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과 제자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디모데전서 5장 17절).

 

 

오늘은 우리 교회가 스승 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원래 금년 스승의 날은 5월 15일 수요일이였지만 오늘 19일 주일을 스승 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오늘을 스승 주일로 지키는 이유는 우리가 교회 선생님들에게 감사하며 그 분들을 위로하면 좋겠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준비하여 가르치는 교회 선생님들에게 학생들로서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스승 주일을 지키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사 분들을 더욱더 격려하고 위로하므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더 잘 가르쳐주어서 우리의 믿음이 더욱더 성장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과연 우리가 교회 선생님들을 어떻게 격려하고 위로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디모데전서 5장 17절 말씀을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존경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교회 선생님을 존경하고 계십니까?  만일 “예”라고 대답하신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여러분의 선생님에게 존경을 표시하시겠습니까?  제일 쉬운 방법은 선생님에게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존경합니다”라고 말을 하는 것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선생님에게 제일 좋은 존경 표시는 선생님을 통해서 배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우리는 우리 선생님에게 존경을 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선생님의 말씀에 경청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선생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 순종하듯 우리는 선생님께 순종할 때 여러분들의 영혼이 잘 되고 형통할 것입니다.

 

저는 오늘 스승 주일을 맞이하여 한 두 가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 두 가지란 “스승의 자세”와 “제자의 자세”입니다.

 

            먼저 가르치는 우리 스승의 자세에 대해서 한 3가지로만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 스승은 우리 자신을 가르쳐야 합니다.

             

로마서 2장 21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  예수님 당시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면서(마23:2) 자기 자신들은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면서 자기 자신들은 그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외식하게 된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물론 그 원인은 그들의 교만이었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다른 사람들은 가르치면서 자기 자신들은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롬2:21).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우리 교회 선생님들의 큰 문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물론 우리가 처음에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는 그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성경공부를 준비하고 그랬을 때 우리 자신에게 그 묵상하는 말씀을 비춰보면서 부지런히 자기 자신에게 적용하면서 자기 자신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다른 형제, 자매들을 가르치므로 그들에게 ‘참 잘 가르칩니다’라는 식의 칭찬까지 받을 때에 스스로 좋은 선생인 줄 착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좋은 선생님은 주님 밖에 없건만).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더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자 그 지체들을 열심히 잘 가르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을 가르치는데에는 게을리하게 되므로 마음이 교만해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른 사람들은 잘 가르치면서 자기 자신을 부지런히 잘 가르치지 않는 신앙 패턴이 오래되면 될 수록 가르침과 실행의 간격(gap)은 더욱더 벌어져서 결국에는 ‘성경 배우’(Bible actor)가 (연극 배우나 영화 배우처럼) 되고 마는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보니 나중에 가서는 이제 하나님 앞에서(coram Deo)가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 신앙생활을 흉내낼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 선생님들은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로서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 스승은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합니다.

          

            누가복음 20장 21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이 질문을 예수님에게 던진 사람들은 바로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보낸 정탐꾼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예수님을 즉시 잡고자 하되 백성들을 두려워하였습니다(19절).  그래서 그들은 엿보다가 예수님을 총독의 다스림과 권세 아래에 넘기려 하려 정탐들을 보내어 그들로 스스로 의인인 체하며 예수님의 말을 책잡게 하였습니다(20절).  그 정탐꾼들이 예수님께 던진 질문의 핵심은 누가복음 20장 22절입니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않으니이까.”  이 질문을 예수님께 던지기에 앞서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이 보낸 그 정탐꾼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물은 것입니다: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21절).  물론 예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백성 앞에서 능히 책잡지 못하게 놀라운 대답을 하셨습니다(26절).  그 대답은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고 말씀하신 “누구의 형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고 물으셨을 때 그들은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24절).  그 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25절).  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정탐꾼의 말 중에 누가복음 20장 21절을 보면 그들은 예수님에게 ‘선생님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생각할 때 우리 교회 선생님들은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는 교훈을 받는 것입니다.  왜 제가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되었냐면 요즘 성경공부라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한다고 하지만 과연 우리가 오직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 교회 선생님들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바로 말하고 가르치고 있는지 의문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진리의 말씀을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셨던 위대한 선생님이신 예수님처럼 우리 선생님들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바로 가르쳐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 스승은 우리가 가르치는 바를 먼저 행하고 지켜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본을 보여야 합니다.

              

            마태복음 23장 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예수님 당시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면서(마23:2) 자기 자신들은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면서 자기 자신들은 그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외식하는 것은 본받지 말아야 하지만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일 우리 선생님들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바로 가르치기는 하는데 그 가르친 말씀을 우리 자신이 먼저 지켜 행하지 않으면 예수님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외식하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외식하는 자들의 입에서 아무리 바른 진리의 말씀이 나온다 할지라도 삶 속에서 본이 되지 못한다면 그 가르침은 힘이 없을 수(powerless)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힘있게 가르치기 위해선 오직 진리의 말씀을 바로 가르쳐야 할 뿐만 아니라 그 가르친 말씀을 우리가 먼저 지켜 행해야 합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솔선수범을 보여야 합니다.  본으로 가르치는 방법(Teaching by example)이 최고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교육 방법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3장 15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예수님께서는 유월절 전에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13:1) 저녁 잡수시던 중에(3절) 자리에서 일어나서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4절)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5절).  그리하신 후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본을 보였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15절).  이 예수님의 교육 방법대로 사도 바울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우리 선생님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 우리가 가르치는 분들에게 본이 될 수 있길 기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우리 배우는 제자의 자세에 대해서 한 3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 배우는 자는 겸손히 배워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어야 매우 중요한 자세 중 하나는 바로 겸손(humility)입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우리에게 겸손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 중 하나는 바로 예수님의 씨 뿌리 비유에서 나오는 “좋은 땅”에 뿌려진 씨앗처럼 좋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합니다(눅8:15).  그러나 만일 우리 배우는 자가 마음이 교만하면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함께 성경공부를 하는 형제, 자매들에게도 결코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0장 12절 말씀을 깊이 새겨 들어야 함: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알면 얼마나 알겠습니까?  그런데 성경공부를 다른 형제, 자매들과 함께 하면서 만일 우리가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을 잘난척하듯이 말하면 그 얼마나 덕이 안됩니까? 스스로 선 줄로 착각하고 있는 교만한 사람은 분명히 넘어집니다.  그 이유는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기 때문입니다(잠18:12).  여러분, 우리 배우는 자는 우리 선생님에게 배우되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겸손히 배워야 합니다.  겸손히 배우되 특히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배워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4장 6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왜 사도 바울과 아볼로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가르친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우리 배우는 자는 우리 선생님에게 배우되 우리는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신명기 31장 13절을 보십시오: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 거주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에게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  이 말은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 가기에 앞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 놓고 한 말로서 이스라엘 백성의 남녀와 어린이와 그들 성읍 안에 거류하는 타국인에게도(12절) 말씀을 듣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게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13절).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워야 합니까?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울 때에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악을 멀리하므로 가나안 족속의 우상들을 섬기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는 교만한 죄를 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악을 멀리하므로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을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배우는 자는 우리가 배운바를 행하고 지켜야 합니다.

 

빌립보서 4장 9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교인들에게 자기에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참 스승이 되시는 예수님께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고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제자의 본분이요 도리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4-1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너는 네가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며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성경 말씀을 부지런히 배워서 확신한 일에 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심지어 우리 선생님이 외식하는 자라 할지라도 우리는 외식하는 선생님이 말하는 바를 행하고 지키되 그 선생님의 행위는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23장 3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우리의 본능은 우리 선생님이 위선적이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 참고 참다가 더 이상 그 분의 외식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을 때 우리는 더 이상 그분의 가르침을 듣지 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모든 사람의 본능이 다 같지 않을 수도 있기에).  아무리 그 분의 가르침이 훌륭할지라도 (아니면 적어도 성경에 어긋나지 않는 맞는 말씀일지라도) 우리는 더 이상 그 분을 존경할 수 없기에 우리 마음이 닫혀져서 그 분의 가르침을 거부하게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모습은 본 받지 말아야 하지만 “무엇이든지 저희의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라(3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선생님이 외식하는 자라 할지라도 그의 행위는 본받지 말아야 하지만 그의 가르침이 성경적일 때 그 모든  성경적인 가르침은 듣고 지켜 행해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 배우는 자는 선행을 배워야 합니다.

         

디도서 3장 14절을 보십시오: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좋은 일에 힘 쓰기를 배우게 하라.”  성경은 우리가 좋은 일, 즉 선한 일을 하는데 헌신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필요한 것을 공급하므로 열매 있는(생산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열매 맺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고 또 너희 열매가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라.”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택한 목적은 우리로 가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열매를 맺되 우리는 에베소서 2장 10절 말씀처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우리는 새롭게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부르시는 그 날까지 선행의 열매를 맺어드려야 합니다.  결코 우리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여 열매 없는 삶을 살아서는 아니될 것입니다(엡5:11).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스승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는 스승의 3가지 자세와 제자이 3가지 자세에 대해서 교훈을 받았습니다.  우리 스승은 우리 자신을 가르쳐야 하며, 우리 제자들에게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하며 그리고 우리가 가르치는 바를 먼저 행하고 지켜야 합니다 (본을 보여야 함).  그리고 우리 제자들은 겸손히 배워야 하며, 우리가 배운바를 행하고 지켜야 하며 또한 우리는 선행을 배워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스승 주일을 맞이하여 아브라함 링컨 전 대통령의 어머니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습니다.  링컨에겐 친어머니와 새어머니 두분이 계셨다고 합니다.  친어머니 낸시 행크스는 링컨이 10살 때 풍토병으로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까지 그녀는 하루종일 농사일과 허드렛일로 힘들고 지쳤지만 자녀들을 돌보고 교육하는 데 소홀히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린 링컨이 글을 읽기도 전부터에 링컨을 무릎에 앉혀놓고 성경을 읽어주었고, 링컨을 데리고 숲속이나 강가를 거닐며 동물, 식물, 물고기들의 이름과 특징을 조곤 조곤 설명해주곤 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링컨이 10살 때 풍토병으로 돌아가셨고 링컨은 1년간 어머니 없이 살다가 1년뒤 새어머니를 맞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새어머니 또한 신앙이 좋으셔서 링컨을 무릎에 앉혀놓고 구약 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링컨이 책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돈이 없어 책을 못사주자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책을 빌려오곤 했답니다.  밤 새 책을 읽다 아침에 못일어나는 링컨을 보고 속이 상한 아버지가 “이제 더 이상 책 빌려오지 마세요. 농사나 지을 아이가 책은 읽어서 뭘 해요!” 하고 핀잔을 주자 새어머니는 남편을 설득하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그 때 링컨의 새어머니는 이렇게 그녀의 남편에게 말했다고 함: “여보 나는 링컨을 친엄마처럼 키우고 싶어요.  낸시도 애정을 가지고 성경과 독서로 아이를 양육했잖아요.  링컨은 다른 아이들과 달리 총명하고 지혜로워요. 반드시 훌륭하게 자랄거에요.  당신도 함께 도와주세요”(인터넷).  저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새찬송가199장 “나의 사랑하는 책” 4절 가사와 후렴이 생각났습니다: “그 때 일은 지나고 나의 눈에 환하오 어머니의 말씀 기억하면서 나도 시시때때로 성경말씀 읽으며 주의 뜻을 따라 살려합니다 귀하고 귀하다 우리 어머니가 들려주시던 재미있게 듣던말 이책중에 있으니 이 성경 심히 사랑합니다.”  우리도 우리 스승이 사랑하시던 성경을 사랑하므로 그 성경 말씀을 읽으며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3년 5월 19일, 예수님을 본 받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