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이러한 목사가 되고 싶습니다.

 

 

“미가야를 부르러 간 사자가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선지자들의 말이 하나 같이 왕에게 좋게 말하니 청하건대 당신의 말도 그들 중 한 사람처럼 좋게 말하소서 하니 미가야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고” (역대하 18장 12-13절).

 

 

            너무나 힘든 세상에 살아가면서 적어도 주일 하루 예배 드리는 한시간 만이라도 위로의 설교, 긍정적인 설교를 듣고 싶어하는 어느 한 성도님의 솔직한 고백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목사님은 "안전한 설교"(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이 설교?)를 하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성도님은 그 "안전한 설교"는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그 안전한 설교는 "듣는 내내 적당히 고개를 끄덕일 수는 있지만 교회 건물을 나서는 순간 내 머리에서 사라지는 설교, 내 속에서 그 어떤 고뇌와 갈등도 일으키지 않는 그런 설교"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성도님은 목사님은 그 어떤 영혼도 결코 변화시키지 못하는 그런 설교보다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임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설교, 즉 "위험한 설교"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마치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극단적으로 양분되어 분노가 극에 달해 그를 죽이려고 하던가 아니면 그의 말씀에 인생 전체가 변화되던지 말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 역대하 18장 12-13절 문맥을 보면 유대 왕 여호사밧과 이스라엘 왕 아합이 함께 길르앗 라못을 치려고 가기 전에(1-3절) 여호사밧 왕이 아합 왕에게 청하여 먼저 여호와의 말씀이 어떠하신지 물어 보자고 청합니다(4절).  그 때 아합 왕은 선지자 400명을 모으고 그들에게 “우리가 길르앗 라못에 가서 싸우랴 말랴”라고 물어봅니다(5절).  그 때 그 400명 선지자들은 그 두 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올라가소서 하나님이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5절).  그리고 이 400명 선지자들 중에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는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하셨다”(10절)라고 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때 여러 선지자들도 그와 같이 예언하여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서 승리를 거두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읍을 왕의 손에 넘기시리이다”(11절)라고 말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이 400명의 선지자들은 다들 “하나 같이 왕에게 좋게 말”한 것입니다(12절).  그 때 유대 왕 여호사밧은 “이 외에 우리가 물을 만한 여호와의 선지자가 여기 있지 아니하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6절).  그 말을 들은 이스라엘 왕 아합은 여호사밧 왕에게 “아직도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한 사람”이 있고 “그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물을 수 있으나” 그는 자기에게 “대하여 좋은 일로는 예언하지 아니하고 항상 나쁜 일로만 예언하기로” 아합 왕은 미가야 선지자를 미워하였습니다(7절).  어느 누가 자기에게 항상 나쁜 일로만 말하는 사람을 좋아하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 왕 여호사밧은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을 듣고 싶었습니다(7절).  그래서 이스라엘 왕 아합은 한 내시를 불러 “미가야를 속히 오게 하라”고 명하였습니다(8절).  그 명을 받은 그 내시는 미가야에게 가서 말하기를 ‘모든 400명 선지자들의 말이 하나 같이 왕에게 좋은 말하니 당신의 말도 그들 중 한 사람처럼 좋게 말하라는 것이었습니다(12절).  이 얼마나 구미가 당기는 유혹입니까?  만일 미가야 선지자가 그 내시의 말을 듣고 다른 400명 선지자들처럼 하나 같이 아합 왕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하였으면 그는 고난 당할 필요가 없었습니다(26절).  만일 그가 그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나님, 딱 한 번 거짓말 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아합 왕에게 좋게 말하였으면 그는 옥에 갇힐 필요도 없었습니다(26절).  그리고 그는 시드기야에게 빰도 맞을 필요도 없었을 것이요(23절) 또한 다른 400명 선지자들에도 왕따를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미가야 선지자는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아합) 왕에게 대하여 재앙을 말씀하”신 것(22절)을 말하였습니다.  그 재앙의 말씀은 “여호와께서 거짓말하는 영을 (아합) 왕의 이 모든 선지자들의 입에 넣으”사(22절) 그들로 하여금 아합 왕에게 좋게 말하므로 결국 “아합을 꾀어 그에게 길르앗 라못에 올라가서 죽게” 하는 것이었습니다(19절).  이렇게 하나님의 선지자 미가야는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말한 것입니다(13절).  과연 누구의 예언이 성취되었습니까?  400명의 선지자들의 예언입니까 아니면 한 사람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입니까?  이스라엘 왕 아합은 선지자 미가야의 예언대로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서(28절) 아람 왕의 군대와 싸우다가 죽습니다(34절).  누가 참 하나님의 선지자입니까?  아합 왕이 듣기에 좋게 말한 400명 선지자들입니까 아니면 아합 왕의 입장에서 보기에 “항상 나쁜 일로만 예언하”였던(7절) “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13절)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고 그대로 행한 한 사람 미가야 선지자입니까?

 

            저는 이 말씀을 오늘 새벽기도회 때 선포 한 후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미가야 선지자와 같은 목사가 되게 해주세요.’  그 이유는 저는 미가야 선지자처럼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말하는 목사가 되고 싶기 때문입니다.  비록 제 설교를 듣는 성도님들 중에는 너무나 힘든 세상에 살아가면서 적어도 주일 하루 예배 드리는 한시간 만이라도 위로의 설교, 긍정적인 설교를 듣고 싶어하는 성도님이 혹여나 있을지라도 저는 예수님처럼 오직 진리로서 하나님의 말씀을(눅20:21) 선포하고 싶습니다.  그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위로하는 말씀이라면 우리를 위로할 것이요 우리를 책망하는 말씀이라면 우리를 책망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위로나 책망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며 사모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말씀이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좋게 말하던 나쁘게 말하던(우리 듣는 자들의 관점에서) 저는 그 말씀을 겸손히 받고 싶습니다.  그리고 저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그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눅8:15).  주님께서 저를 미가야 선지자 같은 목사로 세워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입으로만 아니라 삶으로 전하는 목사가 되고 싶은,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3년 5월 22일, “안전한 설교”이든 “위험한 설교”이든 하나님의 말씀만을 바로 선포하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