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교회를 생각할 때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시편 137).

 

 

2009년 5월14일, 국민일보 미션 라이프”라는 인터넷 뉴스를 보니깐 “교계인사 300여명, 한국교회 자성촉구 비상선언”이란 제목아래 기사가 쓰여 있어서 좀 읽어 보았습니다(인터넷). <목회자의 복음적 책무와 자정(自淨)을 위한 선언>라는 제목 아래 한 8가지를 선언하였습니다: (1) 복음적 가치에 충실하지 못한 것을 회개한다, (2) 교회가 분열과 대립으로 서로 사랑하지 못했음을 반성한다, (3) 목회자들의 도덕적 해이를 반성하며, 보다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견지할 것이다, (4) 교회가 성장 지상주의에 사로잡혀 교회 간 양극화를 초래한 일은 바로잡아야 할 과제로 인식한다, (5) 세상의 학위와 명예보다 영성의 권위자가 되기 위해 더욱 힘쓸 것이다, (6) 개인의 경건성과 사회적으로 건강한 영향력을 끼치는데 노력한다, (7) 복음적 바탕위에 깨끗한 교회의 정치를 이루어 나갈 것이다, (8) 교회가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는 사명에 힘쓸 것이다.’ 저는 이 여덟 가지 비상 선언문을 읽으면서 참 귀한 선언문이다 생각되었습니다. 이 선언문대로만 우리 교회들이 살아간다면 교회는 교회답게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저는 8개 선언문들 중 제일 첫째 선언문이 핵심이라 생각합니다. 즉, 우리 교회가 복음적 가치에 충실하지 못한 것을 회개해야 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 첫 번째 선언문에 대한 좀 더 구체적인 글은 이렇습니다: “사도들이 전해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이루신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며, 종교개혁자들이 순교로써 이룩한 개혁주의의 전통을 이어갈 것을 천명한다. 이 복음 위에 세워진 교회는 영혼을 살리는 병원이며, 하나님을 배우는 학교이다. 그런데 복음의 가치보다 세속적 성공에 치중하지는 않았는지, 더 높은 차원의 도덕적 윤리적 삶을 지향했는지, 형제를 사랑하고 이웃을 돌아보는 일에 최선을 다했는지에 대하여 깊은 자기 성찰을 하며, 뼈아픈 회개를 통하여, 앞으로 복음적 가치에 따라 충실하게 살고자 다짐한다”(인터넷). 참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선언문 내용입니다. 특히 저는 교회는 복음적 가치보다 세속적 성공에 치중하고 있음을 회개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합니다. 여러분은 교회를 생각할 때 우리 교회들(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교회를 생각할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우리는 교회를 생각할 때 울어야 합니다.

 

성경 시편 1371을 보십시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그 곳에 있으면서 바벨론 강변에 앉아서 바벨론이 멸망시킨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습니다. 왜 그는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회복의 은총을 간절히 사모하였기 때문입니다(박윤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비천한 데”, 즉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것을 말씀하셨습니다(136:23).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서 그 곳에서 시편 기자는 이 시를 쓴 것입니다(137편). 그들의 바벨론 포로 생활이 얼마나 서러웠겠습니까. 시편 기자는 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포로로 사로잡고 있는 자들이 시온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고 명했을 때 그 명령을 거부하려고 자기의 거문고를 버드나무에 걸어 두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2-3절). 그 이유는 시편 기자는 거룩한 노래를 이방인의 오락용으로 사용하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박윤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이방인들에게 포로로 잡혀가서 그곳에서 억압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한 노래를 오락용으로 부르기를 강압적으로 요구를 받을 때 그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므로 시편 기자는 오늘 본문 4절에서 이렇게 한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방에 있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꼬.” 이러한 한탄 가운데서 시편 기자는 바벨론에서 포로생활 가운데 고독함을 느끼면서 바벨론 강변에서 시온을 생각하며 울었는데 그 눈물을 저는 한 2 가지로 생각해 봅니다.

 

(1) 시편 기자가 흘렸던 눈물은 회개 기도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시편 기자의 울음은, 회개의 애통을 겸했을 것입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성도는 죄를 생각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통회할 것입니다(박윤선). 저는 “잃어버린 하나님의 은혜…”란 말을 생각해 볼 때 제 자신의 수요기도회 전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은혜가 충만할 때에는 마음에 감사와 평안함과 기쁨 등이 제 마음에 있는 충만함을 느낄 수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렸을 때에는 마음에 무거움과 근심과 걱정 등으로 차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께서는 저의 죄를 들춰내셨고 죄를 자백하게 하시면서 죄와 단절된 삶을 살도록 도전하셨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그 다음 날 목요일 아침 새벽기도회 후 어제 수요기도회 전에 먹다가 남았던 Kentucky Fried Chicken(KFC) 빵 한 조각을 손에 들고 기도할 때 제 눈가엔 눈물이 글썽였습니다. 그 이유는 수요기도회 때 설교할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생각할 때, 또한 우리 가정을 생각할 때, 특히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생각할 때 우리는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있을 때 교회는 하나님께 죄를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하나님께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회개 가운데 교회에 참된 회복과 화목과 개혁과 부흥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2) 시편 기자가 바벨론 강변에서 시온을 기억하면서 흘렸던 눈물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사모하며 흘렸던 기도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진정으로 회개하는 자의 마음에는 오직 구원자가 하나님 밖에 없음을 알기에 하나님께 구원해달라고 간절히 간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편 기자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그들의 죄를 범하므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와 생활하면서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다시 긍휼과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건져주시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자신들의 고향인 유대 땅으로 인도해 주시길 간구하였을 것입니다. 마치 요나가 큰 물고기 뱃속에서 다시금 주님을 바라보면서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욘2:9)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사모했던 것처럼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실 이는 오직 하나님 밖에 없음을 알고 그 분께 구원을 간절히 구하였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생각할 때 진정으로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더럽고 추한 죄에서 건져주시길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신랑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고 깨끗한 신부로 거듭나길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교회가 돼야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교회를 생각할 때 회개의 눈물과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사모하는 기도의 눈물을 흘릴 수 있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교회를 생각할 때 교회를 최고의 기쁨으로 삼아야 합니다.

 

성경 시편 1376을 보십시오: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지 아니하거나 내가 너를 나의 제일 즐거워하는 것보다 지나치게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 찌로다.” 시편 기자는 비록 지금은 이방인 나라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곳에서 자기의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예루살렘을 더욱 즐거워하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예루살렘을 자신의 최고의 기쁨으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시편 기자의 하나님 중심된 경건한 삶을 보여줍니다. 비록 이방인 나라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러한 가운데서도 시편 기자는 시온을 기억하며 울면서 하나님을 찾으며 사모했습니다. 어느 면으로 보면 마치 집을 떠난 자녀가 그의 부모님과 집을 더욱더 그리워하게 된 것처럼 시편 기자는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 예루살렘을 더욱더 그리워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이 바벨론으로 말미암아 폐허가 되었기에 다시 예루살렘이 재건되어 전처럼 번창하길 간절히 기원하였습니다(칼빈).

 

이것이 바로 저와 여러분의 간절히 기도가 돼야합니다. 즉, 우리는 폐허가 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주님께서 다시 재건해 주시사 초대교회 때처럼 번성하길 기원해야 합니다. 교회 역사가 그 때 만큼 교회의 전성기 언제 있었을까 생각합니다. 사도들이 성령 충만하여 복음을 담대히 선포하면서 복음의 능력이 나타났던 그 시대, 믿는 자들이 날마다 교회에 더하시는 성령의 역사, 그러한 가운데 사랑의 공동체로 세워지는 초대 교회의 모습처럼 우리 현 시대의 교회가 그렇게 돼야합니다. 이러한 교회의 참된 번창을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현 시대 교회를 바라보면서 시편 기자처럼 회개의 눈물과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사모하는 기도의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서 일으키셨던 16세기 종교개혁 때처럼 지금 우리 시대에도 이러한 참된 종교개혁을 주님께서 일으켜 주시길 간구해야 합니다. 왜 우리는 교회를 생각할 때 이렇게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교회가 우리의 최고의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이 우리의 최고의 기쁨이 되시기에 그의 몸 된 교회 또한 우리의 최고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익히 들어 아는 웨스트민스터 성경 소요리 문답 문제 1.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의 대답, 곧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자는 그의 교회 또한 즐거워합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교회를 우리의 최고의 기쁨으로 삼아 즐거워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먼저 주님의 교회를 기억하고 울어야 합니다. 교회의 죄를 범하므로 황폐한 모습을 영의 눈으로 보고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이러한 진정한 회개의 눈물이 없이는 주님께서 교회를 건지시고 세우시는 역사의 참된 기쁨을 맛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주님의 교회를 최고의 즐거움으로 삼길 원한다면 회개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는 주님께 주님의 교회를 구원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간절한 기도는 주님께서 그의 몸 된 교회를 재건하시는 것, 세우시는 것이 돼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의 교회를 세우실 때 우리는 거기서 극락의 하나님, 우리의 최고의 기쁨이 되시는 주님께 나아가 시온의 노래로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교회를 최고의 기쁨으로 삼아 즐거워하는 자의 삶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우리는 교회를 생각할 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 시편 1377-9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의 대적이자 원수인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심판, 벌)을 구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이 기도를 드리면서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해 받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라고 하나님께 간구했습니다(7절). 물론 에돔 자손은 바벨론은 아닙니다. 오히려 에돔 자손은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칠 때에 기뻐했습니다(욥10-16).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과 본래 형제 관계인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숙적이 되어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어 있었습니다(박윤선). 여기서 에돔이나 바벨론이나 다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시137:7-9). 그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대적하였고 압제하였기 때문입니다. 바벨론 강변에서 시온을 기억하여 울었던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예루살렘을 황폐케 한 바벨론을 비유한 에돔 자손을 쳐 주시길 간구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교회의 원수인 사단과 그의 악한 종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길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기도에 익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는 가운데 악인의 심판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은 좀 균형을 잃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 특히 구약을 보면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심판은 동전은 앞뒤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 즉 교회를 구원하심에 있어서 그의 백성들, 교회의 원수들을 심판(벌)하시므로 그의 백성들(교회)을 구원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의 구원과 더불어 교회의 원수의 멸망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의 원수에게 벌을 내리시길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생각할 때 2 가지가 생각납니다. 주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인 마태복음16장18절 ‘내가 … 내 교회를 세우리니 …’라는 말씀과 찬송가 246장 “내 주의 나라와”입니다. 2003년도에 교회갱신목회자협의회(교갱협) 수련회 때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그 말씀을 받고 하나님께 찬양을 부르면 눈물을 흘리며 우리 교회를 생각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때 우리 교회를 생각하며 그리움과 사랑 가운데 눈물을 흘렸던 생각이 납니다. 주님이 세우시는 우리 교회, 예수님을 알아가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교회, 그러므로 예수님을 바로 고백하며 또한 그 고백한 대로 살아드리는 교회가 되길 기도합니다. 또한 주님이 세우시는 우리 교회를 주님께서 든든한 반석 위에 세워주시길 기도합니다. 나 자신과 세상과 죄악과 사단과 싸워 승리하는 참된 우리 교회가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