하만은 분수의 지나친 생각 속에서 분수 이상의 자랑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참고: 고후10:13, 15).  아하수에로 왕에게도 높임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3:1, 5:11) 에스더 왕후에게도 잔치에 청함을 받았으니(5:12) 이 얼마나 마음이 기뻐(9절) 자랑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집에서 그의 친구들과 그의 아내 세레스를 청하여(10절) 자랑한 것입니다(11-12절).  이렇게 교만한 사람은 높임을 받기를 원하는 마음이 만족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좀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렇게 높임을 받았던 하만은 “유다 사람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은 것을 보는 동안에서는 이 모든 일이 만족하지 아니”하였습니다 (13절).  그 이유는 “대궐 문에 있는 왕의 모든 신하들이 다 왕의 명령대로 하만에게 꿇어 절하되 모르드개는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3:2).  실제로 하만은 모르드개가 무릎을 꿇지도 아니하고 절하지도 아니함을 보고 매우 노하였습니다(5절, 5:9).  그래서 그는 “모르드개만 죽이는 것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아하수에로의 온 나라에 있는 유다인 곧 모르드개의 민족을 다 멸하고자 하”였습니다(3:6).  아니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있어 일어나지도 아니하고 몸을 움직이지도 아니하는 것”(5:9)이 뭐 그리 분노할 일이라고 모르드개을 죽이려고 할 뿐만 아니라 그만 죽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했을까요?  그 뿐만 아니라 하만은 “큰 영광”(5:11)을 누리고 있었고 아하수에로 왕도 자기를 들어 왕의 모든 지방관이나 신하들보다 높였고 또 왕후 에스더가 그 베푼 잔치에 왕과 함께 오기를 허락 받은 자가 자기 밖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11-12절) 왜 그는 유다 사람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은 것을 보는 동안에는 이 모든 일이 만족하지 않았을까요?(13절)  높임을 받은 그는 한 유대 사람이 자기에게 꿇지도 않고 절하지도 않는 것이 왜 그리도 불만족 했던 것일까요?  참으로 잘 이해가 안되는 점입니다.  진정 교만한 사람은 만족이 잘 안되는가 보죠?  왠지 하만을 생각하면 교만한 사람의 높임 받기를 원하는 마음은 만족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죄악을 행하고 싶어하는 마음도 결코 만족할 수가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하만은 자신의 불만족 속에서 모르드개와 그의 민족을 다 멸하려고 은 일만 달란트까지 왕의 일을 맡은 자에게 줘서 아하수에로 왕으로 하여금 조서를 내려 유대인을 진멸하려고 하였습니다(3:9).  그 조서는 각 도의 문자와 각 민족의 방언대로 쓰여졌는데 그 내용은 “십이월 곧 아달월 십 삼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노소나 어린 아이나 부녀를 무론하고 죽이고 도룍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는 것이었습니다(13절).  이 얼마나 잔인한 조소 내용입니까?  교만하고 불만족한 하만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조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결국에 가서는 모르드개를 매달려고 한 나무에 하만이 달리고(7:10) 모든 유다인을 제거하려고 했던 유다인의 대적자들은 도리어 제거를 당하였습니다(9:1).  결국 하나님께서는 유다인은 대적에게서 벗어나게 하시사 평안함을 얻게 하셨고 그들의 슬픔을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셨으며 그들의 애통을 변하여 길한 날이 되게 하셨습니다(22절).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사 패망케 하셨습니다 (잠16:18).  이것이 바로 교만한 사람의 말로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교만한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됩니다.  교만한 사람의 높임 받기를 원하는 마음은 만족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죄악을 행하고 싶어하는 마음도 결코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도리어 우리는 겸손한 사람이 되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 자신을 낮춰야 합니다.  우리는 낮아지고 또 낮아져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빌 2:5).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시자 사람들과 같이 되신 예수님,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시사 자기를 낮추시고 저주의 나무인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6-8절)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우리는 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겸손함을 본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겸손히 주님과 주님의 몸된 교회 그리고 이웃을 섬겨야 합니다.  비록 겸손히 주님을 섬길 때 괴로운 일이 많을지라도(새찬송가212장 1절) 우리는 겸손히 섬겨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지만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벧전5:5, 약4:6).  우리 모두 예수님의 겸손함을 본 받으십시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십시다.  그리고 우리 모두 궁핍하던지 풍부하던지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우십시다(빌4:11). 

 

 

                        “주님 한 분만으로 나는 만족해

나의 모든 것되신 주님 찬양해

나의 영원한 생명되신 예수님

목소리 높여 찬양해

 

주님의 크신 사랑 찬양해

나의 힘과 능력이 되신주

나의 모든 삶 변화되었네

크신 주의 사랑 찬양해.”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3년 6월 8일, 겸손히 주님을 섬기는 자로 세움 받기를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