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축복 (2)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기뻐하지 아니한다 하시면 종이 여기 있사오니 선히 여기시는 대로 내게 행하시옵소서 하리라  …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사무엘하 15장 26절, 16장 11절).

 

 

            고통은 형통의 지름길인 것 같습니다.  비록 우리가 고통을 당할 그 당시에는 그 고통에서 하루속히 벗어나길 원하지 그 고통을 통한 형통의 축복을 기대하면서 인내하며 견디며 그 고통의 길을 끝까지 걸어가고자 하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고통을 통한 하나님의 형통의 축복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 고통의 길을 걸으면서 토기장이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그 형통의 축복을 받을 만한 사람으로 우리를 빚으시는 하나님의 손길에 우리 자신을 맡길 것입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하 15장 26절과 16장 11절을 보면 우리는 토기장이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형통의 복을 주시고자 어떻게 그를 빚으셨는지 그 두 번째 고통의 축복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그 두 번째 고통의 축복은 바로 겸손한 마음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통하여 다윗의 마음을 빚으시사 그의 마음을 겸손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뜻이라면 모든 고통스러운 상황을 겸허히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자세가 되있었습니다.  다윗이 겸손히 받아들인 고통스러운 상황이란 첫째로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가는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자기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므로 다시금 예루살렘 성읍으로 돌아오게 하지 않으실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15:25-26).  그래서 다윗은 광야로 도망가면서 예루살렘 성읍에서 가지고 나온 하나님의 궤를 제사장 사독에게 도로 메어 가라고 명하였습니다(25절).  그리고 만일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입으면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하나님의 궤가 있는 예루살렘 성읍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또한 믿고 겸손히 받아들이고자 했던 고통스러운 상황은 만일 하나님게서 자기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면 자기는 다시금 예루살렘 성읍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만일 하나님께서 그리하실지라도 하나님께서 선히 여기시는 대로 자기에게 행하시길 기원하였습니다(26절).  즉, 다윗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 뜻에 겸손히 순종할 자세가 되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고통을 통하여 다윗에게 주신 두 번째 축복이었습니다.   둘째로 다윗이 겸손히 받아들인 고통스러운 상황이란 압살롬의 반역으로 도망가는 상황에서 사울의 친족인 시므이가 계속하여 다윗을 저주한 것입니다(16:5).  저주하되 시므이는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길을 갈 때에 산비탈로 따라가면서 다윗을 저주하면서 그를 향하여 돌을 던지며 먼지를 날렸습니다(13절).  시므이의 저주는 이것이었습니다: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의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7-8절).  이렇게 시므이가 다윗을 저주할 때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다윗 왕게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9절)라고 청하였습니다.  그 때 다윗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10-11절).  놀랍지 않습니까?  어떻게 다윗은 아비새의 말대로 “이 죽은 개”와 같은 시므이로 하여금 자기에게 계속해서 저주하게 버려둘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마음을 빚으시사 겸손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겸손케 하시되 하나님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 앞에서만 겸손케 하신 것이 아니라 “이 죽은 개”와 같은 시므이 앞에서도 겸손케 하신 것입니다.  그랬기에 다윗은 시므이의 저주도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으로 받아들이고(11절) 그의 계속되는 저주를 들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혹시 하나님께서 자기의 원통함을 감찰하시사 그가 받는 저주 때문에 하나님께서 선으로 자기에게 갚아 주시길 기원하였습니다(12절).  다윗은 하나님께서 시므이의 저주를 돌이켜 자기에게 복이 되게 하시길 기원했던 것입니다(느13:2). 

 

            저주를 돌이켜 우리에게 복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은 고통을 통하여 우리 마음을 겸손케 하십니다.  겸손케 하시되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우리의 뜻을 굴복시키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내 뜻대로 마옵시소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케 만드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은 선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선하신 뜻을 고통을 통하여 빚어진 겸손한 자를 통하여 이루십니다.  하나님께서 나(우리)의 마음을 고통을 통하여서라도 겸손케 해주시길 기원합니다.    

 

 

마음이 겸손하신 예수님을 본 받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2013년 4월 11일, 저주를 돌이켜 복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욱더 맛보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