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가 골짜기에서 나타난 찬송의 능력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으니  …  넷째 날에 무리가 브라가 골짜기에 모여서 거기서 여호와를 송축한지라 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곳을 브라가 골짜기라 일컫더라” (역대하 20장 22, 26절).

 

 

            여러분은 찬송의 능력을 믿으십니까?  찬송 중에 거하시는(시22:3) 하나님의 능력을 믿으십니까?  만일 우리가 믿고 있다면 우리는 큰 시련과 위기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하나님께 찬송을 드릴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찬송의 능력,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역대하 20장 26절을 보면 “브라가 골짜기”(the Valley of Beracah)가 나옵니다.  그 의미는 ‘찬송의 골짜기’(the Valley of Praise)입니다.  이 찬송의 골짜기에서 유다 백성들은 모여서 하나님을 송축하였습니다(26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유다 백성들이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21절)(“Give thanks to the LORD, for his love endures forever")라고 하나님께 노래하며 찬송이 시작될 때에(22절) 하나님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게 하시므로 그들이 패하였기 때문입니다(22절).  패하되 “그 무리를 본즉 땅에 엎드러진 시체들 뿐이요 한 사람도 피한 자가 없는” 것을 목격한 유다 사람들은(24절) 그들의 왕 여호사밧과 가서 적군의 수 없을 만큼 많은 물건들(재물과 의복과 보물)을 3일 동안 거두어 들인 후 “넷째 날에 무리가 브라가 골짜기에 모여서 거기서 여호와를 송축”한 것입니다(26절).  그래서 그 골짜기 이름이 “브라가” 곧 “찬송(송축)”인 것입니다. 

 

            저는 이 브라가 골짜기를 생각할 때 그 골짜기에서 나타난 찬송의 능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히 오늘 본문 역대하 20장 22절에서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의 적군인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주민들을 치시사 그들을 진멸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니 어떻게 유다 백성 중 노래하는 자들이 거룩한 예복을 입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면서 “여호와께 감사하게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21절)라고 하나님께 찬송하기를 시작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적군들을 진멸하셨는지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이정도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능력이 놀라운 것입니까?  찬송이 끝나기도 전에가 아니라 시작했을 때 이미 전쟁은 유다 백성의 승리로 끝났으니 말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찬송의 능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그 노래하는 자들이 불렀던 찬송이 승리의 찬송도 아니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감사하는 찬송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 백성들로 하여금 전쟁에서 승리케 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할 때 찬송의 능력은 참 놀랍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은 “왜 유다의 그 노래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인자하심)을 감사하는 찬양을 하나님께 드렸을까?”입니다.  예를 들어 그들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새찬송가에 “분투와 승리”(346-360장)라는 주제의 찬송도 드릴 수 있었을 텐데(그 당시 버전으로?), 왜 그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감사하는 찬송을 불렀을까요?  그 이유는 유다 왕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기도 응답이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내일 너희는 그들에게로 내려가라 그들이 시스 고개로 올라올 때에 너희가 골짜기 어귀 여루엘 들 앞에서 그들을 만나려니와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15-17절).  유다 왕 여호사밧은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들이 마온 사람들과 함께 와서 자기를 치고자 했을 때(1절) 그는 두려워하였습니다(3절).  그래서 그는 두려움 가운데에서 하나님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고 공포하였습니다(3절).  그 때 유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하려 하여 유다 모든 성읖에서 모여와서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4절).  왜 이 모든 유다 왕과 백성들은 하나님께 간구한 것입니까?  그 이유는 그들은 그들을 치러 오는 큰 적군의 무리를 대적할 능력이 없었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12절).  그래서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12절).  그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 기도하는 회중 가운데에서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임하사[“여호와의 영이 회중 가운데에서 레위 사람 야하시엘에게 힘하셨으니”(14절)] 유다 백성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기도 응답 말씀 내용을 보면 솔직히 우리의 머리로는 이해가 잘 안되는 말씀입니다.  아니 어떻게 적군과 전쟁을 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에게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다(17절)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그 이유는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15절).  그러므로 여호사밧 왕과 유다 백성들이 해야 했던 것은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는 것 뿐이었습니다 (17절).  출애굽기 14장 13-14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아니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구원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있습니까?  이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받은 유다 왕 여호사밧은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었고 유다 백성들도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고(대하20:18)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였습니다(19절).  큰 시련, 큰 위기 가운데서 두렵고 놀라있지만 무능력과 무기력함 속에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였을 때 기도 응답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받았을 때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을 경배하며 심히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그 하나님의 기도 응답이 여호사밧 왕와 유다 백성들에게 그들의 적군과 전쟁하기 하루 전날에 임한 것을 생각할 때[“내일”(16절)] 우리는 기도 응답이 없다고 하여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기도 응답 받을 때까지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이렇게 극적인 하나님의 기도 응답을 받은 유다 왕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들은 어떻게 행하였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그들은 기도 응답을 받은 후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갔습니다(20절).  나아갈 때 여호사밧은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의 선지자들을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20절).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큰 시련과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께 간구한 후 그 기도 응답을 받았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사로잡혀 그 약속의 말씀을 주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믿음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즉각[“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20절), 참고: 창22:3] 순종해야 합니다.  그 순종함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바로 여호사밧 왕은 백성들과 더불어 의논하여 “노래하는 자들을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진”하게 한 것입니다(21절).  만일 여호사밧 왕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려고 했다면 그는 결코 “노래하는 자들을” 군대 앞에서 행지하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왕이 적군과 전쟁하러 나아가면서 노래하는 자들을 군대 앞에서 행진하게 하겠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노래하는 자들이 아니라 군대 지휘관들이나 용매스러운 장수들을 군대 앞에서 행진하게 하지 않겠습니까?  여호사밧 왕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신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레위 사람 야하시엘을 신뢰하였던 것입니다 –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17절).  즉, 여호사밧 왕은 전쟁이 자기와 유다 백성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믿었습니다(15절).  그랬기에 그는 노래하는 자들을 군대 앞에서 행진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 노래하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감사 찬양하게 한 것입니다(21절).  그 결과 그와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성취된 것을 목격하게 된 것입니다(24절).  그러므로 그들은 브라가 골짜기에서 하나님을 송축한 것입니다(26절).

 

            여러분, 우리가 브라가 골짜기에서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서는 어쩌면 우리는 “아골 골짜기”[뜻: 괴로움의 골짜기(수7:24-26)] 뿐만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시23:4)와 같은 곳으로도 다녀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곳을 다닐찌라도 여호사밧 왕과 유다 백성들처럼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간구하되 우리는 우리가 접한 큰 시련과 역경을 통하여 우리의 무능력과 어찌할 바를 모르는 우리의 무지함을 깨달았을 때에 우리는 더욱더 오직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비록 그 기도 응답의 말씀이 우리 보기엔 더딜찌라도 우리는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하나님은 반드시 기도 응답해 주실 것이며 우리에게 성경을 통하여 약속의 말씀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릴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말씀을 붙잡고 그 말씀을 주신 신실하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므로 우리는 즉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하되 우리 모두 찬송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감사하므로(예: 시63:3) 하나님께 찬송하면서 순종하십시다.  그리할 때 우리도 브라가 골짜기에서 하나님을 송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 영원한 브라가 골짜기에서 하나님의 천국 백성들과 함께 영원히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3년 5월 23일, “내 평생 사는 동안 주 찬양하리 여호와 하나님 내 주를 찬양하리 주님을 묵상함이 즐겁도다 내 영혼 주 안에서 참 기쁘리 내 영혼아 주님을 송축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