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고 행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48-9]

 

 

당신은 하나님께 감사하고 계십니까? 지난 2016년 한해를 뒤돌아보실 때에, 여러분은 무엇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계십니까? 저는 어제 새벽에 이러한 글을 적어 보았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그 힘든 상황을 바라볼 때에는 감사할 수 없겠지만, 주님을 믿는 믿음의 눈으로 바라볼 때에는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감사의 조건을 찾을 수가 있습니다.” 혹시 지금 당신은 인간의 눈으로 바라볼 때에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지는 않으십니까? 그러한 힘든 상황에서도 당신은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이 시간에 감사할 조건을 찾아보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지난 주 금요일, 진경 자매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받고 부랴부랴 안 전도사님이 입원해 계신 병원 중환자실에 갔었습니다. 안 권사님과 진경 자매와 함께 전도사님을 쳐다보면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다가 좀 나중에 합류한 두 형제, 자매와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 후 전도사님이 투석을 하시기에 병실에서 나와 기다리는 방에서 앉아 대화를 하였습니다. 그 대화 중 우리가 함께 하나님께 감사하였던 것은 비록 전도사님의 몸이 너무 약해지셔서 고통 가운데 계실 텐데도 불구하고 의식이 있으셔서 눈을 뜨시고 우리를 쳐다보시며 우리가 말할 때 고개를 끄덕여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산소 호흡기를 끼고 계셔서 전도사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셔도 우리가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눈을 뜨시고 우리를 보실 수 있으시고 우리의 말을 알아들으심에 감사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이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로 찬양과 경배를 드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총을 생각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범사에 또한 평생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의 전에 올라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할 조건들을 생각하길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다 함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가 되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8-9절을 보면 옥중에 있는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모하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내려가면서 두 가지로 권면을 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저는 그 두 가지 권면의 말씀을 각 절에 나와 있는 부분적인 말씀으로 요약해 보았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8절 하반절을 보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으로 9절 상반절을 보면 바울은 “너희는 내게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두 말씀 중심으로 과연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무엇을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들에게 무엇을 행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인지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무엇을 생각하라고 권면하였습니까?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8절을 보십시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여러분, 요즘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많이 하고 계십니까? 가정에 대한 생각이 많으십니까? 아니면 직장이나 회사에 대한 생각이 많으십니까? 건강에 대한 생각도 많을 수 있고 또한 미래에 대한 생각들도 많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좀 생각해 봐야 합니다. 그 이유는 지금 우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생각해 보면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신의 영적 상태가 어떠한지를 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지금 우리가 이런 저런 일들로 걱정하며 염려하는 생각을 하고 있든지, 또는 미래에 대한 불안한 생각들을 하고 있든지 하면 지금 우리의 영적 상태는 연약함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참고: 시77:7-10). 또는 지금 우리가 우리의 생각의 영역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생각을 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악한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오랫동안 계속해서 품고 있다면 지금 우리의 영적 상태는 죄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악한 생각이란 마음에서 나오는 것으로서(마15:19) 육신의 일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롬8:5). 그리고 그 육신의 일들이란 갈라디아서 5장 19-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 만일 지금 우리가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네가 악한 생각을 언제까지 품고 있겠느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렘4:14, 현대인의 성경).

 

오늘 본문 빌립보서에 나오는 바울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아십니까? 빌립보서 1장 3-4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는 그들을 예수님의 심장(마음)으로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8절). 그리고 바울은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3절). 그 이유는 그들은 바울의 복음 전도 사역에 동참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5절). 그들은 바울의 복음 전도 사역에 에바브로디도를 보내므로 협력하였을 뿐만 아니라(2:25-30) 또한 바울을 물질적인 후원을 하므로 협력하였습니다(4:15-16). 또한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께 감사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착한 일”(구원의 일)을 시작하셨고 그 구원의 일을 반드시 완성하실 줄 확신하였기 때문입니다(1:6). 여러분, 우리도 바울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어떻습니까.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더욱더 자주 그리워하고 많이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질문은 과연 우리가 바울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더욱더 자주, 많이 생각할 때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니면 지금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할 때 감사보다 불평 원망스러운 생각이 더 많습니까?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8절을 보면 바울은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끝으로 형제들아”라고 말하면서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이것들”은 무엇입니까? 저는 한 3 가지로 요약해 보았습니다:

 

(1)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무엇이든지 참되며 옳은 것(whatever is true and right)을 생각을 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4:8).

 

왜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무엇이든지 참되며 옳은 것을 생각하라고 말하였을까요? 여기서 바울이 말한 참되며 옳은 것은 무엇일까요? 박윤선 박사님에 의하면 “참됨”은 선한 양심의 진실성과 그 열매들을 가리키고 “옮음”은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함을 가리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박윤선). 이 의미를 생각할 때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선한 양심을 가지고 진실한 삶을 살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말씀과 일치하는 삶을 살라고 권면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저는 이것이 바로 바울이 빌립보서 1장 27절에서 말한 ‘복음의 합당한 삶’이라 생각합니다. 한 마디로,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의 합당한 삶을 살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선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참된 복음을 생각하며 또한 그 참된 복음을 올바르게 전하는 것을 생각하라고 권면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빌립보서 1장부터 보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었지만(1:5) 교인들 중에 옳지 않은 동기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순수하지 못한 동기(17절)로 복음을 전하고 있었던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 그들 또한 다른 성도들처럼 올바른 동기인 “착한 뜻”(15절)과 “사랑으로”(16절) 복음을 전하길 원했기에 그리 권면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만일 이것이 맞는다면 우리 또한 바울의 권면을 새겨들어 우리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을 생각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복음을 올바르게 전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특히 바울 시대 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것은 참된 복음뿐만 아니라 거짓된 복음도 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참된 복음이라 할지라도 올바르지 않게 전하는 사람들 또한 많기 때문에 우리는 참된 복음을 올바르게 전하는 것을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2)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무엇이든지 경건하며 정결한 것(whatever is noble and pure)을 생각을 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4:8).

 

여기서 저는 “경건하며”란 단어와 “정결한 것”이란 단어를 생각할 때 성경 구절 두 개가 생각납니다:

 

(a) 사도행전 1711: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이 말씀을 보면 성경은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베뢰아 사람들이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고상한 심령을 가지고 있었다는 뜻입니다(박윤선). 여기서 ‘고상한 심령’이란 열심을 다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박윤선). 그러므로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적이였다는 말씀은 그들은 열심을 다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사람들이였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신사적인 사람들은 첫째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습니다(11절). 여기서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말씀은 “모든 열심으로”(박윤선) 혹은 “모든 자원함으로”(유상섭)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였을 때 베뢰아 사람들은 전적으로 자원하는 의지를 가지고 복음의 말씀을 수용했습니다(유상섭). 다시 말하면, 베뢰아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영접하였습니다(참고: 8:14, 11:1)(유상섭).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의 뿌리가 시냇가에 흐르는 물을 빨아들이듯이 신사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수용력이 있습니다. 마치 스펀지를 꽉 누른 후 물통에 넣으면 물을 빨아들이듯이 신사적인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여 그 말씀을 열심히 읽고 배우고 마음에 심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의 수용력이 우리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마치 스펀지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들을 때마다 그 말씀이 쏙쏙 귀에 그리고 마음에 잘 들어오길 원합니다. 또 한 가지, 신사적인 사람들의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받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이 과연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부합(일치)하는지 날마다 성경을 통해서 직접 자신들이 확인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베뢰아 사람들은 무턱대로 성경을 덮어놓고 그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성경을 통해서 바울의 설교를 날마다 확인하였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쉽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말씀의 수용력과 더불어 균형 있게 그 말씀을 잘 확인해서 듣기는 쉽지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말씀의 수용력만 있다면 목사님들의 설교에 틀린 부분들도 있을 수 있는데 그 틀린 부분들까지도 다 무조건 받아들일 수 있는 위험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의 수용력과 더불어 그 말씀을 확인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금상천화라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과 더불어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8절을 생각할 때 과연 성경이 우리에게 무엇이든지 경건한 것을 생각하라고 말씀한 것을 우리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열심을 다하여 성경을 상고하되 주님의 종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말씀이 과연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지 성경을 통해서 직접 확인하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b) “장결한 것이란 단어를 생각할 때 저는 야고보서 127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두 가지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것이며, 둘째로는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 삶 속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무엇이든지 경건한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어렵고 힘든 상황에 처해있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말아야 함. 이 일에 우리는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교회적으로 힘써야 합니다. 그 이유는 지금 너무나 교회가 세속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속화되지 말고 더욱더 성경인격화가 되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흘리신 보배로운 피로 모든 죄에서 이미 정결함을 받았다는 사실을 더욱더 견고히 믿어야 합니다. 새찬송가 264장 “정결하게 하는 샘이”라는 찬송가 가사 1절과 후렴이 생각납니다: (1절) “정결하게 하는 샘이 나의 앞에 있도다 성령께서 권고하심 죄 씻으라 하시네” (후렴) “찬양하리 찬양하리 죽임 당한 어린 양 주께 영광 돌리어라 우리 죄를 씻어 주셨네.”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미 모든 죄에서 정결함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음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는 지금 현재 정결한 삶을 살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정결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순종하므로 우리의 영혼을 깨끗케 해야 합니다(벧전1:22). 우리는 거룩한 성도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할 확실한 소망은 주님 이 세상에 다시 오시는 날 우리가 홀연히 변화되어 영광스러운 거룩한 영적인 몸을 입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 고린도전서 15장 51-52절을 보십시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성경 빌립보서 3장 20-21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3)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무엇이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찬사)(whatever is admirable, excellent, praiseworthy)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4:8).

 

여기서 ‘무엇이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란 말의 헬라어 의미는 “pleasing”(즐거운, 만족스러운) 혹은 “amiable”(쾌활한, 정감있는)입니다(MacArthur). 이 단어에 함축된 의미는 우리 신자들은 친절하던지 은혜스로워야 한다(kind or gracious)는 것입니다(MacArthur). 또한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와 “무슨 기림이 있든지”란 말씀은 비슷한 말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칭찬 받을 만한 행위를 하여 칭찬 받는 성도들이 되야 한다고 권면하였습니다. 저는 이 권면을 우리 교회에 적용해 볼 때 우리 교회는 칭찬 받는 교회가 돼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도덕적인 선한 일을 친절하게 행해야 합니다(박윤선, MacArthur). 이렇게 우리 교회가 이웃에게 칭찬 받을 만한 행위를 덕스럽게 잘 감당할 때 우리 교회는 칭찬 받는 교회가 될 수가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 사도행전 2장 47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리고 주님께서도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많아지게 하셨다”(현대인의 성경). 이 말씀은 초대교회를 가리킵니다. 다시 말하면, 초대 교회는 모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가 되기 위해선 우리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는 칭찬 받는 그리스도인이 돼야 합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사도행전 16장 2절에 나오는 바울의 영적 아들인 디모데 입니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예수님의 제자였던 디모데가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기독 신자들)에게 칭찬(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는 거짓이 없는 신실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딤전1:5). 더 나아가서 그는 참된 제자도를 그의 삶을 통해서 보여준 예수님의 제자였기에 주위 형제들에게 칭찬을 받았다고 생각됩니다. 만일 우리 모두가 디모데처럼 거짓이 없는 신실한 믿음으로 예수님의 참된 제자도를 우리 삶을 통해서 보여줄 수 있다면 우리 교회는 칭찬 받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인 칭찬 받는 교회는 안디옥 교회처럼 ‘그리스도인의 교회‘입니다(행11:26). 바나바는 사울(바울)과 함께 안디옥 교회에서 1년간 모여 있는 큰 무리들을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제자 훈련을 철저히 시켰을 때 (26절, 유상섭) 그 결과 안디옥 교회 제자들은 질적으로 놀라운 성숙에 도달하므로 말미암아 처음으로 비기독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의미는 “그리스도의 추종자”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제자 훈련을 잘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잘 좇았으면 주위 비기독교인들이 볼 때에 ‘저 사람은 그리스도의 추종자다’라고 칭함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 승리장로교회가 안디옥 교회처럼 “그리스도인의 교회”가 되길 기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 예수님을 닮아 예수님을 자랑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길 원합니다. 리처드 포스터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아마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병폐는 교인이지만 그리스도의 제자는 되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것은 교회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치며, 지역 교회 회중들의 낮은 영적 수준의 이유가 된다.” 우리는 결코 낮은 영적 수준을 가지고 있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오히려 고린도전서11장1절에서 바울이 말씀하였던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돼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교회는 칭찬 받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둘째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무엇을 행하라고 권면하였습니까? 바로 자기에게 배우고 받고 본 바를 행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9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여러분,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사도 바울에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가 무엇일까요? 박윤석 박사님에 의하며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8절에서 여러 덕행들을 생각하고 그 덕행들을 귀하게 여기고 평가하라고 권면한 후 이렇게 오늘 본문 9절에 와서는 그 모든 덕행들을 자기에게서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그들에게 권면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질문을 던질 때에 사도행전 16장 12절부터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 이유는 그 말씀을 보면 바울이 제 2차 전도 여행 때 갔었던 빌립보에서의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 중심으로 우리가 묵상하고 있는 빌립보서 4징 9절까지와 함께 과연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가 무엇이었을까를 한 9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1)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는 바울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성경 사도행전 16장 13절을 보면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인 실라와 디모데가 빌립보에 도착해서 안식일에 기도할 곳이 있을까 하여 문 밖 강가에 나아갔습니다. 그 때 그들은 거기 모여 있는 여자들 중에 루디아를 만나 결국에는 주님께서 그녀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케 하셨습니다(14절). 그리고 결국에 가서는 그녀의 온 집안 식구들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15절). 루디아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16장을 계속해서 보면 바울과 실라가 감옥에 갇혔을 때 그 감옥을 지키던 간수가 나오는데 그 간수 또한 바울이 감옥에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던지 소리는 분명히 들었을 것입니다(25절). 그 또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고 그의 모든 가정도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게 됩니다(33절). 물론 이 이야기는 빌립보 교회가 생기기 전의 이야기이지만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나중에 빌립보 교회가 개척되었을 때에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이 전에 하던 대로 기도하였을 것이기에 그들은 바울을 통하여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옥중에 있는 바울로부터 빌립보서 편지를 받았을 때에 바울이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1:4, 9). 또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권면하였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4:6). 이 권면을 보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는 바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부인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2)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이미 사도행전 16장 말씀을 통하여 묵상한 것처럼 빌립보에 살던 루디아와 간수와 그들의 온 가족 식구들은 바울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빌립보 교회에 성도들은 빌립보서 1장 5절을 보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처음 그리스도를 믿을 때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복음을 전하는 데 협력하였음).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감옥에 갇혔었을 때에도 복음을 변호하고 증거하였습니다(7절). 그래서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 증거를 계속해서 행하되 겁 없이 더욱 담대히 행할 뿐 아니라(14절) 또한 착한 뜻(15절)과 순수한 동기(17절)로 행하라고 권면했습니다.

 

(3)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는 기뻐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 기뻐하는 모습을 한 5개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a) 첫 번째는, 빌립보서 118절입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었으면서도 불구하고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알고 그는 기뻐하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러한 기쁨 속에 있던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형제 여러분,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3:1, 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에게 자기처럼 복음 전파에 진전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기뻐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b) 두 번째는, 빌립보서 217-18절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 생명의 피를 제사 술처럼 따라 붓는다고 해도 나는 기뻐하고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현대인의 성경).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자기가 순교한다 할지라도 기뻐하겠다고 말한 것처럼 빌립보 교회 성도들도 자기와 함께 기뻐하자고 권면하였습니다.

 

(c) 세 번째는, 빌립보서 229절입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에바브로디도를 주님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30절). 우리 또한 그와 같은 자를 모든 기쁨으로 영접하고 존경해야 합니다(29절, 현대인의 성경).

 

(d) 네 번째는, 빌립보서 41절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은 “나의 기쁨”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바울에게서 배우고 듣고 본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바울처럼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 자매를 자기들의 기쁨으로 삼고 살라는 것이 바울의 권면이라 생각합니다.

 

(e) 다섯 번째는, 빌립보서 410절입니다: “여러분이 나에 대하여 다시 관심을 갖게 되어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합니다. 여러분이 물질로 나를 돕겠다는 생각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습니다”(현대인의 성경).

 

바울이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였던 이유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관심을 가지고 물질로 바울의 복음 전파 사역에 돕겠다는 생각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러한 바울의 기뻐하는 모습을 듣고 그들 또한 함께 기뻐하고 기뻐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4)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는 바울이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고난당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성경 빌립보서 1장 28-30절을 보십시오: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쓴 이 편지 내용 부분을 보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바울 안에서 보고 들었던 것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 또한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그리 행하되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받는 고난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5)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는 바울의 겸손한 모습이었습니다.

 

성경 빌립보서 2장 5절을 보십시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바울은 겸손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에베소 교회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사도행전 20장 19절을 보면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보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청하여 그들에게 한 고별 설교 내용을 보면 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그 교회 성도들을 겸손히 섬겼다고 말한 것을 보면 그는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교회를 섬겼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도 자기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빌립보 교회를 섬기길 원하여 그들에게 자기에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6)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는 푯대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모습이었습니다.

 

성경 빌립보서 3장 13-14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 내려가면서 자기는 “한 가지 일만은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13절, 현대인의 성경). 한 가지 일만이란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것이었습니다(13-14절). 바울이 분명히 하고 있었던 한 가지 일이란 바로 푯대 또는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달리기 선수가 경주할 때에 골라인(goal line)을 바라보면서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달려가는 것처럼 바울은 푯대(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달려가고 있었던 그 푯대(목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12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14절)이었습니다. 그 목표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인 바울의 사명입니다. 그 사명이란 외부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행20:24)이였고 내부적으로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므로 복음의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빌1:27). 바울은 이 사명에 붙잡힌바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내려가면서 자기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신 하늘의 사명을 붙잡힌바 되어 그 사명을 완수하고자‘ 달려가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12, 14절). 바울은 이러한 자기의 모습을 빌립보 교회 성도들도 보고 듣고 배워서 그들 또한 주님이 주신 사명에 붙잡힌바 되어 그 사명을 완수하고자 달려가는 삶을 살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7)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는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자로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성경 빌립보서 3장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구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곳에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빌립보서 3장 17절에서 자기를 함께 본받으라 또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본받으라, 그리고 자기와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본받은 빌립보 교회 안에 성숙한 성도들을 눈여겨보라고 권면한 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에 대하여 말했습니다(18절). 그런 후 바울은 자기나 디모데나 에바브로디도나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 모두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하였습니다(20절). 그 이유는 바울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19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18-19절)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은 자기와 자기의 동역 자들과 빌립보 교회 성도들과 대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대조를 하는 목적은 그들 중에 믿음이 미성숙하여 유혹에 넘어갈 위험이 있는 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여러 사람들”(18절)을 본받지 말고 이미 영생을 얻어 하늘의 시민권자로서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위의 것을 생각하며 하늘로부터 오실 구원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데 그들 또한 동참케 하고자 하려고 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고 우리는 지금 하늘에서부터 장차 오실 구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 후 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21절). 만물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으신 전능하신 주님께서 큰 권능으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하늘에 시민권이 있는 자들로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라고 권면하였던 것입니다.

 

(8)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는 주님 안에서 굳게 서 있는 모습입니다.

 

성경 빌립보서 4장 1절을 보십시오: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나의 기쁨이며 면류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 안에 굳게 서십시오”(현대인의 성경).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강력하게 권면한 이유는 한 2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a) 첫째 이유는 빌립보 교회 외부적인 이유로서 바울이 빌립보서 32절부터 말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조심해야 할 개들”, “행악자들”, “몸을 상해하는육체를 신뢰하는 유대주의 자들입니다.

또한 바울이 말한 “세상적인 일만 생각”하며, “육체의 욕망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 수치를 영광으로”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입니다(18-19절).

 

(b) 둘째 이유는 빌립보 교회 내부적인 이유로서 빌립보 교회 공동체 안에 투기와 분쟁”(1:15)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17)하며 허영으로 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교회가 한 마음, 한 뜻으로 견고히 서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2:2-3).

 

그래서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란 두 여인들의 이름까지 언급 하면서까지 그들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주님 안에서 사이좋게 지내십시오”(현대인의 성경)]라고 권면한 것입니다(4:2).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 내려가면서 빌립보서 4장 1절에서 그들에게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굳게 서십시오”라고 권면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권면대로 주님 안에서 굳게 서 있기 위해선 무엇을 어떻게 했어야 했었을까요?

 

(a) 주님 안에서 굳게 서기 위해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어야 했습니다(4:2).

 

성경 마가복음 3장 2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교회 안에서 형제, 자매들이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지 않고 각자의 마음대로 서로 분쟁하면 그 교회는 굳게 설 수가 없습니다. 존 맥아더 목사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영전 안정감은 신자들이 서로 사랑하며, 화합하며, 화평(화목)하느냐에 달렸습니다.’ 빌립보 교회 안에 두 여자인 유오디아란 사람과 순두게란 사람이 주님 안에서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은 서로 다른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내러 가면서 그 두 여인의 이름을 언급하면서까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였던 것입니다(4:2). 그러기 위해선 그들에게 겸손한 마음이 필요했습니다(2:5).

 

(b) 주님 안에서 굳게 서기 위해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서로 도와야 했습니다(4:3).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참으로 자기와 함께 멍에를 같이한 사람에게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도우라고 말하였습니다(4:3). 돕되 바울은 그 사람에게 두 여인이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고 함께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우라고 권면했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가 주님 안에서 굳게 서 있기 위해선 서로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들을 도와 한 마음을 품게 하여 주님의 일을 협력하여 함께 일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9)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는 모든 사람에게 관용을 베푸는(너그럽게 대하는) 모습입니다.

 

성경 빌립보서 4장 5절을 보십시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현대인의 성경) “모든 사람을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왔습니다”]. 여기서 “관용”이란 헬라어 원어의 의미는 ‘법이나 관습의 모든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것’ 또는 ‘양도하다, 배려하다’라는 뜻입니다. 교회 안에서 형제, 자매들이 주님 안에서 굳게 서기 위해선 서로를 너그럽게 대해야 합니다. 특히 교회 지도자들은 서로 다투지 말고 관용하며 서로를 부드럽게 대해야 합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 안에서는 두 여인인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그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두 여인의 이름까지 언급하면서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강력하게 권면하였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관용(너그러우심)” 입니다(고후10:1). 이 그리스도의 관용은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입니다(약3:17).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고 말한 이유는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 왔기 때문입니다(빌4:5). 우리 온 교회 식구들이 주님 안에서 굳게 서기 위해선 우리는 서로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너그럽게 대해야 합니다. 그리하되 우리는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이 왔다는 재림이 관점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대로 서로를 너그럽게 대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교회 식구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도 너그럽게 대해야 합니다.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첫째로, 무엇이든지 참되며 옳은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무엇이든지 경건하며 정결한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무엇이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찬사가 있든지 우리는 그것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행해야 합니까? 첫째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모습입니다. 셋째로, 기뻐하는 모습입니다. 넷째로, 고난당하는 모습입니다. 다섯째로, 겸손한 모습입니다. 여섯째로, 사명에 충성하는 모습입니다. 일곱째로,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여덟 번째, 주님 안에서 굳게 서 있는 모습입니다. 아홉 번째,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모습입니다.

 

 

 

 

생각하고 행하고 싶은,

 

 

 

제임스 김 목사 나눔

(하나님의 평강을 누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