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평안

 

 

 

[빌립보서 46-7]

 

 

지금 당신의 마음에 평강이 있습니까? 아니면 혹시 지금 당신의 마음에는 염려가 있습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은 마음의 평강이지만 실제로 우리의 하루하루 삶 속에서 경험하는 것은 평강보다 염려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복음성가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이 생각납니다. 그 찬양 1절 가사를 보면 이렇습니다: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 이 모든 인간 고통 두려움 뿐 그 지겨움 끝없네 그러나 주 여기 계시듯.” 여러분, 실제로 전쟁의 소문이 들어가는 이 세상 아닌가요? 우리가 뉴스나 신문 등을 통하여 어디서 폭탄테러가 일어났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쳤는지, 이런 뉴스를 너무나 자주 듣고 있지 않습니까? 이 복음 성가 가사처럼 “이 모든 인간 고통 두려움 뿐 그 지겨움 끝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저는 기도회 때 종종 새찬송가 486장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를 하나님께 찬양을 드립니다: (1절) “이 세상에 근심된 일이 많고 참 평안을 몰랐구나 …”, (2절) “이 세상에 곤고한 일이 많고 참 쉬는 날 없었구나 …”, (3절) “이 세상에 죄악 된 일이 많고 참 죽을 일 쌓였구나 ….” 참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는 근심된 일, 곤고한 일, 죄악 된 일이 많고 죽을 일도 쌓여서 참 평안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갈 때가 수 없이 많은 것 같습니다.

 

분명히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고 (보살피고) 계시기에 우리의 염려를 다 주님께 맡기라고 말씀하고 있지만(벧전5:7)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마6:31) 등등 염려하면서 지금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즉, 우리에게는 “생활의 염려”가 있습니다(눅21:34). 결혼한 우리 부부들은 어떻게 하면 우리의 배우자를 기쁘게 할까 염려합니다(고전7:33, 34). 그리고 자녀를 둔 부모는 그 자녀들로 인하여 염려합니다. 혹여나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기지 않을까 염려됩니다(신29:18).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교회를 위하여 염려합니다(고후11:28). 그리고 우리는 많은 때에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합니다. 분명히 성경은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6:34)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일을 염려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장래(미래)를 염려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죽을까봐 염려합니다(창38:11). 우리에게는 “세상의 염려”가 참 많습니다(마13:22). 우리는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고 있습니다(눅10:41). 우리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가 이렇게 염려한다고 해서 우리의 키를 한 자라도 더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마6:27) 우리는 염려하고 또 염려합니다.

 

당신은 우리가 이렇게 염려할 때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아십니까? 저는 그 결과를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1) 우리의 마음이 둔하여 집니다. 성경 누가복음 21장 34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 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현대인의 성경) “너희는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하고 술 취하고 인생살이 걱정하다가 마음이 둔해져서 뜻밖에 그 날이 너희에게 덫과 같이 덮칠 것이다”]. (2) 우리는 말씀에 막혀 결실하지 못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생활하지 못합니다. 성경 마태복음 13장 22절을 보십시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현대인의 성경) “또 가시덤불 속에 떨어진 씨는 말씀은 듣지만 이 세상 걱정과 재물에 대한 유혹 때문에 말씀대로 생활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한다”]. 결국 우리 마음에 염려가 있다는 것은 우리 마음에 평강이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6-7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말씀드리십시오. 그러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평안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 중심으로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평안”이란 제목 아래 어떻게 하면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평안을 경험할 수 있는지 두 가지로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교훈을 받아 순종하여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평안을 경험하는 우리가 되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평안을 경험하기 위해선 우리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6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 바울이 이 빌립보서 편지를 쓰면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지금 옥에 갇힌 사람은 바울이 아닌가요? 그런데 오히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면 제 생각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마시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꾸로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염려할 만한 것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염려가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크게 한두 가지 염려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두 가지 염려란 첫째로, 내부적인 염려와 둘째로 외부적인 염려였습니다.

 

(1)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겪고 있었던 내부적으로 염려할 만한 요소들은 한 5가지 정도였다고 생각합니다:

 

(a)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종인 바울을 생각할 때 염려하였을 것입니다.

 

성경 빌립보서 1장 12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바울이 당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힌 것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그를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입장에서 주님의 종인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다면 염려가 되지 않았겠습니까? 만일 우리 교회 선교사님들이 선교지에서 선교 사역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면 우리 교회 식구들이 염려하지 않겠습니까?

 

(b)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무리들로 인하여 염려하였을 것입니다.

 

성경 빌립보서 1장 15, 17절을 보십시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해”(13절, 현대인의 성경) 옥에 갇혔다는 사실을 알고 주님을 믿는 대부분 신자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두려움이 없이 더욱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게 되었습니다(14절, 현대인의 성경).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파하는 신자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시기와 다툼으로”(15절, 현대인의 성경), 순수하지 못한 동기로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었습니다(17절, 현대인의 성경). 그 순수하지 않은 동기란 바로 바울을 더욱 괴롭힐 생각으로 이기적인 야심(“다툼으로”)에서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었습니다(17절, 현대인의 성경). 여러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빌립보 교회 성도들 입장에서 염려가 되지 않았을까요? 한번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먼 나라 이국땅에서 복음을 전하시다가 감옥에 갇힌 우리 교회 선교사님이 계시다면, 안 그래도 그 분을 안 좋아하는 교인들 중에 그 분에게 괴로움을 더하게 하고자 이기적인 야심에서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그 사실을 알고 염려가 되지 않겠습니까? 온 교회 성도들이 순수한 동기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도 한 영혼을 전도하기가 그리도 힘들 텐데 만일 교회 중 어떤 이들이 불순한 동기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이 얼마나 염려할 일입니까.

 

(c)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지 않는 교인들로 말미암아 염려하였을 것입니다.

 

성경 빌립보서 1장 27절을 보십시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여러분, 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권면을 했을까요? 그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은 그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온전히) 협력하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27절하).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계속해서 써내려 가면서 빌립보서 2장 3-4절에 와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현대인의 성경) “무슨 일이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자기 이익만 생각하지 말고 남의 이익도 생각하십시오”]. 바울은 빌립보서 4장 2절에 와서는 구체적은 빌립보 교회 안에 한 마음을 품지 못한 두 여인의 이름인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언급하면서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까지 권면하였습니다. 복음 전파 사역에 있어서 교회가 한 마음을 품은 사랑의 공동체요 연합된 공동체가 돼야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만일 우리가 아무리 전도와 선교를 한다고 해도 교회가 주님 안에서 연합하지 못하고 성도들 간에 다툼과 분열이 있다면 그것은 복음 전도를 방해하는 것이요 막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가 다투며 분쟁하는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전도를 받고 그 교회에 나오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교회는 먼저 복음의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d)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같은 교회 성도인 에바드로디도가 병든 것을 들어 알고 심히 염려하였을 것입니다.

 

성경 빌립보서 2장 26-28절을 보십시오: “그(에바브로디도)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에바브로디도란 인물은 빌립보 교회가 사도 바울의 쓸 것을 돕기 위해 바울에게 보낸 자였습니다(25절).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가 준비한 바울에게 필요한 쓸 것들을 가지고 바울이 마게도냐를 떠날 때와 데살로니가에 있었을 때 그에게 가서 선물을 전달했습니다(4:15-16). 그 뿐만 아니라 그는 바울에게 선물을 전달한 후에도 그와 함께 있으면서 동역하였습니다(2:25). 그는 바울과 함께 있으면서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했습니다. 그는 바울과 복음 전도에 협력했습니다. 또한 그는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면서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과의 영적 전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처럼 잘 싸우면서 담대히 복음을 바울과 함께 전했습니다. 그러던 에바브로디도가 죽을병에 걸리게 된 것입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까지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였습니다(30절). 그 사실을 알게 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들은 충분히 염려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만일 우리 교회가 성도님 중에 한 분을 우리 교회가 후원하고 있는 선교사님의 필요한 것을 돕고자 선교지에 가서 선교사님을 도와 함께 열심히 복음 선교를 하다가 죽을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면 어떠할 것 같습니까? 심히 근심하고 염려하지 않겠습니까? 요즘 같이 공산국가나 모슬렘 국가에서 선교하시는 선교사님들 얼마나 위험에 노출돼 있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위험에 노출되 있는 선교사님을 돕고자 이곳에서 떠나 선교지에 거서 고생하시다가 원치 않는 질병에 걸린다면 그 소식을 접하는 저와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하겠습니까? 큰 염려 속에서 온 교회 식구들이 하나님께 그 성도님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간구할 것입니다.

 

(e)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십자가의 원수들인 유대주의 자들로 인하여 염려하였을 것입니다.

 

성경 빌립보서 3장 2절을 보십시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여기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3번이나 반복해서 위험하니까 “삼가라”(beware), 즉 조심(주의)하라(watch out)고 말씀(경고)하고 있는데 누구를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것인가 하면 바로 십자가의 원수들인 유대주의자들입니다. 여기서 유대주의자들은 초기에 복음을 맹공격을 퍼부은 단체들 가운데 하나로서 그들은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이방인들이 구약의 어떤 의식(특히 할례의식)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이 유대주의자들과 그들의 거짓된 복음을 이단으로 말하고 있으며 심지어 저주까지 하였습니다(갈1:8). 그런데 문제는 유대주의자들은 교회 안에 있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진짜 신자로 인정받았다는 것입니다(예: 갈2:12). 예를 들어 갈라디아 교회에서 그랬습니다. 정작 그들은 그 교회에서 복음의 명료성을 훼손하고, 복음을 심각하게 더럽혔으며 또한 이방 신자들을 혼란에 빠트렸습니다.

 

이 다섯 가지 염려할 만한 빌립보 교회 내부적인 요소들 외에 외부적으로도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염려할 만한 요소가 있었습니다. 그 요소는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사역에 동참하므로 오는 핍박과 고난으로 말미암은 염려였을 것입니다.

 

성경 빌립보서 1장 28-30절을 보십시오: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그와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여러분, 왜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분명히 그들을 대적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요 그 대적자들로 인하여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충분히 두려워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28절). 그들 또한 바울처럼 같은 싸움을 하고 있었기에(30절) 충분히 자기들을 핍박하는 대적자들로 인하여 두려워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대적자들로 인하여 고난도 당하고 있었습니다(29절).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내려가면서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고난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권면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내부적, 외부적 요소들로 인하여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충분히 염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쳐해 있었기에 바울은 그들에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라고 권면한 것입니다(4:6). 그런데 그 권면의 편지를 받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입장에서 어떻게 생각했었을 까요? 만일 저와 여러분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입장에 있었다면 바울의 그 권면을 어떻게 받아들여겠습니까? 저 같으면 속으로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어떻게 염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염려하지 않을 수 있다 말인가?’라고 질문을 던졌을 것입니다. 저는 이 질문들을 제 자신에게 던져보았을 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로 권면한 바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제 생각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혀 있었던 바울의 상황은 충분히 염려할 만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이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고 기뻐했기 때문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어떻게 바울은 충분히 두려워하고 염려할 만한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또한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았을까요? 어떻게 그는 옥게 갇혀 있으면서도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었을 까요? 저는 그 대답을 빌립보서 1장 6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바울은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 바울은 충분히 염려할 만한 상황에서도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구원의 일을 시작하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 구원을 완성하신다는 확신과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에 그는 염려할 만한 상황에서도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과 확고한 믿음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염려할 만한 상황에 우리가 쳐해 있다할지라도 우리도 바울처럼 구원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 위에 견고히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견고한 믿음으로 우리는 우리의 염려를 다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고(보살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벧전5:7).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저런 “많은 일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눅10:41).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하고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마6:31). 우리가 생활의 염려를 하면 마음이 둔하여 지고(눅21:34)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말씀대로 생활하지) 못합니다(마13:22). 우리 모두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마십시다(6:34).

 

마지막 둘째로, 우리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평안을 경험하기 위해선 우리는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 구할 것은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야 합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6절을 보십시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을 알면 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당신이 사랑하는 그 사람이 당신이 생각할 때 (매우) 염려되는 상황이라면 당신은 그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당신이 주위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볼 때에도 염려되는 상황이라면, 그래서 그 사람들이 당신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당신도 알고 있다면, 당신의 마음은 어떠하시겠습니까? 저의 경우에는 감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고 힘이 됩니다. 그리고 실제로 가끔 제가 좀 마음이 힘들고 괴롭다가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므로 다시금 힘을 얻고 영혼이 소성케 되는 경험을 합니다. 그 때 드는 생각은 ‘아, 많은 분들이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셔서 …’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가시는 경우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왜 이렇게 힘든 일들이 연속으로 우리의 삶 속에 불어 닥치는 것인지 ...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부르짖기를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너무나 힘들고 마음이 괴롭고 견딜 수 없어서 애타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기도 제목을 나눠서 함께 하나님께 간구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합심기도의 능력을 믿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함께 합심 기도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성경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 약 120명이 마가의 다락방에 함께 모여서 합심으로 기도한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14절). 그들이 붙잡고 기도한 주님의 약속의 말씀은 바로 사도행전 1장 8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 결과는 오순절 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 충만함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핍박 가운데서도 담대히 선포했습니다(행2장). 이와 같이 우리 승리장로교회도 모이기를 힘쓰는 가운데 주님이 우리 교회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16:18)란 말씀을 붙잡고 합심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되 우리는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해야 합니다(행1:14). 하나님의 은혜는 합심한 곳에 더욱 많아지는 법입니다. 마음에 불평이 있어서 서로 다투는 곳에서는 진정한 기도의 분위기를 이루지 못합니다(박윤선). 성경 야고보서 4장 2-3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우리는 합심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합심 기도를 드리데 마태복음18장 19절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간구해야 합니다: “…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우리가 합심하여 기도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와 하나님과의 최고의 동역입니다. 또한 기도하되 우리는 “전혀”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행1:14). 이것은 끝까지 참으며 힘씀을 의미합니다(박윤선). 기도에 헌신하지 못하게 만드는 방해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분주함입니다(나우웬). 그 분주함 속에서 우리는 기도의 우선순위가 생활화 되지 못할 위험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도적으로라도 기도하는 시간을 만들어서 함께 모여 전심으로 합심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6절 다시 보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권면하였는데 여기서 우리는 한 3가지를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면서 좀 짧게라도 생각해 봐야 합니다.

 

(1) 우리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주로 우리는 큰 일이 터지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같습니다. 특히 그 큰 일이 우리가 걸머지기에 힘들고 어려울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작은 일들은 별로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에 기도를 하지 않고 넘어가는 것 갈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우리는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모든 일에 하나님께 기도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크게 염려되는 일만 하나님께 기도할 뿐만 아니라 작게 염려되는 일들도 다 하나님께 아뢰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염려를 다 주님께 기도로 맡겨야 합니다(벧전5:7).

 

(2) 우리는 우리의 구할 것을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하나님께 구할 것이 무엇입니까? 다시 말하면,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적어도 한 5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a) 우리에게 제일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일용할 양식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성경에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보면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현대인의 성경) ”우리에게 날마다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Give us this day our daily bread(NASB)](마6:11).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의식주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염려하기보다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b)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건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사람에게만 의사가 필요하다”(마9:12). 물론 이 말씀의 의미는 좀 다른데 있지만 저는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건강이라 생각합니다. 건강하지 않고 병이 들면 우리에게는 의사 선생님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될 수 있는 데로 의사가 필요 없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건강해야 합니다. 우리는 건강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며 또한 건강관리를 꾸준히 잘 해야 합니다.

 

(c)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물질입니다.

 

성경 사도행전 2장 45절을 보면 초대 교회에 성령 충만한 공동체는 “재산과 물건을 팔아 각자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처럼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은 재산 또는 물질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가 필요한 물질을 위하여서도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d) 우리에게는 신실한 친구가 필요합니다(6:14).

 

우리에게는 신실한 신앙의 동지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를 범하고 있을 때에 사랑으로 우리를 책망해 줄 수 있는 충실한 친구가 필요합니다(잠27:5). 우리가 힘들어할 때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주며 위로해 주는 신실한 친구가 필요합니다. 함께 주님 안에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신앙의 친구를 위하여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e) 우리에게는 지혜가 필요합니다(17:9).

 

이 세상을 살아가면 갈수록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지키고 올바로 신앙생활을 감당하기 위해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약1:5).

 

이 외에 우리 각자가 필요로 하는 것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우리는 그 필요로 하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야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생각을 한번쯤은 좀 신중하게 해봐야 합니다. 그 생각이란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생각하기보다 ‘하나님께서 내게 필요로 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라는 생각입니다. 제가 이 질문을 던지게 된 이유는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생각하기에 우리가 필요한 것과 하나님께서 생각하시기에 우리가 필요한 것과 다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자녀가 우리 부모에게 와서 ‘저는 이것이 필요합니다’라고 우리에게 좀 주세요 할 때 어떤 때는 우리 부모의 입장에서 볼 때에 지금 내 자녀가 필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이것이라고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가 믿음이 성장하면 할수록 내 입장에서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생각하기보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내가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주시길 기도하는 습관을 갖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데로 기도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기도하는 습관, 즉 우리의 뜻대로 기도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습관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6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내려가면서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기도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렇게 권면하는 바울이 보기에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또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교회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서로의 입장이 같을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빌립보 교회 성도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과 바울이 보기에 그들이 필요한 것이 같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모든 필요로 하는 것을 빌립보서 전체를 묵상하면서 한 7 가지만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a) 바울이나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나 물질이 필요로 했을 것 같습니다.

 

바울의 복음 사역에 협력함에 있어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물질로 바울을 후원한 것을 보면 바울에게나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나 물질(선교후원금)이 필요했다고 생각합니다(빌1:5, 7, 4:15-17).

 

(b) 바울이나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나 복음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했었기에 그들은 기도가 필요했었다고 생각합니다(1:4, 9).

 

(c) 바울이나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하여 대적자들이 있었고 또한 그 대적자들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필요했었을 것입니다(1:28-29, 3).

 

(d) 바울에게나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는 예수님의 마음이 필요했었다고 생각합니다(2:5, 4:2).

 

그 예수님의 마음으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서로 사랑하므로 사랑의 공동체를 세워나가야 했었습니다.

 

(5) 에바브로디도란 인물을 생각할 때 바울에게 있어서나 또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나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로서 그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하나님의 치유가 절실히 필요했었을 것입니다(2:25ff.).

 

(6) 바울이나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나 필요했던 것은 가장 고상한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라 생각합니다(3:8).

 

(7) 바울이나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필요하였던 것은 예수님 한분으로 만족하는 자족의 비결을 배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4:11-12).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위하여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 건강, 물질, 신실한 신앙의 친구,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보호하심, 예수님의 마음, 하나님의 치유, 예수님을 아는 지식, 예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자족의 비결 등을 하나님께 구하는 우리가 되길 기원합니다.

 

(3) 우리는 감사함으로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어떻게 염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가 있죠? 분명히 우리가 보기에는 감사할 수 없는 상황인데, 어떻게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가 있을까요? 제가 작년에 요나서를 묵상하다가 주시는 깨달음이 있어서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기도 드리는 그리스도인”이란 제목 아래 짧은 말씀 묵상의 글을 쓴 것이 여러분과 나눕니다: “결코 감사할 수 없는 상황인데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라는 말입니까? 과거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기억하면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쳐해 있었던 상황은 결코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밤낮 3일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습니다(요나1:17). 그는 고난을 받고 있었습니다(2:2). 그는 바다 깊은 곳에 던져졌습니다(3절). 그는 주님 앞에서 쫓겨났습니다(4절). 그의 생명은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었습니다(7절). 그는 죽음의 땅에 갇혀 있었습니다(6절). 이런 상황에서도 요나는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1, 9절).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바로 그는 과거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기억하였기 때문입니다. 요나 선지자가 기억한 과거의 하나님의 은총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가 바다에 던져졌을 때(1:14) 하나님께서 큰 물고기를 예비하시사 요나를 삼키게 하시므로 그가 밤낮 3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입니다(17절). 이것이 바로 요나가 과거에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이었습니다. 결코 이것은 요나가 기도하며 기대했던 하나님의 구원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가 기대했던 구원은 하나님께서 물고기에게 말씀하시사 요나를 육지에 토하게 하는 것이었을 겁니다(2:10). 그러나 주권자이신 하나님 구원은 큰 물고기로 하여금 요나를 삼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1: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나는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습니다(2:1, 9). 우리 기도의 응답이 우리 기대대로 현실화 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 응답의 현실화는 우리가 기도한 내용대로, 우리가 기대한 대로 돼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 응답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이 이루어졌음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에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므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것입니다”(9절)라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과거에 구원을 베풀어 주신 하나님께서 현재에도 구원을 베풀어 주실 줄 믿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히13:8) 구원의 하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구원의 확신과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요나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렸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사 요나를 육지에 토해 내게 하셨습니다(욘2:10). 요나는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받았습니다. 요나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았습니다. 요나의 상황은 드디어 변했습니다: 물고기 뱃속이 아닌 육지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의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릴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 응답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뿐만 아니라 우리도 상황도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하였습니다(9절).”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6절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계속해서 내려가면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감옥에서 편지를 쓰고 있었던 바울은 어떻게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므로 기도할 수 있었을까요? 성경 빌립보서 1장 3-5절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라”[(현대인의 성경) “나는 여러분을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마다 항상 여러분 모두를 위해 기쁜 마음으로 간구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처음 그리스도를 믿을 때부터 지금까지 기쁜 소식을 전하는 데 협력해 왔기 때문입니다”]. 감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기도한 이유는 그들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복음을 위한 일(복음 전도 사역)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어떻게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복음 전도 사역에 동참하였습니까? 빌립보서 4장 15-16절을 보십시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복음 전도 사역에 바울이 필요한 것(쓸 것)을 물질적으로 후원하므로 그의 복음 전도를 협력하였습니다. 그 후원을 받은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항상 감사하며 기도하였던 이유를 빌립보서 1장 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항상 감사하며 기도하였던 이유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슨 확신입니까? 바로 하나님께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 가운데 시작한 착한 일, 즉 구원의 일을 반드시 완성하신 줄 확신한 것입니다. 이 바울의 확신은 결코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근거한 확신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확신은 하나님에게 근거한 확신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랑하서 선택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반드시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이 확신이 바울에게 있었기에 바울은 그들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간구할 때 항상 감사가 있었습니다.

 

우리도 모든 일에 감사하므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비록 우리의 눈으로 보기엔 결코 감사할 수 없는 상황인 것 같을지라도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 안에 구원의 일을 시작하신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까지 이루실 줄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하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 모두는 우리 교회에서 여기 저기 나가셔서 복음 선교 사역에 수고하시는 선교사님들의 복음 사역에 합력하므로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감사기도 조건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러한 감사 기도의 조건이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또한 우리 교회 가운데 더욱더 충만해 지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6절 말씀대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뢸 때에 어떠한 결과를 맛보게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7절을 보십시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현대인의 성경) “그러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평안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성경 말씀대로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뢸 때에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평안(평강)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상상이 되십니까? 충분히 염려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의 지(이)성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평안을 저와 여러분이 누린다는 것, 여러분은 상상이 되십니까? 이러한 놀라운 평안은 결코 이 세상이 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은 이 하나님의 놀라운 평안을 알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이 평안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백성(자녀)들만이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한결같은 마음으로 의지(신뢰)하여(사26:3) 하나님께 모든 염려되는 일들을 감사하므로 기도하는(빌4:6)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주시는 하나님의 “완전한 평안”입니다(사26:3, 현대인의 성경). 이 하나님의 완전한 평안이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모든 염려를 기도로 아뢰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신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빌4:7). 마치 군인들이 시민을 밤새도톡 지켜 보호해주듯이 하나님의 평안이 염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쳐해 있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드는 모든 염려나 걱정이나 두려움이나 의심 등등으로 부터 우리의 마음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MacArthur). 우리 모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우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다.

 

 

 

 

오직 하나님만일 주실 수 있는 놀라운 평안을 사모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염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가고자 애쓰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