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를 세우시는 주님의 방법과 세상의 방법

 

 

 

교회 지도자 성경공부 시간에 사도행전 4장 말씀 중심으로 성경을 가르치는 중에 하나님이 주신 귀한 깨달음이 있어 벅 차는 마음으로 이 글을 적어 내려갑니다. 그 깨달음이란 사도행전 4장에 나타난 주님의 교회(본문에선 초대교회)를 주님께서 어떻게 세우셨는지 그 패턴(pattern)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놀란 것은 그 패턴과 현 시대 우리 교회들이 세워짐의 패턴이 정반대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초대교회를 세우심에 있어서의 패턴을 한 다섯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주님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심(마16:18)에 있어서의 패턴에 다섯 가지를 생각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본문 사도행전 4장의 역사적 배경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었던 사도들과 교회에게는 박해자들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 박해자들은 내부적으로는 종교지도자들[제사장들, 성전 맡은 자들, 사두개인들 (1절), 관원, 장로, 서기관들(5절), 대제사장들 (6절)]이었고 외부적으로는 이방인들[열방, 족속들(25절), 세상의 군왕들, 관원들(26절)]이었습니다.

 

지금도 별 다들 바 없습니다. 교회를 대적하는 외부적인 박해자들이 있는가 하면 내부적으로 교회를 세움에 있어서 방해하며 힘들게 하는 대적자들이 있습니다. 성경 사도행전 4장에선 내부적인 대적자들인 종교 지도자들이 사도들이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전함을 싫어하”므로(2절) 사도들을 불러 세워서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7절)고 물었습니다. 그리할 때 사도 베드로가 “성령 충만”하였다고 사도행전 4장 8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심에 있어서 첫 번째 방법은 기도입니다.

 

성경 사도행전 4장 24-30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풀려 난 후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23-24절). 이 초대교회 성도들의 합심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한 2 가지로 도전을 받을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므로 기도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사도행전 424을 보십시오: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 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 이시오.” 환경을 바라보면 박해자로 말미암은 고통과 고난이 있지만 그러한 환경 가운데에서도 초대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므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이들의 믿음의 본을 본받아야 합니다.

 

(2)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사도행전 4장 25절과 26절을 보십시오: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이로소이다.” 이 말씀을 보면 사도행전 저자 누가는 시편 21-2 말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편 2장 1-2절의 예언의 말씀이 성취된 것을 우리는 사도행전 427-28에 볼 수 있습니다: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예수님을 박해했던 대적자들이 있었던 것처럼 사도들을 박해하던 대적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대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내부적으로나 외부적으로 대적자들이 현실에 삶 속에 있는 것을 부인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자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우리는 우리의 현실 삶 속에서 주님께서 그 약속의 말씀을 어떻게 성취하시는지 우리 믿음의 눈으로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바로 세워 가는데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심에 있어서 두 번째 방법은 성령 충만 입니다.

 

성경 사도행전 4장 8절과 31절을 다시 보십시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8절),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31절). 주님께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심에 있어서 성령 충만함을 허락하셔야만 교회는 세워질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교회를 세우시는 분은 주님이시고 주님으로부터 오는 성령 충만함으로 교회는 세워진다는 말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이란 사도행전 41-20에서 한 3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성령 충만한 삶은 담대한 삶입니다.

 

성령 충만한 자는 담대합니다. 베드로가 성령 충만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였더니 그와 다른 사도들을 박해하는 종교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courageously)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놀랬습니다(13절).

 

(2) 성령 충만한 삶은 사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자입니다.

 

성경 사도행전 419을 보십시오: “…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을 불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경고하는(18절)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5절)에게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19절).

 

(3)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자는 확신을 가지고 사는 자입니다.

 

성경 사도행전 420에 보십시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보고 들었기에 확신을 가지고 자신 있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교회가 바로 세워지기 위해선 우리 모두가 성령 충만함을 받아 담대하게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심에 있어서 세 번째 방법은 복음전파입니다.

 

성경 사도행전 48-12을 보십시오: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이르되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사도 베드로는 성령 충만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10절, 비교: 7, 12, 17, 18절)으로 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12절)고 그를 대적하는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담대히 선포하였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위협을 하였습니다(18절). 마치 복음성가 “예수 그 이름”에서 “사람들 그 이름 건축자의 버린 돌처럼 버렸”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사도들을 박해하던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 그 이름 속에 있는 비밀과 사랑을 모르기에 그 이름을 싫어하여 사도들로 하여금 그 이름을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17절)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 생각엔 사도 베드로와 요한에게 “예수 그 이름”은 “내 마음에 새겨진 이름은 아름다운 보석 내게 있는 귀한 비밀이라 내 마음에 숨겨진 기쁨 예수 오 그 이름 나는 말할 수 없네 그 이름의 비밀을 그 이름의 사랑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사도 베드로는 성전 문에서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3:6).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심에 있어서 네 번째 방법은 구원 받는 사람을 더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성경 사도행전 44을 보십시오: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믿은 남자들의 숫자가 5천명이란 사실은 예수께서 오병이어로 남자 5천 명을 먹이신 기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있습니다. 이 두 사건에 있어서 적어도 3 가지 유사점이 있습니다: (1) 5천명이 등장한다는 것(눅 9:14과 행 4:4), (2) 무리들이 모두 말씀을 들었다는 것(눅 9:11과 행 4:4), (3) 사건 전에 치유의 기적이 있었다는 것(눅 9:11과 행 3:1-10). 오병이어 사건을 사도들이 백성들에게 베풀어야 할 복음의 양식으로 제시한 저자가 사도들에게서 말씀의 양식을 먹고 구원받은 사람 5천 명을 기록하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히 아닙니다. 오병이어 사건에서 핵심은 생명의 떡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찢기시사’ 사람들에게 나뉘어 주신바 됨으로 주어진 영생(구원)입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 사도들의 복음전파를 통하여 남자의 수가 약 5천명이나 되었습니다(4절). 성경 사도행전 2장 47절을 보면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신지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처럼 오늘 본문 사도행전 4장을 보면 사도들의 가르침과 복음전파로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고 누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4절). 사람이 교인 숫자를 늘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구원받는 사람은 오직 주님께서만 더하신다는 교훈입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심에 있어서 마지막 방법은 공동체를 이루신다는 사실입니다.

 

성경 사도행전 432-35을 보십시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사도행전 저자 누가는 초대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32절).

 

한 마디로,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는 방법은 top – bottom(위에서 밑으로)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주님께서 시작(initiate)하시므로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세우려고 하는 세상의 방법은 정반대라 생각합니다. 즉, 우리 크리스천들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려고 하는 방법은 bottom – top(밑에서 위로)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첫 번째 방법은 공동체 입니다. 주님의 방법의 우선순위에서의 첫 번째는 기도이지만 세상 방법은 교회란 공동체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한 마음과 한 뜻이 되고자 노력한다고 하지만 요즘 너무나 많은 교회들이 여러 마음과 여러 뜻을 가지고 교회를 세워 나아가려고 하는 모습을 봅니다. 결코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기도이지만 이 기도조차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하기보다 우리의 주권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자세로 상황과 느낌과 우리 생각에 치우쳐 부르짖을 때가 많습니다. 세상적인 세 번째 방법은 교회 숫자 증가입니다. 복음을 듣고 구원 받는 사람들이 더해진 것이 아니라 “양 도둑”이란 책에서 말 하고 있는 것처럼 수평이동이요 양 도둑질로 말미암아 교인 수가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듣고 나오는 사람들이 아니라 교인들의 이름을 봐서 나오는 사람들 이 많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네 번째 방법에 가서야 성령 충만 함을 구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제일 첫 번째가 돼야 함에도 불구하고 세상 방법에선 제일 마지막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령 충만함도 과연 성경적인지 감정적인지 신비스러울 정도라 생각합니다.

 

오늘의 교회를 바라보시면서 주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실지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도행전 4장 말씀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 교회를 주님께서 세우신다고 약속하셨으니(마 16:18) 주님의 방법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