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수가 날마다 더하는 교회 (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여러 성으로 다녀 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이 작정한 규례를 그들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건해지고 수가 날미다 들어가니라” (사도행전 161-5).

 

 

언젠가 교회 지도자 성경공부 시간 사도행전 4장 공부를 통하여 주신 깨달음입니다. 그 깨달음은 사도행전 4장에 나타난 주님의 교회(본문에선 초대교회)를 주님께서 어떻게 세우셨는지 그 패턴(pattern)을 보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초대교회를 세우심에 있어서의 패턴을 한 5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패턴의 명칭: “위에서 아래로 방법”(Top to Bottom Method)]: (1) 기도(31절, 참고: 1:14-15), (2) 성령 충만(8,31절), (3) 복음전파(8-12절), (4) 믿는 자가 많아짐(4절, 참고: 2:47), (5) 사랑 공동체(32-37절). 그런데 놀란 것은 그 패턴과 현 시대 우리 교회들이 세워짐의 패턴이 정반대라 생각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정반대 세상의 방법을 “아래에서 위로방법”(Bottom to Top Method)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1) 교회:

 

주님의 방법의 우선순위에서의 첫 번째는 기도지만 세상 방법은 교회란 공동체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한 마음과 한 뜻이 되고자 노력한다고 하지만 요즘 너무나 많은 교회들이 여러 마음과 여러 뜻을 가지고 교회를 세워 나아가려고 하는 모습을 보면 결코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2) 교인 숫자

 

세상적인 두 번째 방법은 교회 숫자 증가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복음을 듣고 구원받는 사람들이 더해진 것이 아니라 “양 도둑”이란 책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수평이동이요 양 도둑질로 말미암아 교인 수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듣고 나오는 사람들이 아니라 교인들의 이름을 봐서 나오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지는 않는지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전도/선교

 

세 번째 방법은 마지못해 전도와 선교를 하는 것입니다.

 

(4) 성령 충만

 

네 번째 방법에 가서야 성령 충만함을 구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이것이 제일 첫 번째가 돼야 함에도 불구하고 세상 방법에선 이렇게 마지막 부분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령 충만함도 과연 성경적인지 감정적인지 신비스러울 정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5) 기도

 

이 기도조차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기보다 우리의 주권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자세로 상황과 느낌과 우리 생각에 치우쳐 부르짖을 때가 많지 않나 생각됩니다.

 

성경 사도행전 165 말씀을 보면 이렇게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 이 말씀 중심으로 “믿음과 수가 날마다 더하는 교회”란 제목아래 우리 교회가 믿음과 수가 날마다 더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묵상하면서 주시는 은혜를 누리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 교회가 믿음과 수가 날마다 더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제자가 돼야합니다.

 

성경 사도행전 161을 보십시오: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모친은 믿는 유대여자요 부친은 헬라인이라.” 사도 바울은 바나바와 다투고 갈라선 후(15:39) 실라와 함께 제1차 선교지인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였습니다(41절). 그런 후 그들은 더베를 거쳐서 루스드라에 이르렀습니다(16:1). 이 루스드라라는 지역은 바울의 1차 선교 사역 중에 날 때부터 전혀 걷지 못한 사람을 일으킨 놀라운 기적을 행한 곳입니다(14장). 그 결과로 인해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난 헤르메스와 제우스 신으로 오인하여 그들에게 희생 제사를 드리려 했던 대소동이 있었던 곳입니다(유상섭). 이 루스드라라는 곳은 이방인들이 인구의 절대 다수를 형성하는 이교 중심의 도시로서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바나바를 사용하시사 그들의 제1차 선교 사역 때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또한 이적도 행하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이렇게 여러 해가 지난 후 바울이 실라와 다시 루스드라로 돌아왔을 때, 이 이방인 도시에 소수의 믿는 유대인들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소수의 믿는 유대인들 중 바울이 만난 새로운 인물은 바로 디모데라는 제자였습니다(유상섭). 이 디모데란 예수님의 제자는 지금 말로 하면 혼혈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16:1). 즉, 그의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였고 아버지는 헬라인 이였습니다. 디모데의 어머니의 이름은 유니게(Eunice)로서 디모데후서 1장 5절을 보면 그녀는 그녀의 어머니인 로이스(Lois)처럼 마음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sincere faith)이 있었는데 디모데도 그의 외조모 로이스나 어머님 유니게처럼 마음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참으로 보배로운 믿음의 소유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믿음의 소유자가 참된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그의 이름의 뜻이 그에게 어울립니다. 그의 이름 “디모데”는 “하나님의 보배”란 뜻입니다(박윤선).

 

예수님의 참된 제자는 마음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습니다. “거짓이 없는 믿음”이란 영어로 “sincere faith”이라고(NIV)적혀 있습니다. 즉, 거짓이 없는 믿음이란 신실한 믿음, 위선이 없는 믿음, 가짜가 아닌 믿음을 의미합니다. 그 예로 우리는 로마서 418-21에 나와 있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1) 아브라함의 거짓이 없는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이었습니다(18).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아내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 속에서도(19절) 약 25년 전에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인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하신 말씀을 믿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인간의 의학적인 불가능한 상황을 초월한 바랄 수 없는 중에 아들을 바랬던 믿음이었습니다.

 

(2) 아브라함의 거짓이 없는 믿음은 불가능한 상황에서 연약해지지 않는 믿음이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3) 아브라함의 거짓이 없는 믿음은 불가능한 상황에서 오히려 믿음이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이었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4) 아브라함의 거짓이 없는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는 믿음이었습니다.

 

21절을 보십시오: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거짓이 없는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에 붙잡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로서 고린도후서 135말씀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여러분은 나이아가라 폭포를 아실 것입니다. 1860년 어느 날 미국의 유명한 곡예사 불론딘이 이 나이야가라 폭포 위에 밧줄을 매고 외줄타기를 시도하고 있었습니다. 1년 전인 1859년부터 나이야가라에서 외줄타기를 시도한 불론딘은 그해 8월에는 그의 메니저(manage)였던 Harry Colcord를 그의 등에 업고 외줄타기에 성공하였기에 많은 사람들이 블로딘의 줄타기를 보려고 몰려들었습니다. 무섭게 쏟아져 내리는 폭포수 위로 50m 정도의 높이에 300m 정도의 밧줄을 매어 놓고 밧줄타기를 시도하려는 그의 주위에, 신기에 가까운 그의 외줄타기를 보려고 몰려든 사람들이 “블론딘, 블론딘” 하면서 환호하였습니다. 그러자 블로딘은 그들을 향해 이렇게 물었습니다. “제가 이 폭포 위로 매어 놓은 줄을 타고 이편에서 저편으로 건너갈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그러자 군중들은 “물론이지요!”라고 하면서 불론딘의 말에 동의하였습니다. 그러자 불론딘은 “그렇다면 제가 제 등에 한 사람을 업고 이 밧줄을 탈 수 있다는 것도 믿으십니까?” 그러자 역시 군중들은 “물론입니다.”라고 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불론딘은 군중을 향하여 “그렇다면 여러분들 중에서 누가 제 등에 업히시겠습니까? 저를 믿으신다면 아무라도 좋으니 이리로 나오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무도 자원하여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군중들은 불론딘을 믿는다고 하였으나 그들이 믿는 믿음은 결국은 위선이었고 가짜였다는 것입니다”(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