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나를 본받으십시오

 

 

 

[빌립보서 317-21]

 

 

오늘 우리는 2015년 마지막 달인 12월 첫째 주일 하나님의 전에 올라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금년을 시작하면서 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것은 “고린도후서 5장 7절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We live by faith, not by sight). 우리 온 교회 식구들이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여 “오직 말씀, 오직 믿음”으로란 표어를 내걸고 이렇게 오늘 여기까지 왔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2015년 마지막 달을 맞이하여 금년 한해를 뒤돌아보면서 우리 모두가 금년도 표어대로 오직 말씀, 오직 믿음으로 살아왔는지, 과연 우리가 금년도 목표대로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왔는지를 뒤돌아보는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그러므로 금년 한해를 하나님 앞에서 잘 마무리하기를 원합니다. 물론 저는 이것이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루를 잘 마무리하는 것도 힘든데 한 해를 잘 마무리한다는 것은 큰 도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로 시도를 하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금년 한 해를 뒤돌아 볼 때에 오직 믿음으로 살지 못했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오히려 저는 보이는 것, 상황과 환경에 치우쳐서 의심하며 심지어 불신까지 한 적이 많았던 한해라고 생각합니다. 한 면으로 생각하며 부끄럽지만 또 다른 면으로 생각하면 저의 연약한 믿음과 믿음 없음을 들춰내 주신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여겨집니다. 이러한 목사가 금년 한 해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으니 여러분에게도 죄송한 마음입니다. 제가 먼저 오직 말씀,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본을 보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던 것을 고백합니다. 특히 지난 몇 주 동안 “믿음이 성숙한 사람들이 되십시다”라는 제목 아래 빌립보서 3장 15-16절 말씀을 여러 차례 걸쳐서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선포한 것, 그것이 저의 작은 심정입니다. 즉, 제 자신부터 믿음이 성숙한 사람이 되고 싶고 또한 여러분도 믿음이 성숙한 사람들이 되시길 기원하여 함께 믿음이 성숙한 사람들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설교 제목을 “믿음이 성숙한 사람들이 되십시다”라고 정했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님을 바라보십시다(히12:2)(Let us fix our eyes on Jesus, the author and perfecter of our faith). “그분은 장차 누릴 기쁨을 위하여 부끄러움과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셨”습니다(2절, 현대인의 성경). 우리도 예수님을 본 받아 우리 모두가 장차 누릴 기쁨을 위하여 현재의 부끄러움과 우리 각자가 지고 있는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십시다. 믿음으로 견디며 인내하면서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십시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 모두가 추구할 것은 예수님을 본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더욱더 본받는 우리가 되길 기원합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17절을 보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통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여러분은 나를 본받으십시오”란 제목 아래 과연 우리가 바울에게 본받아야 할 점들이 무엇인지 한 3가지로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바울은 자기를 본받으라고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17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현대인의 성경)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나를 본받으십시오. 그리고 우리를 본받아 생활하는 사람들을 지켜보십시오"]. 당신은 당신이 본받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있으면 왜 당신은 그 사람을 본받고 싶은 것입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본받고 싶은 이유는 아마도 그 사람을 존경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람을 존경하는 이유는 각자 다 다를 것입니다. 어느 한 인터넷 웹사이트를 보니까 존경하는 인물과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어서 나눕니다(인터넷):

 

<베토벤> 열정을 쏟아 부어 얻어낸 악성 타이틀

<앤드류 카네기> 함께 나눌 줄 아는 비즈니스맨

<록펠러> 관용은 과거에 대한 용서인 동시에 미래에 대한 투자

<윈스턴 처칠> 적을 한 순간에 내편으로 만드는 여유와 위트

<벤저민 프랭클린> 인생을 사랑한다면 시간을 낭비하지 말자.

 

저는 개인적으로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중에 바울을 본받고 싶습니다. 제가 그를 본받고 싶은 마음이 들기 시작한 것은 신학교에 들어가서 신학공부를 하다가 신약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편지들에 대해서 배우다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제가 바울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그분이 쓴 편지들을 통하여 그가 예수님을 믿고 변화되어 주님이 주신 사명에 불타올랐는지 조금이나마 엿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저도 그분처럼 사명에 불타오르는 사역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17절을 보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미 빌립보서 2장 5-11절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강력히 권고하였는데 이렇게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17절에 와서는 자기를 본받으라고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Melick). 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말했다가 이렇게 오늘 본문에서는 자기를 본받으라고 말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전서 11장 1절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17절에서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여러분은 나를 본받으십시오”라고 강력히 권면하였는데 그 뜻은 무엇이며 그가 그리 강력하게 권면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 대답을 우리가 이미 묵상한 빌립보서 3장 15-16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먼저,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자기를 본받으라고 한 말의 뜻은 자기처럼 ‘믿음이 성숙한 사람이 되라’는 의미입니다(15절, 현대인의 성경). 그가 그리 말한 이유는 빌립보 교회 안에는 믿음이 성숙한 자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믿음이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빌립보 교회 성도들 중에는 바울과 빌립보 교회 안에 있는 믿음이 성숙한 사람들처럼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바울은 그들을 염두해 두고 “여러분은 나를 본받으십시오”라고 권면한 것입니다(이미 믿음이 성숙한 성도들은 바울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그를 본받고 있었기에). 그런 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17절 하반절에서 이렇게 권면하였습니다: “... 그리고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보라.” 무슨 뜻입니까? 바울은 오늘 본문 17절 상반절에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권면한 후 이렇게 17절 하반절에 와서는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우리”란 누구를 가리킵니까? “우리”란 바로 바울과 더불어 경건의 모범을 보여준 빌립보서 2장에서 이미 언급한 디모데(2:19-22)나 에바브로디도(25-30절)를 가리킵니다. 그러면 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자기뿐만 아니라 특별히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도 본받으라고 권면한 것일까요? 디모데의 경우에는 그 이유는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일을 구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2:21). 이 의미는 2가지입니다:

 

(1) 디모데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하는 자였습니다.

 

성경 빌립보서 2장 20절을 보십시오: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본받으라는 디모데란 인물은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바울과 “뜻을 같이”한 사람(같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바울과 디모데가 함께 품고 있었던 마음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이었습니다(5절). 그 마음은 자기 자신을 낮추고 주님께 죽기까지 복종하는 마음입니다(8절). 사도 바울과 디모데는 주님께 보냄을 받은 자들로서 그들은 자기들을 보내신 주님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려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들은 같은 마음을 품을 수 있었고 또한 뜻을 같이 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디모데야 말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라고 믿었기에 그를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보내고자 하였습니다(20절). 여기서 “진실히”(genuinely)란 말은 “아들에게 대한 아버지의 성실함을 의미”합니다(박윤선). 마치 아버지가 아들의 사정을 성실히 생각하듯이 디모데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사정을 성실히 생각할 자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디모데도 본받으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2) 디모데는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는 자였습니다.

 

성경 빌립보서 2장 22절을 보십시오: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여기서 성경 개역개정은 “디모데의 연단”이라고 번역하였고 현대인의 성경은 “디모데의 훌륭한 인품”이라고 번역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연단” 또는 “훌륭한 인품”이란 헬라어 단어의 의미는 ‘시험을 통하여 인정을 받다’(Pfeiffer)]라는 의미입니다. 디모데는 시험 또는 연단을 통하여 그의 인품이 훌륭하다고 인정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인정받되 어쩌면 디모데는 “환난의 많은 시련”(고후8:2)을 겪고 믿음으로 인내하여(롬5:4) 그 시련을 통과하므로 그 인품이 단련되었기에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훌륭한 인품을 가진 자로 인정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알고 인정하는 디모데의 훌륭한 인품은 바로 빌립보서 2장 20절에 바울이 말한 ‘진실함’이었습니다(빌2:20). 이러한 진실하고 훌륭한 인품을 가지고 있었던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습니다(22절).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디모데도 본받으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그러면 에바브로디도의 경우는 무엇이었습니까? 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자기뿐만 아니라 에바브로디도도 본받으라고 권면한 것일까요? 그 이유는 3가지입니다: (a)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빌립보 교회의 사자로서 바울의 쓸 것을 돕는 자였습니다(25절). (b)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간절히 사모하였고 또한 심히 근심하였습니다(26절). (c) 에바브로디도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까지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자였습니다(30절).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의 동역자들인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본받아 생활하는 사람들을 눈여겨(지켜)보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여기서 ‘눈여겨보다’(mark)라는 단어의 의미는 ‘갈망(바람)이나 흥미를 가지고 무엇인가 또는 누구엔 가에 집중(주목)하라(to fix the attention upon with a desire for or interest in)는 뜻입니다(Wuest). 이 단어는 빌립보서 2장 4절에도 나옵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여기서 ‘돌보다’(look to)란 단어가 바로 그 단어입니다. 즉, 다른 사람들을 돌보라는 말씀은 그들에게 관심과 흥미를 가지고 집중(주목)하라는 말입니다(SeVincent).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자기와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가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신들의 삶의 모범(pattern)에 그 성도들이 집중(주목)하여 본받길 원하였습니다(MacArthur). 한 마디로, 간략하게 말한다면 바울은 모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자기와 자기의 동역 자들의 그리스도 중심된 삶의 패턴에 집중하여 거울로 삼고 그렇게 살라고 권면한 것입니다(참고: 살전1:7, 고전10:6).

 

우리가 거울로 삼고 있는 신앙의 롤 모델은 누구입니까? 과연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분은 누구입니까? 그 분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새찬송가 463장 “신자 되기 원합니다” 4절 가사가 우리의 소원기도가 되야 합니다: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진심으로 예수 닮기 원합니다 진심으로.” 그런데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육의 눈으로 예수님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는 죽음에서 부활하사 승천하시어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을 본받고 있는 바울과 같은 그리스도인을 우리의 신앙의 롤 모델로 삼고 본받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바울처럼 그리스도 중심된 삶을 살아가고 있는 신앙의 선배의 삶의 패턴에 집중하여 거울로 삼고 그 분처럼 살고자 힘써야 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도 언젠가는 바울처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처럼 여러분도 나를 본받으십시오”(고전11:1, 현대인의 성경)라고 사랑하는 신앙의 후배들에게 말할 수 있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바울에게서 본받아야 할 점은 그는 눈물을 흘렸다는 것입니다. , 우리는 바울의 눈물을 본받아야 합니다. 우리도 그처럼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18절을 보십시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에게 내가 여러 번 말했고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인터넷 조선일보 애틀랜타에 실린 사설 칼럼 중 “여자가 눈물 흘릴 때”란 제목의 기사가 있어 읽어보았습니다(인터넷). 그 기사 내용에는 보통 여자들은 남자보다 눈물이 많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여자가 남자보다 슬픈 상황에서 우울함을 전달하는 신경세포의 활동이 8배로 눈물 분비를 돕는 프로락틴 호르몬도 많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머니의 눈물, 아내의 눈물을 보는 것입니다. 여자는 이유 없이 우는 경우도 있고 작은 일로 울기도 하고 또한 보호를 위한 본능으로 울고 짜증과 스트레스를 해소하려고 생리적인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고 말하면서 과연 눈물이 유익한 것인지 무익한 것인지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실제 눈물은 치료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울고 나면 기분이 전환되며 상당한 스트레스가 털린다고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유익한 눈물과 무익한 눈물을 구분할 때 먼저 무익한 눈물이란 하품하면서 흘리는 눈물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는 없지만 제가 흘리고 싶은 유익한 눈물이 있습니다. 그 유익한 눈물이란 바로 3가지입니다. 그 3가지 눈물이란 바로 회개의 눈물, 감사의 눈물, 헌신의 눈물입니다. 그런데 이 3가지 유익한 눈물도 내 자신이 흘리고 싶어서 흘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감동, 감화, 역사하셔야 그 유익한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런데 이 3가지 눈물 외에도 우리가 성경에서 볼 수 있는 눈물이 있습니다. 그 한 예로 ‘기도의 눈물’이 있습니다. 이사야 38장을 보면 유다 왕 히스기야는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그에게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1절)는 말씀을 듣고 얼굴을 벽으로 향하여 하나님께 심히 통곡하며 간구하였습니다(2-3절). 그 결과 하나님의 기도 응답은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께서는 기도의 눈물을 흘렸던 히스기야의 수한을 15년을 더해주셨습니다(5절). 또 다른 예는 사무엘상 1장에 나오는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의 기도입니다. 그녀는 마음이 괴로워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통곡하였습니다(10절).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눈물의 간구를 기억하시고(19절) 허락하시사(17절) 그녀에게 사무엘이란 아들(20절)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나에게 사무엘뿐만 아니라 다른 6명의 자녀들도 선물로 주셨습니다(2:5). 이러한 ‘기도의 눈물’ 외에도 성경에는 ‘사랑의 눈물’이 있습니다. 제일 좋은 예가 바로 성경에서 제일 짧은 구절인 요한복음 11장 35절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Jesus wept). 여러분, 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까? 그 이유는 나사로가 죽은 후 그의 여동생인 마리아가 우는 것과 또 그녀와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33절).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로마서 12장 15절 하반 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예수님께서는 울고 있었던 마리아와 온 유대인들과 함께 우셨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귀한 눈물입니까. 우리도 이러한 눈물을 흘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18절을 보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편지를 써내려가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에게 내가 여러 번 말했고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는데 그것도 오늘 본문에서 한번만 말한 것이 아니라 “여러 번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하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에 대해서 여러 번 말한 것을 보면 그에겐 매우 중요하고 심각한 이야기라 생각됩니다. 특히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눈물을 흘리면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간곡히 권면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은 사도행전 20장 31절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0장 31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현대인의 성경) "그러므로 여러분은 정신을 바짝차리고 내가 3년 동안이나 밤낮 쉬지 않고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이 말씀은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청하여 그들에게 한 말입니다(17절). 그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3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각 사람을 눈물로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권면한 이유는 바울은 자기가 에베소를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 즉 그릇된 것을 가르치는 거짓 선생들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들어와 그들을 아끼지 아니하며 그들 중에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29-30절). 그릇된 것을 가르치는 거짓된 선생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입니다(빌3:18).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이 가르쳤던 그릇된 가르침은 바울이 선포한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와 반대되는 유대주의 자들이 가르쳤던 모세의 율법을 지켜 행하므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거짓이었습니다. 이러한 거짓에 속아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사람들이 빌립보 교회 안에도 “여러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18절).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에 복음의 원수들이 있음을 생각하고 큰 근심을 품고” 울었던 것입니다(박윤선).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용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게 하시므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는데 이제 와서 그들이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만이 아니라 착한 일을 하고 인간의 노력과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거짓말을 믿고 있다면 여러분은 바울처럼 큰 근심을 품고 울지 않겠습니까. 특히 바울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 3년 동안이나 헌신하여 밤낮 쉬지 않고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눈물로 훈계하였는데 자기가 그 교회를 떠난 후에 그릇된 것을 가르치는 거짓 선생들이 그들에게 들어와서 그들을 아끼지 아니하며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미혹하여 복음을 떠나 거짓을 따르게 할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마 이 상황을 좀 더 피부로 느끼기 좋은 예는 가정에서 우리 부모님들이 사랑하는 자녀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최선을 다하여 가르치고 양육하였는데 그들이 나이가 되어 부모를 떠다 독립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고 신앙을 떠나고 교회를 떠났을 때 부모님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큰 근심 속에서 눈물로 하나님께 간구하여 눈물로 자녀를 권면하고 훈계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18절에서 사랑하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여러 번” 말한 후에 또 다시 눈물을 흘리면서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현대인의 성경)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 후 바울은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19절에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에 대해서 한 4가지로 말하였습니다:

 

(1)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19절을 보십시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현대인의 성경)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 무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대적하여 인간의 노력과 행함인 모세의 율법을 지켜 행하므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그릇된 것을 가르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의 마지막(결국)은 영원한 멸망(eternal damnation)이라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익히 들어 아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고 인간의 노력과 모세의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는 자들이 영생을 얻겠습니까 아니면 멸망하겠습니까. 성경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과 선행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이요 성경은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빌3:19).

 

(2)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은 육체의 욕망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습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19절을 보십시오: “... 그들의 신은 배요 ...”[(현대인의 성경) "... 그들은 육체의 욕망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 ...“]. 무슨 말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은 자기 자신들의 육체적인 욕망과 절제할 수 없는 폭식(과식)만을 생각하고 있다는 말입니다(Walvoord). 바울은 이러한 자들에 대하여 로마 교회에 쓴 편지인 로마서에도 언급을 하고 있는데 그들을 가리켜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롬16:18). 이렇게 자기들의 배만 섬기는 자들은 “육체의 정욕대로 살"아갑니다(벧후 2:10). 그들은 마치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12절) “악한 짓”을 하되(13절) 그들은 대낮에도 “흥청대는 것을 낙으로 여기며” 사람들을 속이고 “쾌락을 즐기는 더러운 사람들”입니다(13절). 또한 이들의 “눈은 음란으로 가득차서 끊임없이 죄를 짓”으며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꾀어 욕심을 채우는데 단련된 저주받은 자식들”입니다(14절). “그들은 바른 길을 버리고 잘못된 길에 빠져” “악한 방법으로 얻는 재물을 사랑”합니다(15절). “그들은 헛된 말로 자랑하며 잘못된 길에서 겨우 빠져나온 사람들을 육체의 정욕으로 꾀어 죄를 짓게 합니다”(18절). 또한 그들은 “사람들에게 자유를 준다고 하면서 자신들은 멸망의 종이 되어 있습니다(19절).

 

(3)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은 수치를 영광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19절을 보십시오: “...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현대인의 성경) “... 수치를 영광으로 알며 ...”]. 무슨 말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지 않고 모세의 율법을 지켜 행하므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과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은 그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것이 자기들의 수치요 또한 육체의 욕망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 육체의 정욕대로 살아가는 것 또한 자기들의 수치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자기들의 영광으로, 자랑으로 삼았다는 말입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죄를 회개하지 않고 도리어 죄를 좋게 여기고 교만하니 그것은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죄를 영광으로 여김이다.“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어떻게 죄를 좋게 여길 수 있을까요? 어떻게 죄를 부끄러워하기보다 죄를 영광으로 여길 수 있을까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은 죄의 수치를 죄의 영광으로 여깁니다. 성경 다니엘 12장 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들도 있겠지만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말씀을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19절에서 바울이 말한 “수치를 영광으로” 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에게 적용한다면 그들은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4)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은 세상적인 일만을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19절을 보십시오: “...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현대인의 성경) “세상적인 일만 생각합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3장 2절에서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하였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은 땅의 것을 생각합니다. 그들은 육체의 욕망을 자기들의 신으로 섬기므로 결코 위의 것을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세상적인 일만 생각하며(빌3:19) 세상 것들에 애착합니다(박윤선). 사도 요한은 요한 1서 2장 16-17절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신의 정욕과 눈의 욕심과 삶에 대한 자랑은 모두 아버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세상도 그것에 대한 욕망도 다 지나가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히 삽니다"(현대인의 성경).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보다 자기 뜻(맘)대로 이 세상적인 것을 추구하되 그들은 육신의 정욕과 눈의 욕심과 삶에 대한 자랑을 추구합니다. 이 모든 것이 세상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 세상적인 것을 생각하고 추구하는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결국에 가서 영원히 멸망할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로, 우리가 바울에게서 본받아야 할 점은 그는 하늘 시민권 자로서 하늘에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렸습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20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현대인이 성경)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구주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곳에서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내려가면서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17절에서 자기를 함께 본받으라 또한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본받으라, 그리고 자기와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를 본받은 빌립보 교회 안에 성숙한 성도들을 눈여겨보라고 권면한 후 18절에 와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그런 후 이렇게 20절에 와서 사도 바울은 다시금 “우리”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자기나 디모데나 에바브로디도나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 모두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19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들(18-19절)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은 자기와 자기의 동역 자들과 빌립보 교회 성도들과 대조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대조를 하는 목적은 그들 중에 믿음이 미성숙하여 유혹에 넘어갈 위험이 있는 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여러 사람들”(18절)을 본받지 말고 이미 영생을 얻어 하늘의 시민권자로서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고 위의 것을 생각하며 하늘로부터 오실 구원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데 그들 또한 동참케 하고자 하려고 했던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고 우리는 지금 하늘에서부터 장차 오실 구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 후 오늘 본문 21절에서 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만물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으신 전능하신 주님께서 큰 권능으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 52-53절에서 말한 것이 아닙니까?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릴 때 눈 깜짝할 사이에 죽은 사람들이 썩지 않을 사람으로 다시 살아날 것이며 우리는 모두 변화될 것입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않을 몸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몸을 입을 수밖에 없습니다”(현대인의 성경).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 23절에서 말하고 있는 우리가 기다리고 있는 “우리 몸의 속량”(the redemption of our bodies)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3장 11-13절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모든 것이 이렇게 녹아 버릴 텐데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날이 속히 오기를 간절히 기다려야 합니다. 그 날에는 하늘이 불에 타서 없어지고 천체도 그 열로 녹아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정의만이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의 눈물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처럼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하며 기대하며 기다리는 것은 하늘에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우리는 홀연히 변화되어 주님의 영광의 몸의 형제와 같이 변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받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