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교회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빌립보서 21-4).

 

 

새들백교회 담임 목사님이신 릭 원레 목사님은 이러한 주장을 하였습니다: “21세기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이슈는 교회 성장이 아니라, 교회 건강이다. 교인 숫자가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건강이 문제다.” 그러면서 그는 교회 성장을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은 다섯 가지를 제안하였습니다: (1) 교회는 친교를 통해 더욱 따스하게 성장할 필요가 있고, (2) 제자직을 통해 더욱 깊어지며, (3) 예배를 통해 더욱 강건해지며, (4) 사역을 통해 더욱 넓어지며, 그리고 (5) 전도를 통해 더욱 크게 성장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들의 숫자보다는, 사역과 선교를 위해 동원되는 교인들의 퍼센티지가 그 교회의 건강상태를 보여주는 보다 정확한 척도’라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이 말을 생각할 때 과연 우리 교회는 건강한 교회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저는 “건강한 교회”라는 말보다 “교회다운 교회”라는 말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다시 말하면, 과연 우리 교회는 교회다운 교회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과연 교회다운 교회는 어떠한 교회일까요? 한 마디로, “교회다운 교회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교회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성경 사도행전 242-43을 보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교회를 한 4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1) 교회다운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움에 전혀 힘습니다.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통하여 예수님을 영접한 3000명, 그들은 믿은 지 얼마 안 된 초신자들로서 믿음의 성장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기에 전혀 힘썼습니다. 교회다운 교회 성도님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열심히 배웁니다. (2) 교회다운 교회는 서로 교제하기에 전혀 힘습니다. 교제란 한 마디로 함께 나누는 것(공유)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것(분유)입니다. 교회다운 교회 성도들은 주님 안에서 공유하며 분유하므로 서로 돕습니다. (3) 교회다운 교회는 성찬에 전혀 힘습니다. 교회다운 교회 성도님들은 성찬식을 통하여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떡과 포도주를 겸손히 믿음으로 받아 주님의 은혜를 받아 누립니다. (4) 기도하기를 전혀 힘썼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각종 기도에 전적으로 헌신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의 기도는 120문도의 기도(1:14-15)를 본받아 3천 명으로 확장되었을 때도 계속해서 기도하는데 헌신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게 교인들의 수적인 성장은 곧 기도하는 사람들의 증가를 의미했습니다. 교회다운 교회 성도님들은 기도하는데 헌신합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24절 하반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내려가면서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make my joy complete)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어떻게 해야 자신의 기쁨을 충만하게 할 수 있는지를 한 4가지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4 가지 교훈을 우리 교회에 적용해 보려고 합니다. “주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교회”란 제목 아래 우리 교회가 이 4 가지 교훈을 겸손히 받아 순종하므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주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 권면이 있습니다.

 

성경 빌립보서21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 여러분, “권면”이란 무엇입니까? 네이버 사전을 보니깐 한국어로 “권면”하면 “알아듣도록 권하고 격려하여 힘쓰게 함”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네이버 사전). 그런데 원어인 헬라어로 “권면”이란 “간곡한 권고, 장려”(exhortation), “격려”(encouragement), “위로”(comfort)란 뜻이 있는데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1절에 나오는 “권면”이란 단어의 뜻은 ‘신자들의 믿음을 견고케 하며 확고히 하는 목적으로 간곡히 권고(장려)(exhortation)하던지 책망(경고)(admonition)하던지 또는 격려(위로)(encouragement)하는 것을 의미합니다(Zodhiates). 이 단어를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 외에도 그의 편지에 여러 번 사용하였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고린도후서 84입니다: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그러면 성경 빌립보서 2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간절히 구하는 것(urgently plead), 즉 그가 간곡히 권고하는 것(exhort)은 무엇일까요? 바로 ‘마음을 같이하라’는 것입니다. 2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마음을 같이하여….” 여기서 ‘마음을 같이하라’는 말씀은 사도 바울이 이미 빌립보서 127에서 말한 것처럼 “한 마음”(one mind)을 말합니다. 즉,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한마음을 품으라고 그리스도 안에서 간곡히 권고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것이 바로 교회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27). 그런데 불행하게도 빌립보 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빌립보서 42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빌립보 교회 안에서 이 두 여인들은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하고 있었기에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한 마음을 품으십시오’ (1:27), ‘마음을 같이하십시오’(2:2)라고 온 교회 성도들에게 말하면서 4장 2절에 와서는 유오디아와 순두게란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그 두 여인에게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간곡히 권면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 빌립보서 23절 상반절을 보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는 것을 보면 그들 가운데서 다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다툼이 있었던 원인은 바로 허영심(vain conceit)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 “허영”이 무엇입니까? 네이버 사전을 보면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자기 분수에 넘치고 실속이 없이 겉모습뿐인 영화. 또는 필요 이상의 겉치레”(네이버 사전). 만일 교회 안에 분수에 넘치고 실속이 없이 겉모습뿐인 영화를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민수기16에 나옵니다. 레위 사람 고라와 르우벤 자손 다단과 아비람과 온이란 사람들이(민16:1) 먼저 당(파)을 짖고(1절)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에 유명한 어떤 족장 이백 오십인”(2절)을 포섭하여 함께 일어나서 그들의 지도자 모세를 거슬렸습니다(2절). 그들이 함께 모여 모세와 아론을 거슬려 한 말은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이였습니다(3절). 그들이 모세에게 주장한 것은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뇨”였습니다(3절). 그 말을 들은 모세는 먼저 엎드려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16:4). 그리고 그는 고라와 그 모든 무리에게 “레위 자손들아 너희가 너무 분수에 지나치느니라”고 면책하였습니다(7절). 그런 후 모세는 고라와 레위 자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 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 하나님이 너와 네 모든 형제 레위 자손으로 너와 함께 가까이 오게 하신 것이 작은 일이 아니어늘 너희가 오히려 제사장의 직분을 구하느냐.” 무슨 말입니까? 고라와 레위 자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작게 여겼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셨고 회중을 대신하여 그들 앞에 서서 섬기게 하셨는데 그들은 그 귀한 직분을 가볍게 여겼던 것입니다. 결코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작게 여기고 “오히려” 아론과 같이 제사장 직분을 구하였던 것입니다. 고라와 레위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직분을 작게 여기고 가볍게 여기므로 말미암아 주제넘게 생각하여 분수에 지나치는 말을 모세와 아론에게 한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모세와 아론만 거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거슬렸습니다(11절). 그 결과는 모세와 아론을 대적하였던 고라와 그 모든 무리들은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33, 35절). 여러분, 우리는 분수에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분수에 너무 지나친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분수에 맞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빌2:3). 결코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은혜로 허락해 주신 직분을 작게 가볍게 여겨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사 구별하여 섬기게 하신 직분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겸손히 그리고 자원하는 심령으로 즐겁게 섬겨야 합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고 있지 않고 있었던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이 간곡히 권면하고 있는 마음은 무엇입니까? 다시 말하면, 바울이 그들에게 ‘마음을 같이하라’, ‘한 마음을 품으라’,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간곡히 권면하였는데 여기서 바울이 염두해 두고 있는 ‘마음’은 어떠한 마음입니까? 성경 빌립보서 23을 보십시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여러분, 바울이 염두해 두고 있는 마음은 바로 “겸손한 마음”(humility)입니다. 그리고 그 겸손한 마음은 ‘나 자신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consider others better than myself)(3절).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어떻게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길 수 있을까요? 실제로 우리가 보면 ‘내가 저 사람보다 믿음도 더 좋고 신앙생활도 더 훌륭한 것 같은데’ 어떻게 저 사람을 나 자신보다 낫에 여길 수 있을까요? 저는 그 대답을 로마서520절 하반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즉,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지 깨달아 가면 갈수록 우리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깨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겸손히 고백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고전15:9). 실제로는 사도 바울은 지극히 큰 사도보다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었습니다(고후11:5; 12:1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고 고백한 것입니다(고전15:9). 그런 후 바울은 에베소서 38에서 이렇게 고백을 하였습니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 그러다가 바울은 인생의 마지막 부분에 와서는 이렇게 고백을 하였습니다: “… 죄인 중에 괴수니라”(딤후1:15). 이렇게 우리가 사람들 앞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 지면 질수록 우리는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길 수가 있습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을 할 수가 있습니다(갈5:13). 그리할 때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며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할 수가 있습니다(롬12:10).

 

여러분, 우리 모두가 이 바울의 간곡한 권면을 듣고 겸손한 마음을 품을때 우리 교회는 마음을 같이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품어야 할 겸손한 마음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25에서 하는 말을 들어 보십시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우리 교회 모든 식구들이 다 함께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품을 때에 주님의 기쁨을 충만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겸손히 주를 섬길 때 괴로운 일이 많으나 구주여 내게 힘주사 잘 감당하게 하소서“ (새찬송가 212장, 1절).

 

둘째로, 주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교회는 사랑의 위로가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힘들고 어려울 때 위로가 절실히 필요할 때 어떻게 하십니까? 그 때에 어쩌면 우리는 가까운 가족 식구나 친구들을 의지하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을 나누며 쏟아내기까지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무리 그들에게 위로를 받으려고 가까이 다가가도 오히려 그들이 우리에게 낯선 사람들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시편 69:8). 심지어 우리는 그들에게 이해를 받고 위로를 받기보다 오히려 더 낙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 민수기 327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낙심케 한 자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다름 아닌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들입니다. 어떻게 갓 지파와 르우벤 지파 사람들이 나머지 지파 사람들을 낙심시켰습니까? 그들은 그들의 형제들인 다른 10지파들과 함께 요단강 건너 가나안 백성들과 싸우러 가지 않고 목축할 만한 장소(1, 4절)인 야셀 땅과 길르앗 땅에(1절) 거주하길 모세에게 요청하였기 때문입니다(5절). 그들은 모세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그들의 소유로 주시고 우리에게 요단강을 건너지 않게하소서”(5절). 그 말을 들은 모세는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아 있고자 하느냐”(6절)고 책망하면서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낙심하게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 하느냐”(7절)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은 나머지 10지파 형제들을 낙심케 하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들뿐만 아니라 그들의 조상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낙심시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9, 14절). 그들의 조상들은 10명의 가나안 땅 정탐꾼들의 악평(13:32, 14:35, 36)하므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낙심시켜(신1:28) 그들로 하여금 밤새도록 통곡하며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게 만들었습니다(민14:1). 결국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의 조상인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은 10명의 정탐꾼들은 자신들만 낙심시킨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불신의 보고(“악평”)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 또한 낙심케 하였습니다. 그리고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은 이스라엘 전 공동체 책임을 망각하고 자기들만 생각한 이기적인 욕구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공동체를 낙심시켰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들의 조상들처럼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낙심시켰는데 그 원인은 한 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참고: 24절).

 

여러분,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으면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 모든 사람들을 낙심케 할 수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지 않고 불신하면 우리는 우리 형제들을 낙심케 할 수가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교회란 공동체 안에서 개인의 책임뿐만 아니라 공동체적인 책임을 신실하게 감당하지 않을 때 우리는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 있는 지체들을 낙심케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낙심케 하는 자가 아니라 위로하는 자가 돼야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로하고 계시듯이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우리도 우리 이웃을 위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 빌립보서21을 보십시오: “… 사랑의 무슨 위로나 ….”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 내려가면서 “사랑의 무슨 위로나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 성경에는 “사랑”이라고 쓰여 있지만 영어성경에는 “his love”(그 분의 사랑), 즉 그리스도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바울은 빌립보 교회 형제, 자매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위로하라고 간곡히 권면하고 있습니다. 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그렇게 권면했을까요? 우리는 그 이유를 빌립보서 130에서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그 이유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 때문에 싸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고난(29절)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또한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28절) 고난을 당하고 있었기에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위로하라고 간곡히 권면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성경 빌립보서 2장 2절에서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라(having the same love)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 뜻은 빌립보 교회가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에 모든 성도들이 다 같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며 서로 위로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어떻게 다 같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며 서로 위로하라 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빌립보서 24을 보십시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현대인의 성경) “자기 이익만 생각하지 말고 남의 이익도 생각하십시오”]. 같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위로하는 방법은 다른 사람의 이익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위로하기 위해선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 자신의 일보다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라는 권면의 말씀은 우리의 이웃 사랑이 자기 이익만을 구하는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처럼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구하는 이타적인 사랑을 하라는 뜻입니다. 특히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이타적인 사랑으로 다른 형제, 자매들의 일을 돌보되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구하지 말고 서로의 이익을 구하므로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빌립보서42을 보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 안에 유오디아란 사람과 순두게란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서 우리가 다 각자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자신의 일만 돌본다면 교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다 각자 자기 마음대로 생각하고, 자기 마음대로 말하며 행동하고, 다 각자 자기 마음대로 교회를 봉사한다면 그 교회의 모습은 어떠하겠습니까? 결코 그러한 교회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교회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사랑이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 유명한 사랑장인 고린도전서135을 보면 사랑은“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한다(it is not self-seeking)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같은 사랑”(빌2:2)으로 서로 사랑하고 서로 위로하라는 것은 곧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어떻게 우리가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할 수 있을까요? 헨리 나우웬은 그의 책 돌봄의 영성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돌봄’(care)이란 말의 어원인 ‘kara’라는 단어는 ‘슬퍼하다, 애통하다, 고난에 동참하다, 고통을 나누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 돌봄이란, 병들고 혼란스럽고 외롭고 고립되고 잊힌 사람들과 함께 부르짖는 것이다. 즉 그들의 고통이 내 마음속에도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돌봄이란, 깨어지고 무력한 사람들의 세상 속에 들어가 그곳에서 연약한 사람들끼리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또한 고통당하는 사람들 곁에 있어주되 상황이 호전될 가능성이 없을지라도 계속 같이 있어주는 것이다"(나우웬). 여러분, 이러한 돌봄으로 우리가 서로를 돌아본다면 얼마나 서로 위로가 되겠습니까? 성경 빌립보서 2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사랑의 무슨 위로”(if any comfort from his love)란 말에 대해서 죤 맥아더 목사님은 의하면 “위로”(comfort)란 헬라어 단어의 의미가 이렇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신자에게 가까기 다가오셔서 그/녀의 귀에 온화한 응원의 말들을 속삭이시던지 부드러운 조언의 말을 하신다는 것을 묘사한다[The Greek word translated “comfort” portrays the Lord coming close and whispering words of gentle cheer or tender counsel in a believer’s ear(MacArthur)]. 우리도 예수님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형제를 위로하려고 할 때 그 형제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귀에다가 온화한 응원의 말을 하던지 또는 부드러운 조언을 해야 합니다.

 

언젠가 사도행전 1535-41 말씀 중심으로 “위로의 사역”이란 제목 아래 말씀을 묵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과연 어떻게 우리가 위로의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가를 한 3가지로 묵상했었습니다. (1) 우리가 위로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선 우리는 주님 안에서 진정한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서로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기 위한 만남을 가져야 합니다. (2) 우리가 위로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선 우리는 서로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즉, 우리는 서로 화목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을 1차 선교지 재방문 여행에 데리고 갈 것인지 말 것인지로 인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섰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은 주님을 향한 열심도 잘 조절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열심이 통솔되지 못할 정도로 탈선되면 안 됩니다(칼빈). (3) 우리가 위로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선 우리는 교회를 굳게 해야 합니다. 어떻게 교회를 굳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이 성장할 때에 교회는 굳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위로의 사역입니다. 이 위로의 사역을 주님 안에서 신실하게 잘 감당할 때 주님의 기쁨을 충만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로, 주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교회는 성령의 교제가 있습니다.

 

언젠가 교회 영어사역 지도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제가 그들에게 왜 대학교만 가면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지 그들의 생각을 듣고 싶어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때 한 형제는 교회를 한번 두 번 안 나오기 시작하다 보면 습관이 되는 것 같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형제는 어쩌면 교회 안에 ‘socializing’(사교)가 없어서 그런 것 같다고 말하면서 또 다른 영어 단어를 사용했는데 그 단어가 바로 “fellowship”(친교/친목)이었습니다. 왠지 그 형제는 사교와 친교/친목을 비슷한 의미로 사용하는 것 같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개인적인 생각은 교회 안에서 남용되고 있는 기독교 용어 중에 하나가 바로 “교제”(fellowship)라고 생각합니다. 이 단어가 어떻게 남용되는가 하면 많은 성도님들이 “교제”를 무슨 “활동”(activity)로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제는 활동이 아니라 “관계”(relationship)입니다(Jerry Bridges). 먼저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수직적인 교제)를 통하여 관계를 세워 나아가는 가운데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형제/자매들과 교제(수평적인 교제)를 통하여 관계를 세워 나아가야 합니다.

 

성경 사도행전242을 보면 초대 교회 안에서 “서로 교제하”였다 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서 “교제”란 헬라어 단어인 “코이노니아”속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함께 나눈다는 것입니다(공유). 둘째 의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것입니다 (분유). 우리가 다루고 있는 성도간의 교제는 단순히 사람들과 음식을 먹으며 재미있는 대화를 나눈 것이 아닙니다. 무슨 기독교적인 분위기에서 게임을 한다거나 단지 지난주에 있었던 일을 서로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거듭나기 이전에도 해왔던 것입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나눔 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배운 것을 서로 나누고 함께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것” “다른 성도의 어려움을 중보 기도하는 것” “자신의 소유물을 서로 나누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도행전 242에서 말씀하고 있는 “교제”란 무엇입니까? 헬라어 원어에는 정관사가 붙어 있어 “그 교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교제”란 무엇을 가리킵니까? 바로 “성령의 교제”를 가리킵니다. 오순절 날 성령의 충만한 역사 가운데 약 3000명 새로운 성도들이 함께 공유했던 것은 그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 이였습니다. 그러므로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성령의 교제에 헌신했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성령의 공동체 안에서 성령의 교제는 당연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단지 사람들이 하나로 뭉쳐서 일치와 단결을 이룬 인본주의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성령이 중심과 핵심이 되는 성령의 교제 공동체였습니다(유상섭).

 

성경 빌립보서 21을 보십시오: “… 성령의 무슨 교제나 …”(if any fellowship with the Spirit).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 내려가면서 그들에게 ‘성령의 교제’를 하라고 간곡히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 권면의 목적은 바로 교회의 통일성/일치(unity)입니다. 비록 교회 안에는 다양한 은사가 있고(고전12:4), 다양한 직분이 있으며(5절) 또한 다양한 사역이 있지만(6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11절). 주님의 몸된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되(18절) 특히 하나님께서는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라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습니다(24-25절). 그러므로 우리의 책임은“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는 것입니다(엡4:3).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성령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킬 수 있습니까? 성경 빌립보서 22을 보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뜻을 합하”라(united in spirit)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 문자적 의미는 ‘한 영혼’으로서 사람들이 같은 의욕과 같은 열정과 같은 야망을 가지고 서로 밀접하게 결합되어 조화를 이루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It means “one-souled” and describes people who are knit together in harmony, having the same desires, passions and ambitions(MacArthur)]. 성경 빌립보서127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말하면서 그 복음에 합당한 생활이란 “한 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뜻”이란 “의지와 의욕”(will and desire)을 가리킵니다(칼빈).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주님의 겸손한 마음으로 한 마음을 품고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림에 있어서 같은 의지와 열정으로 주님의 일을 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우리가 “뜻을 합하여” 함께 힘을 합쳐 서로 도우면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만일 우리가 다 각자 자기 생각과 자기 의지대로 행한다면 우리는 한 마음, 한 뜻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길 수가 없습니다. 그저 각자 자기의 마음과 생각대로, 각자 자기의 뜻대로 주님의 일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 모두가 우리 각자의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함께 추구한다면 우리는 한 마음, 한 뜻으로 주님의 일을 협력하여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우리 각자의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함께 추구해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영적그레질을 해야 합니다. 영적 그레질이란 무엇입니까? 여러분, 한옥을 지을 때에 일반적으로 가장 먼저 하는 작업은 바로 주추를 놓는 일입니다. 여기서 주추란 기둥 밑에 괴는 돌을 의미합니다. 그 주추를 다 놓으면 그 때서야 기둥을 세우는데 바로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웁니다. 그리고 나서 기둥과 기둥을 잡아는 주는 일(창방)을 하며 집을 세워갑니다. 그런데 주추 위에 기둥을 세울 때에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레질입니다. 여기서 그레질이란 주춧돌은 보통 자연석을 쓰다 보니까 아무리 넓고 평평한 돌을 골랐다 해도 기둥을 바로 세우기가 어렵기에 주추 위에 기둥을 세우려면 주춧돌의 면과 기둥의 면이 잘 맞아 떨어지도록 하는 선 작업을 해 주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그레질입니다. 그레질의 방법은 간단합니다. 주춧돌 위에 세워지는 기둥의 면을 주춧돌에 맞게 깎고 갈아 내는 것입니다. 기초가 되는 주춧돌에 손을 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 위에 세워지는 기둥의 면을 깎고 다듬어 주추에 맞추는 것입니다. 기준은 기둥이 아니라 항상 주춧돌입니다. 그리고 이 그레질을 잘하면 잘 할수록 집은 더 안전하고 튼튼하게 세워집니다(인터넷). 저는 여기서 영적 그레질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영적 그레질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반석이 되시는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마7:24). 다시 말하면, 영적 그레질이란 우리가 그저 “주여 주여”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21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치 집을 지음에 있어서 기준이 기둥이 아니라 주초인 것처럼 우리의 삶에 기준은 바로 주님이요 주님의 뜻입니다. 그 말은 마치 주초가 기둥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기둥이 주초에 맞춰야 하는 것처럼 주님의 뜻을 우리 뜻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뜻을 주님의 뜻에 맞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로서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오직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온 교회 식구들이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의 기쁨을 충만케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넷째로, 주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교회는 긍휼과 자비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 표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입니다. 그리고 표어 구절은 바로 빌립보서18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금년 우리 교회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우리의 이웃을 사모(갈망)하여(빌1:8) 그들을 측은히 여기며(렘31: 20) 또한 그들을 시기하기 까지 사모해야(약4:5)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우리의 이웃을 항상 생각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빌1:9-11). 그리고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빌1:5). 우리의 한 해를 뒤돌아 볼 때에 여러분은 과연 이 목표에 얼마나 도달했다고 생각하십니까? 과연 저와 여러분은 이웃을 시기하기까지 사모하면서 그 이웃을 측은히 여겼습니까? 과연 저와 여러분은 이웃을 위하여 항상 기억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까? 과연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였습니까? 적어도 우리가 이웃을 바라보면서 긍휼이 여기는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그 이웃을 돌보아 주고 또는 도와준 적이 있는지요?

 

성경 빌립보서 21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if any affection and compassion). 여기서 “긍휼”(affection)이란 단어는 빌립보서 18에서 말씀하고 있는 “심장”(affection)이란 동일한 헬라어 단어입니다. 지금 바울은 자기가 (로마) 옥에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그들을 사모하고 있는 것처럼(1:8) 그들 또한 서로 그리스도의 긍휼로 서로 사모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2:1). 성경 요한일서 317-18을 보십시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이 여기는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사모한다면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 그냥 도와 줄 마음을 닫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닫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또한 그는 말로만 ‘참 안됐네요. 불쌍하네요’ 등등 이라고 말하면서 말로만 도와주려고 하진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행함과 진실함으로 그 궁핍한 형제를 도와줄 것입니다. 이러한 긍휼이 형제들의 관계에서 더욱 깊어질 수 있는 방법은 바로 서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영접하며 또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고린도후서715에 나와 있습니다: “그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이 말씀은 디도가 고린도 교회에 방문했을 때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그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므로 그들을 향하여 디도의 심정(심장, 사랑, 긍휼)이 더욱 깊어졌다고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통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디도의 마음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로 인하여 그의 영혼이 회복 되었다고 바울은 말하였습니다(13절). 즉, 디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사랑과 위로로 인하여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러한 디도의 모습을 보고 바울은 위로만 받았을 뿐만 아니라 “더욱 많이 기뻐”하였습니다(13절). 그러면 성경 빌립보서 2장 1절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자비”(compassion)은 무슨 뜻입니까? “긍휼”이란 영어 단어로 “compassion”이며 라틴 어로는 ‘파티’(pati)와 ‘쿰’(cum)에서 파생된 말로서 이 두 단어를 합치며 ‘함께 고통 받다’라는 의미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그의 책긍휼에서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긍휼이란 우리에게 상처가 있는 곳으로 가라고, 고통이 있는 장소로 들어가라고, 깨어진 아픔과 두려움, 혼돈과 고뇌를 함께 나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6:36). 여기서 나타난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은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요, 은혜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를 보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속량하심으로 우리에게 그분의 자비로우심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자비로우심을 경험한 우리는 우리의 어려운 이웃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구제하고(마6:2-4, 참고: 약1:27),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이웃이 있다면 그들을 불쌍히 여겨 용서해야 합니다(마18:35).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주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복인 “긍휼히 여기심”을 받게 될 것이고(5:7), 주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용서해 주시고 구제하여(도와) 주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성경 빌립보서 21에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긍휼과 자비”(affection and compassion)에 대해서 말하는 목적은 긍휼과 자비로운 마음으로 한 목적을 가지고 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성경 빌립보서22을 보십시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여기서 “한 마음을 품어”란 말은 원어인 헬라어로 한 단어인데 그 의미를 영어 성경이 잘 번역했습니다. 영어로는 “intent on one purpose”라고 번역돼 있는데 그 뜻은 ‘한 목적을 의도하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가 빌립보서25에 또 나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Have this attitude in yourselves …). 여기서 ‘마음을 품으라’는 말은 목적을 가지고 나아가는 ‘자세’나 ‘마음의 틀’을 가리킵니다(Friberg). 즉,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을 목적을 삼고 그 목적을 향해서 나아가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한 마음일 뿐만 아니라 “긍휼과 자비”로운 마음입니다. 그 마음으로 온 교회 성도들이 서로 사모하고 사랑하고 위로하며 주님 안에서 참된 교제를 하라고 바울은 그들에게 편지로나마 간곡히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간곡한 바울의 권면을 우리가 들어야 하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가 바울의 권면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과 자비로운 마음을 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 마음으로 우리는 서로 사모하고 서로 사랑하며 서로 위로하여 긍휼과 자비를 베풀므로 주님 안에서 참된 교제를 나눠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교회는 주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권면을 해야 합니다. 그 권면이란 마음을 같이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며 서로 위로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구하는 이타적인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령의 교제를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 따라 뜻을 합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의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함께 공유하고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긍휼과 자비로운 마음으로 한 목적을 가지고 함께 나아가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목적을 가지고 한 마음, 한 뜻으로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나아가므로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는 우리 교회가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