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주님 안에 굳게 서십시오

 

 

 

[빌립보서 41-5]

 

 

당신은 믿음에 굳게 서 있으십니까? 성경 이사야 7장 9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 …”(If you do not stand firm in your faith, you will not stand at all.'). 우리는 예수님을 굳게 믿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 있어야 합니다(고전16:13).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굳게 서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주님의 말씀에 굳게 세우시길 기원합니다(시119:133). 성경은 야고보서 5장 8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인내하며 참고 마음을 굳세게 하십시오.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깝습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1절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나의 기쁨이며 면류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 안에 굳게 서십시오”(Therefore, my brothers, you whom I love and long for, my joy and crown, that is how you should stand firm in the Lord, dear friends!). 여기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계속해서 써 내려가면서 그들을 가리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나의 기쁨이며 면류관입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비슷한 말씀이 데살로니가전서 2장 19-20절에도 나옵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현대인의 성경) “우리 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누가 우리의 희망과 기쁨과 자랑이 되겠습니까? 여러분이 바로 우리의 자랑이며 기쁨입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나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주 예수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 그의 기쁨이요 자랑의 면류관이었습니다. 바울의 기쁨이 무엇이었습니까? 빌립보서 1장 18절을 보면 바울의 기쁨은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1장 25절을 보면 바울의 기쁨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성장하면서 그들이 기쁨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빌립보서 2장 1-2절을 보면 바울의 기쁨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서로 격려하고 서로 위로하며 서로 친절과 동정을 베풀면서 성령님으로 교제하는 것(1절), 그들이 한 마음 한뜻으로 같은 사랑을 가지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2절)(현대인의 성경). 또한 2장 17절을 보면 바울의 기쁨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자기가 희생하는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즉, 바울의 기쁨은 그가 전도하여 구원받은 영적인 자녀들인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4:1). 또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바울의 “면류관”이었습니다(1절). 무슨 뜻입니까? “면류관”이란 사도 바울 당시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 중 오직 일등 한 한 사람만 받는 상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24-25절을 보십시오: “경기장에서 여러 선수들이 다 함께 달리지만 우승자는 하나뿐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이와 같이 여러분도 우승자가 되도록 힘껏 달리십시오. 우승자가 되려고 경쟁하는 선수마다 모든 일에 절제합니다. 그들은 썩을 면류관을 얻기 위해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면류관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합니다”(현대인의 성경). 또한 “면류관”이란 죤 맥아더 목사님에 의하면 연회에서 한 사람이 그의 성공이나 생상적인(열매 맺는) 삶의 상징적인 의미로 그의 동료들에게 영광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맥아더). 바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있어서는 그의 노력이 열매를 맺었다는 증거이기에 그는 그들에게 ‘나의 면류관’(빌4:1)이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우리의 면류관은 무엇입니까? 우리 자신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자들로서 하나님의 의로의신 뜻에 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한 형제, 자매들이 바로 우리의 면류관이 아닌가요?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 주님 앞에서 우리의 자랑과 면류관은 바로 구원받은 영적 자녀들인 형제, 자매들입니다.

 

바울은 사랑하고 사모(그리워)하며 그의 기쁨과 면류관이었던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 안에 굳게 서십시오”라고 강력하게 권면하였습니다(1절).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제 생각엔 그 이유가 두 가지였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이유는 빌립보 교회 내부적인 이유였고 동시에 둘째 이유는 외부적인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먼저 빌립보 교회가 주님 안에서 굳게 서 있지 못했던 외부적인 이유란 우리가 이미 묵상한 빌립보서 3장 2절에서 바울이 말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조심해야 할 “개들”, “행악자들”, “몸을 상해하는” 육체를 신뢰하는 유대주의 자들입니다. 또한 같은 장18-19절에서 바울이 말한 “세상적인 일만 생각”하며, “육체의 욕망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 수치를 영광으로”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입니다. 그러면 빌립보 교회가 주님 안에서 굳게 서 있지 못했던 내부적인 이유란 무엇이었습니까? 성경 빌립보서 1장 15절, 17절과 2장 3절에서 알 수 있듯이 빌립보 교회 공동체 안에 “투기와 분쟁”(1:15)과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17절)하며 허영으로 하는(2:3)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바울은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2절에서 “유오디아”와 “순두게”란 두 여인들의 이름을 언급하면서까지 그들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주님 안에서 사이좋게 지내십시오”(현대인의 성경)]라고 권면한 것을 보면 빌립보 교회 내부적으로 주님 안에서 굳게 서 있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 내려가면서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1절에 와서 그들에게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굳게 서십시오”라고 권면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가 사랑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하는 빌립보 교회 형제들이였기에 또한 그들은 바울의 기쁨과 면류관 이였기에 그들에게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굳게 서십시오”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여러분은 주님 안에 굳게 서십시오”란 제목 아래 우리가 주님 안에 굳게 서기 위해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한 4가지로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가 주님 안에서 굳게 서기 위해선 우리는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2절을 보십시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현대인의 성경) “유오디아와 순두게 두 사람에게 권합니다. 주님 안에서 사이좋게 지내십시오”]. 교회란 공동체가 주님 안에서 굳게 서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무로 비교한다면 나무가 굳게 서기 위해선 나무의 뿌리가 시냇가에 깊이 심겨진 것처럼 교회도 반석이 되시는 주님 안에 뿌리를 박아야 합니다. 골로새서 2장 6-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계속 그분 안에서 사십시오. 그분 안에 깊이 뿌리를 박고 그분을 기초로 여러분의 인생을 건설하며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하십시오”]. 우리 교회가 주님 안에서 굳게 서기 위해선 주님 안에 깊이 뿌리를 박고 그분을 기초로 우리의 인생을 건설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분의 가르침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가 넘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성경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 생각납니다(24절). 그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었으므로 “비가 내려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물어 쳐도 무너지지 않”습니다(25절, 현대인의 성경). 어떻게 우리는 우리 집을 그 지혜로운 사람처럼 반석 위에 지을 수 있습니까? 바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므로 가능합니다(24절). 만일 우리가 주님의 말씀은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우리 집을 모래 위에 짓고 있는 것입니다(26절). 만일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지 않으면 우리는 우리 교회를 모래 위에 짓는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그 결과 “비가 내려 홍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몰아치면 크게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27절, 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교회가 주님 안에서 굳게 서기 위해선 반석이 되시는 주님 안에 서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행해야 합니다.

 

또한 교회가 주님 안에서 굳게 서기 위해선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2절 하반절 말씀처럼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2절을 보십시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현대인의 성경) “유오디아와 순두게 두 사람에게 권합니다. 주님 안에서 사이좋게 지내십시오.” 개혁 개정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번역했고 현대인의 성경은 “주님 안에서 사이좋게 지내십시오”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빌립보 교회 안에 두 여자인 유오디아란 사람과 순두게란 사람이 주님 안에서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던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은 서로 다른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 내려가면서 그 두 여인의 이름을 언급하면서까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좀 상상이 되십니까? 교회 안에서 열심히 섬기는 두 여자들이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지 않고 각각 다른 마음을 품고 교회를 섬기는 모습을요? 이것을 가정에 적용한다면, 만일 집 안에 두 딸이 한 마음을 품지 못하고 서로 각각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면 그 가정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마태복음 12장 2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단이 만일 사단을 좇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저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현대인의 성경)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이미 서로 갈라져 싸우는 것이니 그렇게 하고서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설 수 있겠느냐?”]. 또한 마가복음 3장 2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교회 안에서 형제, 자매들이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지 않고 각자의 마음대로 서로 분쟁하면 그 교회는 굳게 설 수가 없습니다. 존 맥아더 목사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영전 안정감은 신자들이 서로 사랑하며, 화합하며, 화평(화목)하느냐에 달렸습니다’(Spiritual stability depends on the mutual love, harmony, and peace between believers)(MacArthur).

 

그러면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은 빌립보 교회 안에 유오디아와 순두게란 여자들은 어떤 마음을 품었기에 바울이 그들의 이름까지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했을까 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 대답이 빌립보서 2장 3-4절에 나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현대인의 성경) “무슨 일이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며 자기 이익만 생각하지 말고 남의 이익도 생각하십시오”]. 이 말씀을 비춰볼 때 유오디아와 순두게란 여자들이 주님 안에서 한 마음을 품지 못했던 이유는 그들에게는 “겸손한 마음”이 없었고 오히려 “허영”심이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녀들은 교만한 마음과 허영심 속에서 자기를 남보다 더 낫게 여기고 자기 일만 돌보고 다른 사람들의 일을 잘 돌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즉, 그녀들은 각각 자기 이익만 생각하였지 남의 이익을 잘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랬기에 그들 사이에는 다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두 여인의 다툼은 사도 바울로 하여금 옥중에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녀들의 이름을 언급하면서까지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해야 할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미 빌립보서 2장 2절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한 마음, 같은 마음은 무엇입니까? 빌립보서 2장 5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우리 모든 교회 식구들이 품어야 할 같은 마음은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고 있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품어야 할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한 3가지로 성경 빌립보서 2장 6-8절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우리 모두가 품어야 할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은 다른 사람들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6절). (2) 우리 모두가 품어야 할 그리스도 예수님 의 마음은 우리 자신을 비워 종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7절). (3) 우리 모두가 품어야 할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은 우리 자신을 낮춰서 죽기까지 주님께 복종 하는 것입니다(8절). 우리는 교만한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교만한 사람의 높임받기를 원하는 마음은 결코 만족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으려는 허영심은 결코 만족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영광을 탐내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겸손한 사람이 돼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 자신을 낮춰야 합니다. 우리는 낮아지고 또 낮아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시자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시사 자기를 낮추시고 저주의 나무인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리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무릎으로 하여금 예수님에게 꿇게하셨습니다(9-11절). 명심하십시다.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기보다 하나님께 높임을 받는 것이 훨씬 더 낫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높임을 받기 위해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낮아져야 합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겸손할 때에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높이실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주님 안에서 굳게 서기 위해선 우리는 서로 도와야 합니다.

 

언젠가 영어사역 금요일 성경공부 시간에 Jin 형제가 각자 자신의 영적 은사가 무엇인지 발견하고자 무슨 종이들을 준비하여 그 그룹을 인도한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날 밤에 성경공부를 마친 것을 보고 저희 집 딸 예리와 예은이만을 데리고 차타고 집으로 가면서 그 날 밤 성경공부에 대해서 물어보면서 영적 은사 발견에 관하여 공부했다고 하길래 그러면 너희의 은사는 무엇이라고 결과가 나왔는지를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예리만 대답을 하면서 자기의 은사가 한 3가지로 나왔다고 하면서 저에게 말해 준 기억이 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은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분명히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신자들에게 각각 은사를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교회 안에는 다양한 은사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고전12:4). 또한 성경은 교회 안에 다양한 직분과(5절) 다양한 사역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6절). 그래서 제 개인 생각에는 각자가 주님께 받은 은사대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것이 좋고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저는 우리 각자가 받은 은사를 최대한 발휘하여 극대화(maximize)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이러한 생각을 갖게 된 계기는 역기를 드는 운동을 하는데 제가 어느 정도의 무게를 드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힘들어도 좀 더 무거운 역기를 들려고 시도하면서 제가 들 수 있는 역기 무게를 최대한 끌어올리려고 극대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은사나 저의 달란트를 최대한 발휘하도록 극대화 해야겠다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각자가 받은 은사로 말미암아 교회 안에서 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분쟁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면 교회 안에서 형제, 자매들이 각각 받은 은사가 다른데도 불구하고 그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교회 안에는 분쟁이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로마 교회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로마서 12장 6절과 16절을 보십시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따라 우리가 받은 선물이 각각 다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분수에 맞게 사용해야 합니다. …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교만한 마음을 품지 말고 낮고 천한 사람들의 벗이 되십시오. 스스로 잘난 체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을 보면 교회 안에서 은사로 말미암아 분쟁이 있을 수 있는 이유 4가지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 4가지란 (1) 우리가 받은 은사는 주님께서 “은혜대로” 주셨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 (2) 우리가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 (3) 우리가 은사를 분수에 맞게 사용하지 않는 것, (4) 은혜로 받은 은사를 교만한 마음으로 사용하면서 자기 스스로를 잘난 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혹시 알고 계십니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은사들 중에 ‘돕는 은사’도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2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those able to help others)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교회란 공동체 안에 서로 돕는 은사를 가지고 있는 지체들이 있어서 각각 자기에게 주신 달란트대로 각각 자기의 위치에서 자기의 직분과 의무를 겸손히, 묵묵하게, 신실히 감당할 때 교회에 큰 유익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 좋은 예가 바로 로마서 16장 2절에 나오는 뵈뵈라는 여성도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교회에 추천한 이 뵈뵈란 여인을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라고 소개를 하였는데 여기서 “보호자”란 ‘여성 후원자’로서 뵈뵈란 여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원들로 바울과 여러 사람을 도와주는데 헌신한 일군이라고 묘사 하였습니다(Friberg). 존 맥아더 목사님에 의하면 초대 교회 당시 여자 일군들은 병든 신자들과 가난한 사람들, 낯선 사람들 및 감옥에 있는 사람들을 돌보는 일을 했다고 합니다(MacArthur). 교회 안에 돕는 은사를 가진 일군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뵈뵈처럼 여러 사람들을 도우므로 말미암아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 세움을 받아 사랑이 식어져 가는 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는 사도 바울이 인정하고 칭찬하며 로마 교회에 추천하는 뵈뵈라는 여인을 생각할 때 성경 마태복음 5장 16절이 생각났습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 말씀이 생각난 이유는 “뵈뵈”란 이름의 뜻이 바로 ‘밝고 빛나다’(“bright and radiant”)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바로 저와 여러분이 뵈뵈라는 이름의 뜻처럼 이 어두운 세상에 밝고 빚을 내야 하는 하나님의 빛 된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뵈뵈란 여인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도우면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는 교회의 일군들이 다 돼야 합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3절을 보십시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나의 신실한 동역자인 여러분도 이 여자들을 도와 주십시오. 그들은 클레멘트와 나의 다른 동역자들과 함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에 나와 함께 수고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이미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편지를 써내려가면서 참으로 자기와 함께 멍에를 같이한 사람에게 “저 여인들”을 ‘도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과 함께 멍에를 같이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바울은 그 사람에게 “저 여인들”을 도우라고 말하고 있는데 어느 주석에 의하면 그 사람은 디모데나 실라(행15:40, 16:19)였던지 혹은 빌립보의 제일 높은 감독(the chief bishop)였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또는 그 사람이 “멍에”란 헬라어 단어인 “synygus”란 말 그대로 이름이 “Synzygus”였을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Jamieson). 그러나 이것은 확실치 않습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3절에서 언급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바울이 빌립보 교회 전체 성도들에게 권면한 것이 아니라 그 한 사람에게 특별히 “저 여인들”을 도우라고 권면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한 “저 여인들”은 누구입니까? 바로 바울이 2절에서 이미 언급한 유오디아와 순두게 입니다. 바울은 이 두 여인들이 클레멘드와 자기의 다른 동역자들과 함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에” 자기와 함께 “수고한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3절, 현대인의 성경) 그 두 여인들을 도우라고 말한 것입니다. 지금 바울은 빌립보 교회 모든 성도들에게가 아니라 참으로 자기와 함께 멍에를 같이한 누구인지 우리는 모르는 그 한 사람에게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도록 도우라고 권면했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바울이 그 두 여인을 도우라고 권면한 그 한 사람이 참으로 자기와 함께 멍에를 같이하였다고 말하였는데 여기서 “멍에”란 원어 헬라어 단어(synzygus)가 합성어란 사실입니다. 이 단어는 ‘함께’란 단어와 ‘일하다’란 단어가 합친 것으로서 그 의미는 “동역자”(fellow laborer or worker) 또는 “돕는자”(helper)입니다(Zodihiates). 여기서 “돕는자”란 의미의 단어가 빌립보서 2장 25절에서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에바브로디도”에 대해서 말하면서 사용하였습니다. 어쩌면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더욱 급히” 빌립보 교회에 보내고(28절) 나서 그로 하여금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도록 도우라고 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제 개인 생각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던질 수 있는 질문은 그 두 여인을 무엇을 어떻게 도우라는 말인가 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유오디아와 순두게란 두 여인들은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주님 안에서 사이좋게 지내지 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만일 우리 교회 안에서 열심히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면서 또한 복음 전하는 일에 수고하고 있는 여 성도님들 중 두 분이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하고 서로 사이좋게 지내고 있지 않고 있다면 우리는 그 두 자매님들을 무엇을 어떻게 도와야 할까요?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저는 그 두 자매들이 서로 화해하고 화목하게 지낼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우리는 그 두 자매님들이 주님 안에서 서로 화해하고 화목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화평케 하는 자들(peacemakers)이 돼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화평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서로를 향한 마음의 벽을 허물어야 합니다. 에배소서 2장 14-17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의 평화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갈라놓은 담을 헐어서 둘이 하나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들을 원수로 만들었던 계명의 율법을 예수님이 자신의 육체적인 죽음으로 폐지하신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로운 백성으로 만들어 화목하게 하고 또 십자가로 그들의 적개심을 죽이고 둘을 한 몸으로 만들어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셔서 여러분과 같이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던 이방인이나 하나님과 가까이 있던 유대인들에게 평화의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현대인의 성경). 또한 우리는 그 두 자매들에게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3절 하반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그들의 이름이 이미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줘야 합니다. 생명책에 기록되 있는 영생을 얻고 천국 시민권자들이 주님 안에서 서로 다른 마음을 품어서야 되겠습니까.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 즉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사실을 우리는 그들에게 상기시켜 주며 화목, 화합하도록 권면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성령님께서 그 두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시사 그들 마음에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하는 허영심이든 다툼이든 모든 요소를 회개케 하시고 버리게 하시며 성령의 열매인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품게 하시사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게 하시어 화목케 하실 것입니다. 그리할 때 두 사람의 화목으로 말미암아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님들에게도 덕이 될 뿐만 아니라 교회가 지역 사회에도 한 마음을 품은 공동체로서 덕이 되며 칭찬받는 교회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후 바울과 멍에를 같이 한 그 사람이 유오디아와 순두게를 도울 수 있는 것은 그녀들과 함께 복음 사역에 힘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3절을 다시 보십시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나의 신실한 동역자인 여러분도 이 여자들을 도와 주십시오. 그들은 클레멘트와 나의 다른 동역자들과 함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에 나와 함께 수고한 사람들입니다. …”]. 사도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자기와 함께 복음에 힘쓰던 여인들이라고 말한 것을 보면 지금 그들이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하고 있는 것은(2절) 복음 사역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바울은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먼저 2절에서 그 두 여인들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강력하게 권면한 후 이렇게 3절에 와서는 그 두 여인을 도우라고 말한 것 같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함께 동역을 할 때에 참으로 중요한 것은 먼저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서 한 마음(한 뜻)을 품고 화목, 화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서로 다투고 분열하면서 복음 사역을 감당한다면 그것은 복음 전달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굳게 서기 위해선 우리가 서로 도와야 합니다. 서로 돕되 우리는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고 서로 도와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주님 안에서 같은(한) 마음을 품지 못한다면 교회에 덕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 복음화에도 덕이 되지 못합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화목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한 마음을 품고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겨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복음 사역에 힘쓰는 자들을 도와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 교회는 주님 안에서 굳게 서 있을 수 있습니다.

 

셋째로, 우리는 주님 안에서 굳게 서기 위해선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당신은 항상 기뻐하십니까? 성경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절을 보면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가 항상 기뻐할 수가 있겠습니까? 물론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힘으로는 가능합니다. 그 사실을 믿고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인 “희락”을 구해야 합니다(갈5:22).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성경 요한복음 8장 29절을 보십시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우리도 예수님처럼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에서 “기뻐하라”는 말씀을 접하면 생각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그 구절은 바로 느헤미야 8장 10절 하반절입니다: “…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현대인의 성경) “여호와께서 주시는 기쁨이 여러분의 힘이 될 것입니다”](Do not grieve, for the joy of the LORD is your strength). 제가 개인적으로 기쁨에 관하여 생각할 때 좋아하는 말씀이지만 실제로는 그 말씀이 제 삶에 익숙하지는 않습니다. 지금도 이 말씀을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 과연 나는 주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라는 자문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저는 주님으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과연 나의 힘인지도 자문합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는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뻐할 수 있을까요? 느헤미야 8장 10절 말씀 문맥에 근거해서 한 3가지로 묵상했었습니다:

 

(1) 주님을 기뻐하기 위해서 우리는 슬퍼하지 말며 울지 않아야 합니다.

 

성경 느헤미야 8장 9절을 보십시오: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학자 에스라를 통하여 모세의 율법을 듣고 또한 레위 사람들을 통하여 율법을 깨닫게 될 때에 자기들의 죄가 들춰지므로 회개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을 통하여 죄의 자각(conviction of sins)이 있으므로 울었습니다. 에스라도 이러한 눈물을 흘린 기록이 에스라 10장1절에 나옵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 많은 백성이 심히 통곡하매 ….”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의 자각으로 인하여 울고 있을 때에 느헤미야와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성일 이니 슬퍼하며 울지 말라 고 권면했습니다. 지금 현대 말로 한다면, 목사님을 통하여 또한 성경공부 교사 선생님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도님들이 자기의 죄를 깨닫게 되어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에 목사님과 장로님과 교사 선생님들이 ‘오늘은 주일이니 슬퍼하며 울지 마십시오’라고 권면한 것 같은 것입니다.

 

(2) 주님을 기뻐하기 위해서 우리는 근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 느헤미야 8장 10-11절을 보십시오: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종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하매.” 왜 수문광장에 모여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근심을 하였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근심하였던 이유는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무엇이 하나님을 불쾌하게 하는지 잘 모르면서 오랫동안 주님을 올바르게 섬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Packer). 조만제라는 사람이 쓴 글 중에 “근심을 이기는 슬기”가 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근심은 생명의 적이다’라고 역설한 것처럼 근심이 지속되는 한 사람은 행복할 수 없고 즐거움을 가질 수 없다. 근심은 건강에 지장을 주어 생명을 단축시키고, 인간으로 하여금 새로운 창조적인 일에 전념할 수 없도록 만든다. … 널리 알려진 이솝도 "안심하면서 먹는 빵 한 조각이 근심하면서 먹는 잔치보다 낫다"고 말하였다”(인터넷). 맞습니다. 근심은 우리에게 힘이 되기보다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연약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와 에스라 그리고 백성들을 가르쳤던 레위 사람들은 울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근심하지 말라”고 본문에서 두 번이나 말하였습니다(9, 10절). 우리가 잘 아는 복음성가 “이 날은”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이 날은 이 날은 주의 지으신 주의 날일세 기뻐하며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즐거워하세 이 날은 주의 날일세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이 날은 이 날은 주의 날일세.” 주일 주님의 전에 올라와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서 우리의 죄가 들춰지므로 근심할 수 있고 또한 근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근심은 우리의 힘이 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우리의 죄를 회개하므로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죄에서 자유를 누리므로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주님을 기뻐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 느헤미야 8장 12절을 보십시오: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앎이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느헤미야와 에스라, 그리고 그들에게 모세 율법을 깨닫게 했던 레위 사람들을 권면을 듣고 슬픔과 눈물과 근심을 그치고 “크게 즐거워”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는 그 읽어 들린 말을 밝히” 알았기 때문입니다(12절).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슬픔과 눈물, 근심을 사라지게 한 것은 다름 아닌 모세 율법을 밝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란 말입니다. 모세 율법은 우리에게 죄의 자각, 즉 죄를 깨닫게 하지만 우리를 구원해 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갈3:24). 즉, 모세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게 되며 그 모세 율법이 가리키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밝히 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슬픔과 눈물과 근심을 중단하고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우리 많은 크리스천들의 현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므로 마음이 찔려 죄를 회개 하는 가운데 눈물과 슬픔, 근심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단계에서 한 단계 더 올라가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죄를 깨닫는 회개의 단계는 시작 단계이지 결코 최종의 단계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키는 최종의 단계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죄 사함 및 구원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밝히 알고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가리키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을 믿음으로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마음에 모든 슬픔과 근심을 주님께서 없애주시는 평강의 축복을 누립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4절을 보십시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Rejoice in the Lord always. I will say it again: Rejoice!).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그는 2장 17절에서 “…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그리고 3장 1절 상반절에서도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말하였는데 이렇게 오늘 본문 4장 4절에 와서 또 다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 기뻐하라”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 기뻐하라고 말하였을 때에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자기처럼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면서(1:5)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로부터 오는 고난을 받는 상황에서도(28-30절)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저는 그 대답이 빌립보서 1장 29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현대인의 성경) “그리스도를 위해 여러분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분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해 고난도 받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서 대적자들로 인하여 고난을 받을 때에도 주님 안에서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받는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인 줄을 믿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5장 41절을 보면 예수님의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였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바울의 기쁨이 무엇이었는지 한 다섯 가지로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바라기는 바울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되길 기원합니다.

 

(1) 바울의 기쁨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복음 사역에 협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인하여 옥에 갇히는 고난을 당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는 간구할 때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항상” 기쁜 마음으로 간구하였습니다(1:4). 그 이유는 무엇이었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과 함께 “첫날부터 이제까지” 함께 기쁜 소식(복음)을 변호하고(7절) 전하는데 참여(협력)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5절). 이렇게 바울은 자기와 함께 협력하여 복음 전하는 사역에 참여하고 있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자기처럼 대적자들로 인하여 고난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에 주님 안에서 기뻐한 것입니다(28-30절).

 

(2) 바울의 기쁨은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옥에 갇히는 고난을 당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그는 “…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말하였습니다(18절). 바울은 자기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형제들 중 다수가 주님 안에서 신뢰함으로 겂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고(14절) 또 다른 이들은 바울의 매임의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고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지만(17절) “그릇된 동기에서든 참된 동기에서든 어쨋든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이므로 (18절, 현대인의 성경) 그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였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그리스도로 인하여 기뻐하였고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므로 기뻐하였습니다.

 

(3) 바울의 기쁨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믿음과 기쁨의 진보입니다.

바울은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고 그리 원했지만(23절) 그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25절) 자기가 이 세상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이 더욱 필요한 줄 알았습니다(24절,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그는 빌립보서 2장 17-18절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의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 생명의 피를 제사 술처럼 따라 붓는다고 해도 나는 기뻐하고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

 

(4) 바울의 기쁨은 빌립보 교회가 사랑으로 한 공동체로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서로 격려하고 서로 위로하며 서로 친절과 동정을 베풀면서 성령님으로 교제하는 것(2:1), 그들이 한 마음 한뜻으로 같은 사랑을 가지고 하나가 되는 것을 기뻐하였습니다(2절)(현대인의 성경). 빌립보서 2장 1-2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은 서로 격려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위로하며 성령으로 교제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서로 친절과 동정을 베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한마음 한뜻으로 같은 사랑을 가지고 하나가 되어 내 기쁨을 충만하게 하십시오”(현대인의 성경).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 아닌가요? 가정에 적용할 때 우리 부모님들의 마음은 자녀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서로 사랑하면서 하나가 되어갈 때 얼마나 기쁩니까.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주님께서 주님의 몸 된 교회 식구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같은 사랑을 가지고 하나가 되어 갈 때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이러한 기쁨이 있을 때 우리 모두가 주님 안에 굳게 서 있지 않을까요?

 

(5) 바울의 기쁨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자기가 희생하는 것을 기뻐했습니다(2:17). 이것이 우리의 기쁨이 돼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며 사모하는(1:8) 형제, 자매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25절) 우리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2:17).

우리가 주님 안에서 굳게 서있기 위해선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기 위해선 주님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돼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기쁨은 주님의 몸 된 교회 모든 식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쁨은 우리 모두가 복음 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이 성장할 때에 기뻐하십니다. 그러한 주님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돼야 합니다. 또한 온 교회 식구들이 주님 안에서 한 마음, 한 뜻으로 서로 사랑하며 겸손히 섬기며 주님 안에서 화목할 때 주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이러한 기쁨이 우리에게 있길 기원합니다.

 

마지막 넷째로, 우리가 주님 안에서 굳게 서기 위해선 우리는 모든 사람을 너그럽게 대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5절을 보십시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현대인의 성경) “모든 사람을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왔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관용”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네이버 사전을 보면 관용이란 “남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함”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네이버 사전). 저는 “관용”이란 단어를 생각할 때 적어도 두 가지 위험한 관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첫째로 위험한 관용이란 바로 성적 관용입니다.

 

그리고 제가 말하고자 하는 성적 관용은 바로 동성애에 대한 관용을 말합니다. 적어도 우리 1세대 어른들은 동성애가 죄라는 사실을 알고 동성애가 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 2세대 젊은이들은 동성애자들은 우리와 다른 그들만의 생활방식(lifestyle)이니까 존중하고 관용(tolerance)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요즘 같은 세상에서 동성애를 완전한 생활의 형태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편견에 가득 찬 소인배 취급을 당하거나 “동성애혐오자”(Homophobic)라고 불립니다. 또한 누군가 남녀 간의 결혼만이 정상이고 합법적이라고 주장하면 구시대적이고, 억압적이고, 현대 문화에서 완전 벗어난 사람이라고 맹렬히 공격을 당합니다(인터넷). 안 그래도 얼마 전에 유명한 필리핀 권투선수가 동성에 대한 발언을 했다가 많은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는 소셜 미디어에 올렸던 사과문을 내리고 동성애가 잘못된 것이라는 자신의 발언에 대한 근거가 되는 성경구절들을 올렸다가 또 다시 비난과 언론의 난타를 당하였습니다(인터넷).

 

(2) 둘째로 위험한 관용이란 바로 종교적 관용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시대에 기독교가 처한 큰 위험과 위기는 무엇보다 종교적 관용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인터넷). 화해, 일치, 화평, 하나됨, 나눔 등이란 명분 아래 기독교 지도자들이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 만나 일치 운동 같은 것을 보면 이 종교적 관용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다른 종교에서는 인간의 노력 등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고 있다면 어떻게 기독교와 다른 종교들이 하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두 가지 위험한 관용을 생각할 때 관용도 진리 안에서 해야지 진리 밖에서 하는 관용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관용이란 진리의 테두리 안에서 행해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5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내려가면서 그들에게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관용”이란 헬라어 원어의 의미는 ‘법이나 관습의 모든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것’(BDAG) 또는 ‘양도하다, 배려하다’(gentle, considerate)는 뜻입니다(Swanson). 이 단어가 오늘 본문 외에 신약에 몇 군데 더 나옵니다. 예를 들어, 디모데전서 3장 3절을 보면 바울이 감독의 자격에 대하여 말하면서 감독은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 관용을 베푸는 교회 지도자는 다투지도 아니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관용을 베푸는 것과 다투는 것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슷한 말씀이 디도서 3장 2절에 나옵니다: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이 말씀에서도 바울은 다투지 말라는 말씀과 관용하라는 말씀을 함께 말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바울은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관용하는 자는 다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온유함을 나타내는 자[모든 사람을 부드럽게 대하는 자(현대인의 성경)]라는 말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이 “관용”이란 단어를 베드로전서 2장 18절에서 사용하였습니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현대인의 성경) “종들은 두려움으로 주인에게 복종하십시오. 선하고 너그러운 주인에게만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그렇게 하십시오”]. 이 말씀을 현대에 적용한다면 직장에서 종업원이 선하고 관용하는(너그러운) 고용주에게만 두려움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까다로운 고용주에게도 그리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관용하는 고용주와 까다로운 고용주를 대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관용하는 자란 까다롭지 않은 자란 의미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성경은 “관용하는 자”를 “너그러운 주인”으로 번역했습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5절도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너그럽게 대하십시오.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왔습니다.”

 

교회 안에서 형제, 자매들이 주님 안에서 굳게 서기 위해선 서로를 너그럽게 대해야 합니다. 특히 사도 바울은 디모데전서 3장 3절과 디도서 3장 2절에서 말한 것처럼 교회 지도자들은 서로 다투지 말고 관용하며 서로를 부드럽게(온유함으로) 대해야 합니다. 그런데 빌립보 교회 안에서는 두 여인인 유오디아와 순두게(빌4:2)가 그리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내려가면서 그 두 여인의 이름까지 언급하면서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주님 안에서 사이좋게 지내십시오)고 강력하게 권면한 것입니다(2절).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관용(너그러우심)”입니다 (고후10:1). 그리고 이 그리스도의 관용은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입니다. 성경 야고보서 3장 17절을 보십시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그런 후 이렇게 오늘 본문 빌립보서 4장 5절에 와서는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현대인의 성경) “모든 사람을 너그럽게 대하십시오”]고 말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 왔기 때문입니다(5절하). 우리 온 교회 식구들이 주님 안에서 굳게 서기 위해선 우리는 서로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너그럽게 대해야 합니다. 그리하되 우리는 주님께서 오실 날이 가까이 왔다는 재림이 관점을 가지고 주님의 말씀대로 서로를 너그럽게 대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교회 식구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너그럽게 대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안에 굳게 서십시다. 이렇게 주님이 오실 날이 가까운 이때에 우리는 주님 안에서 굳게 서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 모든 식구들이 믿음의 반석 위에 견고히 서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서로 도와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너그럽게 대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 굳게 서 있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주님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고 서로 도우면서 주님 안에서 기뻐하며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게 대하는 삶을 추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