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빌립보서 410-23]

 

 

금년 우리 교회 표어는 “주는 교회”입니다. 주되 우리는 “사랑”과 “위로”와 “기쁨”을 주는 교회가 되는 게 금년 우리 교회의 목표입니다. 이 세 가지 중 오늘 “기쁨”에 대해서 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빌립보서를 계속해서 묵상해오면서 빌립보서 4장 4절에서 이러한 말씀을 묵상했었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어떻게 하면 우리가 주님을 기뻐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느헤미야 8장 중심으로 이미 한 3가지로 묵상을 했었습니다: (1) 우리는 슬퍼하지 말며 울지 않아야 합니다(9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통하여 죄의 자각이 있으므로 울었습니다. 그 때 느헤미야와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성일이니 슬퍼하며 울지 말라고 권면했습니다. (2) 우리는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10-11절). 이스라엘 백성 들이 근심하였던 이유는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무엇이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지 잘 모르면서 오랫동안 주님을 올바르게 섬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12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느헤미야와 에스라, 그리고 그들에게 모세 율법을 깨닫게 했던 레위 사람을 권면을 듣고 슬픔과 눈물과 근심을 그치고 크게 즐거워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알았기 때문입니다(12절). 모세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게 되며 그 모세 율법이 가리키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이 진리를 밝히 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슬픔과 눈물과 근심을 중단하고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알고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키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을 믿음으로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마음에 모든 슬픔과 근심을 주님께서 없애주시는 평강의 축복을 누립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10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이 나에 대하여 다시 관심을 갖게 되어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합니다. 여러분이 물질로 나를 돕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습니다”]. 오늘 저는 이 말씀 중심으로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이란 제목 아래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10절에서 마지막절인 23절일까지 묵상하면서 과연 우리가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 3가지로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기 위해선 우리는 서로 관심을 갖고 서로를 도와야 합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10절을 보십시오: “여러분이 나에 대하여 다시 관심을 갖게 되어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합니다. 여러분이 물질로 나를 돕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습니다”(현대인의 성경). 당신은 요즘 무엇에 관심이 많으십니까? 아마 우리 모두 각자의 관심사가 다를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공통된 관심사 또한 있을 것입니다. 그 공통된 관심사 중 하나는 바로 가족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 모두가 우리 가족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들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관심이 많을 것이고, 자녀들은 자녀들 나름대로 사랑하는 부모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겠지만 더불어 그들은 그들이 또한 사랑하는 친구들에게 관심을 많이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자녀들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손자들에게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특히 관심을 갖고 기도하는 자녀나 손자는 아마도 영육 간에 건강한 자녀나 손자보다 연약한 자녀나 손자에게 더 관심을 가지게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가족은 관심과 사랑으로 하나가 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영적 가족인 교회란 공동체도 관심과 사랑으로 하나가 됩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도 서로가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기에 서로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마땅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의 관심으로 서로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특히 우리는 우리 교회 식구들 가운데 질병이나 사고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형제나 자매가 있으면 더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 가운데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위해서도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그 형제, 자매의 믿음이 성장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힘써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고 선교지에서 수고하시는 선교사님들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속해서 물심양면으로 후원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 안에서 선교사님들을 크게 기뻐하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물 빌립보서 4장 10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내려가면서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바울은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바울은 그가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 형제, 자매들이 자기에 대하여 다시 관심을 갖게 된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관심을 갖되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자기를 물질로 돕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10절, 현대인의 성경). 이 얼마나 바울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었겠습니까. 특히 바울에게 큰 힘과 위로는 그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었을 때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도움을 받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14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나를 도와 준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습니다.” 당신이 제일 힘들고 어려울 때 당신에게 다가와서 지극히 작은 선행을 한 사람을 여러분은 잊을 수 있습니까? 저는 아직도 잊지 못하는 것은 저희 첫째 아기가 중환자실에 누워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을 때 저희 부부도 마음이 많이 힘들고 어려웠지만 그 때 하루는 신학교 선배 목사님이 찾아오셔서 조그마한 인형을 아기 침대 옆에 놓고 가신 것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비록 짧은 방문이었지만 그 분이 별 말씀 없이 그 작은 인형 선물을 미리 준비하셔서 저희 아기 옆에 놓으신 그 작은 선행이 제 마음에는 큰 추억으로 이렇게 아직까지 남아 있습니다. 아마 아기가 건강하게 자라나서 돌 예배 때 그 인형 선물을 받았다면 이렇게 제 마음에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무리 큰 인형이나 아기 선물을 받았다한들 아기가 건강한 상태에서 받은 사랑의 선물들을 잘 기억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기와 더불어 저희 부부가 제일 힘들고 어려웠을 때 받은 그 작은 인형은 우리 마음에 큰 사랑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을 생각할 때 저는 그가 어려움을 당하여 괴로움 가운데 있었을 때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도움을 받았던 그 일을 잊지 못하고 이렇게 빌립보서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금 그들에게 언급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바울은 오늘 본문 15-16절에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로 말하였습니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현대인의 성경) “빌립보 사람 여러분, 여러분도 잘 알고 있겠지만 내가 기쁜 소식을 전하던 초기에 마케도니아를 떠날 때 서로 도움을 주고받은 교회는 여러분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내가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여러분은 한두 차례 나에게 필요한 것을 보내 주었습니다.”]. 이 편지 내용을 보면 사도 바울과 빌립보 교회 성도들과의 관계가 하루 이틀 사이가 아니라 오랫동안 지속된 관계임을 좀 알 수가 있습니다. 15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초기에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서로 도움을 주고받은 교회가 빌립보 교회 밖에 없었다는 것을 보면 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관계인가 생각됩니다. 그 때뿐만 아니라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었을 때에도 빌립보 교회는 바울에게 두 번이나 그의 쓸 것을 보내주었던 것을 보면 빌립보 교회는 지속적으로 바울의 복음 사역을 도왔던 것을 우리는 좀 알 수가 있습니다(16절).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받아 넉넉합니다. 여러분이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낸 것을 받아서 풍족하게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낸 선물은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향기로운 제물입니다”라고 말하였음(18절,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며 항상 간구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뻐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첫날부터” 바울이 지금 이 빌립보서 편지를 옥중에서 쓰고 있는 그 순간까지도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1:3-5).

 

저는 이러한 신실한 사랑과 관심의 관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저는 이러한 관계를 우리 교회가 물심양면으로 후원하는 선교사님들과 지속적으로 맺기를 원합니다. 물론 우리 교회가 모든 선교사님들에게 다 그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떤 선교사님들은 우리가 한두 번, 그 분들이 선교 사역에 힘들고 어려울 때 또한 절실히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선교비를 드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주님께서 저희 교회에서 세우시사 선교지로 보내신 선교사님들은 우리 교회가 지속적으로 꾸준히 신실하게 돕기를 원합니다. 돕되 우리가 중요시해야 할 것은 관심입니다. 비록 많이 부족하지만 우리가 선교사님들의 선교 사역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 분들이 지금 어떻게 복음 사역을 감당하고 계신지 알아가므로 점진적으로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마음을 실어서 그 분들과 그분들의 복음 사역을 위해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1년에 한번 하던 선교 나눔의 시간을 금년에는 1월 둘째 주일 뿐만 아니라 6월에도 한 번 더 가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우리가 선교사님들의 선교 사역을 알아가므로 조금 더 관심과 사랑의 마음을 실어서 기도할 수 있길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선교사님들이 우리 교회 카카오톡 방에 사진도 올려주시고 짧은 글도 남겨주시고 하면 우리는 그 글과 사진들을 통해서 그분들의 선교사역에 좀 더 관심을 갖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과테말라 서진국 선교사님 부부 같은 경우는 선교 보고 및 기도 제목들을 이 메일로 정기적으로 보내주셔서 제가 게시판에 붙여 놓으니까 여러분들이 관심을 가지시고 한번 읽어보시고 마음속으로라도 기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한 영어가 되시는 분들은 그 게시판에 영어사역에서 오랫동안 후원하고 있는 애리조나 주립 대학에서 캠퍼스 전도 사역을 하고 있는 Jon and Jan Wagnor 부부의 매달 선교보고 편지를 관심을 가져주셔서 읽으시고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리할 때 선교사님들은 우리의 사랑의 관심과 지속적인 도움으로 말미암아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들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기 위해선 우리는 관심을 갖고 서로 도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 사역에 힘써 수고하시는 후원하는 선교사님들과 그분들의 가정에 관심을 갖고 지속적으로 기도하면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하여 주님의 일에 신실하게 수고하시는 하나님의 일꾼들에게 관심을 갖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요 또한 우리를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게 하는 일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기 위해선 우리는 자족의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11-12절을 보십시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제가 개인적으로 중요시 여기는 것 중 하나는 바로 배우려는 자세입니다. 특히 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하는 사람들에게 중요하는 것은 가르치려는 자세보다 배우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을 좀 더 성경적으로 말한다면, 저 같이 말씀을 가르치는 자는 성도님들을 가르치기를 좋아하기보다 먼저 우리 자신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성경 로마서 2장 21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 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현대인의 성경) “그런 여러분이 남은 가르치면서도 왜 여러분 자신은 가르치지 못합니까? 도둑질하지 말라고 하는 여러분이 도둑질하고”].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지런히 가르치지 않으면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성도님들에게 도둑질하지 마세요 하면서 우리는 도둑질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치기 위해서라도 먼저 우리가 부지런히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부지런히 배워야 할 하나님의 말씀 중에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11-12절에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말한 ‘자족의 비결’(the secret of being content)입니다(“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미국의 작가 게일 쉐휘(Gail Sheehy)는 그의 베스트셀러인 “통로를 찾는 사람들”(Path Finders) 이란 책에서 참 만족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고 말했습니다(인터넷): (1) 자기가 사는 의미와 가야할 방향을 알고 있는 사람; (2) 자기의 인생을 허무하게 살아왔다고 실망하지 않는 사람; (3) 자기 나름대로의 확실한 장기적 계획을 가지고 그것을 조금씩 성취해 가고 있는 사람; (4) 진심으로 사랑하는 대상이 있는 사람; (5) 깊은 속까지 털어 놓을 만한 좋은 친구가 있는 사람; (6) 명랑하고 어려운 일을 당해도 궁극적으로 해석하며 처리하는 사람; (7) 남의 비평이나 욕까지도 너무 신경 쓰지 않고 너그럽게 들을 수 있는 사람; (8) 두려움이나 근심을 뚫고 갈 정신적 힘을 가진 사람. 당신은 참 만족을 갖고 살고 계십니까? 어쩌면 지금 우리 현대인들은 만족 결필중을 앓고 있는 줄도 모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가져도 만족도 그 순간뿐인 듯 우리는 또 다른 것을 원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왠지 우리 사람들의 만족의 한계는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가장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다”(인터넷). 어떻습니까? 과연 우리는 가장 적은 것으로도 만족하고 있습니까? 당신도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도 바울처럼 자족의 비결을 꼭 배우고 싶지 않으십니까? 당신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즉 풍부할 때에든지 궁핍할 때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길 원하지 않으십니까?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풍부할 때에도 욕심을 내지 않고 자족하면서 은혜로 주신 풍부함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할 수 있으며 또한 궁핍할 때에도 원망하지 않고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주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13절).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입니다(13절). 주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야 우리는 풍부할 때에든지 궁핍할 때에든지 오직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면서 자족하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주님이 누구이시기에 우리가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하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인가요? 저는 시편 23편 시편 기자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1절)라는 고백 말씀 중심으로 우리가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주님이 누구이신지 한 6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시편 23편 2절을 보십시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진정한 목자는 양들이 필요한 먹을 풀과 마실 물을 공급해 줍니다. 목자가 양들을 “푸른 초장”에 누이는 이유는 푸른 초장에 양들이 먹기 좋아하는 연한 풀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선한 목자는 양에게 꼴을 먹여 줍니다. 또한 선한 목자는 가기 양을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 줍니다. 여기서 “쉴만한 물”란 칼빈에 의하며 “천천히 흐르는 물이니 양들이 마시기에 편하고, 또 그 건강에도 유익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그의 양들인 우리들에게 육신의 양식만 아니라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여주십니다. 먹여 주시되 주님께서는 우리를 풍성하게 먹여 주십니다. 그는 “여호와 이레”(The Lord Will Provide), 즉 공급해 주시는 주님이십니다(창22:14).

 

(2)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주님은 우리를 소생시켜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시편 23편 3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 여기서 “’영혼을 소생시키심’은, 범죄하였던 영혼을 회개케 하여 진정한 생명을 받게 하심을 의미합니다(박윤선). 우리는 죄를 범한 후 회개하지 않고 있을 때에 우리 영혼이 짓눌림을 받습니다. 다윗이 그랬었습니다: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시32:3-4).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영혼은 항상 부족함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영혼의 짓눌림을 당할 뿐만 아니라 죄에 매여 있어 영혼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회개치 않은 마음은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영혼은 죄 때문에만 죽는 법이니, 다시 살기는 죄를 회개함으로만 되어진다.” 맞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회개하므로 우리의 짓눌렸던 영혼이 다시 소생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그의 거룩하신 말씀으로 들춰내어 주셔야 우리는 죄를 죄로 여길 수 있을 것이며 또한 그 죄를 인정하는 가운데 성령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를 진정으로 회개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오직 목자 되신 주님만이 그의 양들인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3)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주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시편 23편 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여기서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는 말씀은 곧은 길, 즉 평탄한 길로 목자 되신 주님께서 인도하심을 의미합니다(박윤선).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죄악된 세상의 사람들은 의의 길을 택하기보다 악의 길을 택하여 그 악한 길로 걸어가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의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주님의 인도하심이 없이는 불가능 합니다. 성경 베드로후서 2장 8절 말씀에 나오는 의로운 롯처럼 우리는 악의 길을 걷는 사람들 중에 거하여 날마다 그들의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우리의 의로운 심령이 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상한 의로운 심령을 목자 되신 주님께서 말씀으로 소성케 해주셔야 만이 우리는 일어나 의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목자 되신 주님은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심에 있어서 “인간 편의 어떤 좋은 조건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이름’ 때문”입니다(박윤선). 우리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죄를 도말하시는 하나님이실 뿐만 아니라 그는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주님이시요 또한 자기 이름을 위하여 우리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주님이십니다.

 

(4)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주님은 우리를 보호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시편 23편 4절을 보십시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여기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위험의 극단을 가리킵니다(박윤선). 다윗은 주님을 목자로 삼았기에 어떠한 위험에서도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는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요셉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 그러므로 형통의 복을 누렸던 요셉은 보디발 집에서 종노릇할 때에든지 아니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도 그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았습니다. 목자 되신 주님께서는 다윗과 함께 하시되 다윗을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로 보호하셨습니다. 마치 목자가 지팡이와 막대기로 양들을 맹수에게서 보호하며 양들을 푸른 초장과 쉴만할 물가로 인도하는 것처럼 목자 되신 주님께서도 그의 백성들인 우리를 맹수 같은 사탄과 그의 종들로부터 보호해 주시며 우리를 인도해 주고 계십니다.

 

(5)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주님은 우리를 높여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시편 23편 5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차려주시는 주님이십니다. 목자 되신 주님은 다윗을 위하여 다윗을 멸망시키려는 원수들 앞에서 연회를 베풀듯이 기쁜 승리를 주신 것입니다(박윤선). 또한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말씀은 “연회에서 귀빈에게 기름 붓는 풍속을 염두해 두고 한 말”입니다(박윤선). 하나님께서는 원수 앞에 핍박 받는 다윗을 연회에 청함 받은 귀빈처럼 대우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받은 대접과 분깃은 풍성하고 넘쳤던 것입니다(박윤선).

 

(6)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과 소망을 가득 채워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시편 23편 6절을 보십시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다윗은 이 구절에서 과거의 은혜 받은 체험으로써 그 앞날을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과거에 하나님의 사랑과 도우심을 받았습니다(1-5절). 그리고 다윗은 그의 앞날이 영원토록 평탄할 줄을 믿었습니다. 그 이유는 다윗은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항상 자기와 함께 할 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여호와의 집, 곧 하나님의 나라에 영원히 거하는 확실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소망으로 가득 찬 삶은 부족함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기 위해선 자족의 비결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풍부할 때에든지 궁핍할 때에든지 우리에게 능력주시는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를 인도해주시고 보호해 주시며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시는 주님,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주시고 또한 우리를 높여주시는 주님, 우리에게 사랑과 소망을 가득 채워 주시는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기원합니다.

 

셋째로, 우리가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기 위해선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20절을 보십시오: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우리 삶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삶에 목적이 분명할 때 우리는 그 목적에 이끌려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삶의 목적(Purpose)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성경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 1문은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인가?” 그 답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간략하게 한 3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우리는 감사로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성경 시편 50편 23절을 보십시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총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 감사로 찬양과 경배를 올려드려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입니다.

 

(2)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선 우리는 거룩하신 예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성경 고린도전서 11장 1절을 보십시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현대인의 성경)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으십시오”]. 바울은 예수님을 본받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자리를 본받으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이 권면의 말씀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아 그 분을 닮아갈 때에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성경 마태복음 5장 4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를 본받아 온전해 질 때에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3)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선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 히브리서 11장 6절을 보십시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예를 들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나이가 100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자기 부인인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않았습니다(롬4:19). 또한 그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현대인의 성경) “네 후손도 저 별들처럼 많을 것이다”]는 하나님의 약속(18절)을 의심하지 않고(20절)는 바랄 수 없는 중에(도저히 불가능한 것을) 바라고 믿었습니다(18절).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약속하신 그것을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여(21절)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20절).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십시다. 우리 육신의 눈으로 바라볼 때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 같아 보일지라도 믿음의 눈으로 전능하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의심하지 말고 반드시 이루어주실 줄 믿으십니다. 믿음에 견고히 서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우리가 되길 기원합니다.

 

말씀 묵상을 맺고자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기 위해선 우리는 서로 관심을 갖고 서로를 도와야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자족의 비결을 배워 어떠한 상황에서도, 궁핍할 때나 풍부할 때나, 주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함을 더욱더 충만히 누리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이웃 사랑의 기쁨을 맛보며, 자족의 비결을 배우며,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살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