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한 가지 일만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

 

 

 

[빌립보서 310-14]

 

 

당신이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이 한 가지 일만은 분명히 하고 싶으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저도 오늘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질문을 제 자신에게 던져 보았습니다. 그리했을 때 저는 제가 분명히 하고 싶은 한 가지 일을 3중으로 생각(threefold perspective)해 보았습니다. 그 3중 생각이란 바로 믿음, 사랑, 소망입니다.

 

첫째로, “믿음에 관하여서는 요한복음 629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제가 제일 우선시 하고 싶은 일은 바로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을 더욱더 알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저 또한 사도 바울처럼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고백을 하고 싶습니다(빌3:8). 또한 저는 사도 베드로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길 원합니다(마16:16). 저는 예수님을 알아가므로 바른 신앙고백을 하는 신앙인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계속애서 듣기를 원합니다(롬10:17).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므로 저에게는 믿음의 진보가 있길 원합니다(빌1:25). 그러므로 저는 보이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믿음으로 살아가길 원합니다(고후 5:7).

 

둘째로, “사랑에 관하여서는 마태복음 2237-4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예수님의 이중계명처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서 사는 삶을 살아갈 때에 제 마음도 천국화 되어갈 뿐만 아니라 가정도, 교회도, 이웃과도 천국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국 생활을 추구하는 저로서는 예수님의 이중계명을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마22:37-40). 그러나 육신이 연약하여 제 힘으로 사랑할 수 없음을 더욱더 깨달아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열매를 제 삶 속에서 더욱더 풍성히 맺어주시사 더욱더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시길 기원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소망에 관하여서는 시편 274절입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서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제가 전에 참 좋아했던 미국 복음성가 중에 “One Thing I Ask”(내가 구하는 것 한 가지)란 곡이 있습니다. 그 곡 1절만 제가 한국어로 번역해서 여러분 나눕니다: ‘내가 구하는 것 한 가지, 내가 찾는 것 한 가지 나는 주님, 당신의 집에 항상, 영원히 거하길 원합니다. 그리고 나는 주님, 당신을 보길 원합니다. 나는 한 가지를 구합니다. 나는 한 가지를 원합니다. 나는 당신을 보길 원합니다(3x). 이 시편 기자처럼 저도 하나님께 바라는 것 “한 가지 일”이 있습니다. 그 한 가지 일이란 곧 제가 평생에 하나님의 집에 살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하나님을 묵상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13-14절을 보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그것을 이미 얻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일만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나를 부르신 부름의 상을 얻으려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현대인의 성경)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개역개정)].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오직 한 가지 일만 분명히 하고 싶습니다”라는 제목 아래 우리가 해야 할 오직 한 가지 일은 무엇인지 묵상하면서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13-14절을 보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계속해서 써 내려가면서 “그러나 한 가지 일만은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현대인의 성경)(13절).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한 가지 일”은 무엇입니까? 그는 무슨 한 가지 일을 분명히 하고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는 것이었습니다(13b-14절). 바울이 분명히 하고 있었던 한 가지 일이란 바로 푯대 또는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달리기 선수가 경주할 때에 골라인(goal line)을 바라보면서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달려가는 것처럼 바울은 푯대(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바울이 달려가고 있었던 그 푯대(목표)는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that for which Christ Jesus took hold of me)(12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the upward call of God in Christ Jesus)(14절)이었습니다. 이 두 문구는 동일한 바울의 목표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목표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인 바울의 사명입니다. 바울은 이 사명에 붙잡힌바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내려가면서 자기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주신 하늘의 사명을 붙잡힌바 되어 그 사명을 완수하고자‘ 달려가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12, 14절).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던질 수밖에 없는 질문은 바울의 사명은 무엇이었느냐는 것입니다. 저는 바울의 사명이 2중(twofold)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즉, 바울의 사명은 한 가지이지만 그 한가지에는 마치 동전에 앞면과 뒷면이 있듯이 그의 사명에도 양면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의 사명의 한 면은 성경 사도행전 20장 24절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내가 달려갈 길을 다 가고 주 예수님에게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기쁜 소식을 증거하는 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바울의 사명은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기쁜 소식)을 증거하는 일이였습니다. 그는 이 일(사명)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 정도로 바울은 주 예수님께 받은 사명을 완성하고자 사명에 불타올랐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감에 불타올랐던 바울에게 있어서 사명의 또 다른 면은 바로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즉, 바울의 사명은 외부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였지만 내부적으로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므로 복음의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빌1:27).

그래서 그는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10절을 쓰기 시작하면서 “내가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현대인의 성경)[“I want to know Christ”(NIV)]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이미 묵상한 3장 8절에서 바울이 말한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말씀과 연관이 있습니다. 과거에 율법으로는 바리새인 이였던 바울은(5절) 율법에 대한 지식이 많았었지만 그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는 줄을 몰랐었습니다(갈3:24). 특히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많았었겠지만 바울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줄을 몰랐었습니다. 그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을 몰랐었습니다(참고: 행9:20). 그래서 그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 분의 도를 따르며 전하였던 그리스도인들을 열심히 박해하였습니다. 그러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인 “사울아 사울에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란 말씀을 들었을 때, 그리고 자기가 열심히 박해하던 그리스도인들의 주님이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되었을 때(20절), 그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빌3:8).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지식”이란 머리로만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intellectual knowledge about Him)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사용한 헬라어 단어(γνώσεως)를 보면 바울은 예수님을 “경험적으로” (experientially) 또는 “개인적으로” (personally)아는 것을 말합니다(참고: 요10:27, 17:3; 고후4:6; 요일5:20). 또한 이 지식이란 그리스도와 나누는 삶과 동등합니다(갈2:20).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아는 것(암3:2)과 그들이 하나님을 알므로 사랑하며 순종하는 것과 일치합니다(렘31:34, 호6:3, 8:2).

 

바울이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그에게는 두 가지 목표가 있었습니다. 이 두 가지 목표도 한 목표의 양면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얻”는 것(8절)과 “그 분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현대인의 성경)[“그 안에서 발견 되”는 것(개혁개정)](9절) 이었습니다. 바울은 전에 몰랐던 그리스도를 얻길 원하였고 또한 그는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 곧, 참으로 의를 얻은 상태”에 이르길 원하였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영적 연합으로 인하여 이미 의를 얻은 상태였습니다. 즉, 바울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영적으로 연합하여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이미”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의를 얻은 상태였지만 온전(완전)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직도” 예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참으로 의를 얻은 상태가 장차 다가올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간절히 원하였기에 그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자기가 신뢰하던 육체의 것들인 모든 것을 해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배설물로 여겨 버렸습니다(8절).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우리가 분명히 하고 싶어야 하는 오직 한 가지 일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 사명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과 그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홀로 가신 그 길 나도 따라 가오

모든 물과 피를 흘리신 그 길을 나도 가오

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 바다 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아버지 나를 보내주오 나는 달려가겠소

목숨도 아끼지 않겠소 나를 보내주오

 

험한 산도 나는 괜찮소 바다 끝이라도 나는 괜찮소

죽어가는 저들을 위해 나를 버리길 바라오

아버지 나를 보내주오 나는 달려가겠소

목숨도 아끼지 않겠소 나를 보내주오

세상이 나를 미워해도 나는사랑하겠.소

세상을 구원할 십자가 나도 따라 가오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나를 사랑한 당신

이 작은 나를 받아주오 나도 사랑하오 ”

 

[복음성가 “사명”]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로서의 책임, 즉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의인의 삶은 버리고 또 버리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빌3:7, 8). 동시에 의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더 알기를 원합니다(10절). 그 이유는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므로 복음의 합당한 삶을 살아가길 원하기 때문입니다(1:27). 이렇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므로 복음의 합당한 삶을 살고자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하였는데(3:10) 여기서 그가 알기를 원했던 가장 고상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무엇이었습니까? 한 3가지로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10절은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길 원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며 …”(현대인의 성경). 여기서 바울이 체험하고 싶어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the power of his resurrection)은 무엇입니까?

 

한 2주 전 수요기도회 때 원로 목사님께서 로마서 8장 10-11절 말씀 중심으로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는 제목 아래 선포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그 때 저는 그 말씀을 받고 목양실에서 원로 목사님의 설교를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언제가 우리는 다 죽을 것입니다(전도서 7:2). 우리는 몸과 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로마서 8:10). 즉, 우리의 몸은 "죽을 몸"입니다 (11절).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우리의 영도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한 사람 아담의 죄(원죄) 때문입니다(5:12).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지만 영은 살았습니다(8:11). 우리가 죽게 되면 몸은 흙으로 다시 돌아가지만 우리의 영은 천국으로 들어갑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사 잠자는(죽은)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고전15:20).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므로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23절)인 우리 예수님을 믿는 자들(육체적으로 죽은 자들)도 부활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롬8:11). 부활은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이기에(11절). 우리는 반드시 부활할 것입니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질 때(고전 15:52), 예수님께서 강림하실 때에(23절),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한 몸과 같이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빌3:21, 참고: 요일3:2).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주님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돼야 합니다(고전15:58).”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구원과 사명을 받은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길 원한다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가 체험하길 원하였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은 바로 성부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하여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것처럼 동일하신 성령님이 예수 그리스를 믿는 바울에게도 거하시기에 그는 동일하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을 체험하길 원했습니다(롬8:11). 그가 그리 원했던 이유는 바울은 “이미”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의를 얻은 상태였지만 “아직도” 누리지 못하고 있었던 장차 다가올 예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참으로 의를 얻은 상태에 이르기를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나팔”이 울려 퍼질 때 우리는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할 것입니다(고전15:51). 우리는 더 이상 연약한 몸, 썩을 몸, 죄는 짖는 몸을 입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홀연히 변화하여 강한 몸, 썩지 않을 몸, 영광스러운 몸을 입을 것입니다(42-44절, 52-54절). 주님께서는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실 것입니다(빌3:21). 마지막 날에 주님 안에서 잠자는 자들도 부활하여 영광스러운 영적인 몸을 입고 우리 모두다 함께 영원한 하늘나라에 올라가 영원히 주님과 함께 거할 것입니다(살전4:17). 이 부활의 영원한 소망을 가진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도 바울처럼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예수님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길 사모하는 우리가 되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길 원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10절을 보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 그의 고난에 참여하고 …”(현대인의 성경). 그리스도를 바로 알기 원했던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길 원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둘째로 사도 바울이 알기를 원했던 가장 고상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왜 우리는 고난을 당해야 하는 것인가요? 2014년 10월 11일 토요일, 우리 교회 영어사역에 참석했었던 가연(Kelly) 자매의 사랑하는 둘째 딸 Eloise가 수영장에 빠져 죽을 뻔하다 살아났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가연 자매는 자기의 딸이 온 몸은 시퍼렇게 되어 물 위에 떠 있는 것을 보고 충격 속에 있었을 때 한 외국인이 그 딸을 건져주고 CPR을 해줬었습니다. 그 때 가연 자매는 옆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 사랑하는 아이는 죽을 뻔하다 살아났다고 가연 자매는 울면서 저에게 전화로 알려 주었습니다. 그 때 Eloise가 중환자실에 있었을 때 병원 침대에 앉아 있는 아이의 사진을 저에게 카카오톡으로 보내면서 또한 자매의 간증도 보내왔었습니다. 그 간증의 결론은 "결국 모든 답은 예수 그리스도 ..."였습니다. 그 때 제가 좀 놀랬던 것 중 하나는 그 일이 일어나기 약 이틀 전 목요일(9일) 새벽 기도회 때 마태복음 14장 24절 말씀 중심으로 물에 빠져가는 베드로를 즉시 건져 주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묵상했었습니다. 그 묵상의 결론은 하나님께서 우리는 허락하시는 '고난의 목적'은 하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고 바른 신앙 고백을 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인지 좀 이해가 되십니까? 혹시나 여러분이 지금 고난 중에 계시다면 한 3 가지 권면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1) 고난은 우리에게 유익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 시편 119편 71절을 보십시오: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 고난의 유익이란 (a) 나의 그릇 행함을 깨우쳐 주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67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 우리는 고난이 있기 전까지는 내가 그릇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주님이 허락해 주시는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마치 잘못된 길로 가는 양을 양치기 소년이 막대기로 쳐서 바른 길로 걷게 하듯이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주님은 고난이라는 막대기를 사용하시사 비뚤어가는 우리를 바른 길로 걷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b) 고난의 유익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게 합니다. 시편 119편 67절을 보십시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니이다.”

 

(2) 고난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게 만드는 유혹이 될 수도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더 가까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이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간구하며, 그 말씀을 지키므로 그 말씀을 여러분의 소유로 만들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시 119:49-56).

 

(3) 고난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단련하시는 도구일 수도 있습니다.

 

대장장이가 은에서 찌꺼기를 제하려고(잠25:4) 은을 용광로에 넣고 높은 열을 가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을 연단하시려고(17:3) 우리를 "고난의 풀무 불"에 넣으시사(사 48:10) 우리를 단련하십니다(욥23:10). 그 목적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쓸 만한 그릇으로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잠25:4). 그 목적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그릇, 곧 거룩한 "귀히 쓰는 그릇"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딤후2:21).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길 원했습니다(빌3:10). 흥미롭지 않습니까? 다메섹 도상에서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후 3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 열심히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므로 그들에게 고난과 고통을 주었던 핍박 자가 이젠 예수님을 믿고 나서는 자기가 핍박했던 그리스도인들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길 원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바울의 심경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기에 이렇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길 원하였을까요? 저는 그 대답을 빌립보서 1장 29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즉, 바울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길 원하였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자로서 그 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인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지금 나는 여러분을 위해 받는 고난을 오히려 기뻐하며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인 교회를 위해 받으신 고난에 남은 부분을 내 몸으로 겪고 있습니다”(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예수님처럼 교회를 위하여 고난을 우리 몸으로 겪고 있을 때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위로는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고난을 당하신다는 사실(롬8:17)과 어느 누구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사실(35, 39절)입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 기도하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1:3-5). 그러면서 그는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로서 그 분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라고 권면하였습니다(29절). 여기서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참예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 후 바울은 오늘 본문 3장 10절에 와서는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기 원하여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고 싶다고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을까요? 저는 적어도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1) 첫째 이유는,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므로 순종함을 배우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성경 히브리서 5장 8절을 보십시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2) 둘째 이유는, 바울은 “지금 우리가 받는 고난은 앞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롬8:18, 현대인의 성경).

 

우리도 고난을 통하여 순종함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순종함을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호1장). 또한 우리도 현재의 고난보다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해야 합니다.

 

셋째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길 원하였습니다.

 

성서 이후의 종교 입문서들 제일선의 자리를 차지하는 책 3권이 있습니다. 그 3권은 바로 어거스틴의 “참회록”과 죤 번연의 “천로역정” 그리고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란 책입니다.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란 책의 제 23장 “죽음을 명상하는 것에 대해”를 보면 저자는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하루하루를 오늘 죽음을 피하는 것보다 죄를 피하는 것이 더 쉽다. 또한

불행하게도 오래 살수록 우리의 죄는 더 늘어나기 쉽다. 죽는 것이 두렵다면,

오래 사는 것이 더 두려운 일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항상 죽음을 준비하라

(눅21:36). 죽음의 날에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고자 노력했던 사람은 지혜롭고

축복받은 자이다. 자신의 영혼을 구제하는 일을 나중으로 미루지 말고, 친구들

이나 이웃들에게 의존하지 말라.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있는데도 최선을 다해

살지 않는 것은 너무도 유감스러운 일이다. 죽음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려면

회개함으로 육신을 복종시켜라. 죽을 때 누가 그대를 기억할 것이며, 누가

기도해 주겠는가? 그러므로 나의 친구여, 지금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행하라.

시간이 있을 때 자신을 위해 영원한 부를 축적하라(눅12:33). 오로지 구원에

관해 생각하고, 하나님의 것들에 대해서만 관심을 쏟으라. 죽은 후에 그대의

혼이 기쁘게 하나님께로 합일될 수 있도록 나아가라”(인터넷).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10절을 보십시오: “내가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며 그의 고난에 참여하고 그분의 죽음을 본받아”(현대인의 성경).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길 원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한 2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Walvoord): (1) 그리스도가 죄를 위하여(for sin) 죽으신 것처럼 바울은 죄에 대하여(to sin) 죽은 자로서(롬6:2, 6-7, 골3:3) 예수님을 믿기 전에 옛 사람의 죄악 된 삶으로부터 잘라내되 매일 삶 속에서 죄의 삶에 분리된 삶을 사는 것입니다(롬6:1-4, 11-14). (2) 그리스도가 복음을 전하시다가 죽으신 것처럼 바울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죽겠다는 것입니다. 즉, 그는 유익한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 20-21절을 보십시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이 유익한 죽음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처럼(2:8) 바울 또한 주님의 뜻에 죽기까지 복종하고 싶다고 말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고 싶다고 말한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또한 그리스도의 복음의 합당한 삶을 살면서 순교까지 하길 원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미 빌립보서 2장 17절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의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 생명의 피를 제사 술처럼 따라 붓는다고 해도 나는 기뻐하고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여기서 “전제”(a drink offering)란 “재물 위에 붓는 술”로서 바울은 지금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자기 자신의 피를 제물로 부은바 될지라도 자기는 기뻐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박윤선). 그 말은 한 마디로, 바울은 자기가 순교한다 할지라도 기뻐하겠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을 본받은 사람이 바로 에바브로디도라 생각합니다(1:25).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에바브로디도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30절). 달리 말한다면, 바울이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본받기를 원했다는 말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싶었다는 말입니다(3:10). 이미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하나님을 만났을 때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의롭다하심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온전한 의로운 상태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 이미-아직도 사이에 살아가고 있었던 바울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었습니다(MacArthur). 즉, 그는 성령 하나님의 성화의 역사를 간절히 사모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3장 9절에서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에 대해서 말한 것입니다. 즉, 그는 예수님을 믿어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는 “칭의”(justification)에 대해서 9절에서 말한 후 오늘 본문 10절에 와서는 “성화”(sanctification)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화”란 무엇입니까?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 35문을 보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화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역사인신데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온 사람이 새로워짐을 얻고 죄에 대하여는 점점 죽고 의에 대하여서는 점점 살게 되는 것이다”(인터넷). 우리의 성화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식과 의와 거룩으로 새롭게 됩니다(골3:10, 엡4:24). 우리의 성화는 우리가 죄에서 완전히 놓여 자유하게 될 때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도달할 때 즉 우리의 영화의 단계에서 완성합니다. 이 성화의 요소는 두 가지입니다: (1) 죽임: 우리가 점차로 죄를 죽여 나간다(롬6:11), 그리고 (2) 살림: 우리는 의를 향해 살아나간다(13절)(인터넷). 그러면 왜 바울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 칭함을 얻은 자로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를 사모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그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길 원했기 때문입니다(빌3:11).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이미 의롭다 함을 얻은 바울이 성화를 사모한 이유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길 간절히 원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는 것’이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한 2가지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1) 실제로 육신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 (2)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 그런데 바울은 이미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믿음으로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서 다시 살아났기에 그가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11절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였다는 말은 육신의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육신의 죽음에서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그날 그 순간에 자기의 죽은 몸이 부활하여 영광스러운 몸을 입되 완전한 의로운 상태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도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간절히 사모했던 것입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닮아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우리 모두 바울처럼 오직 예수님을 닮아가는 이 한 가지 일만은 분명히 하는 우리가 되길 기원합니다. 또한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인 우리의 사명에 붙잡힌바 되어 그 사명을 완수하고자 달려가십시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므로 복음의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로서의 우리의 책임입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우리의 삶은 버리고 또 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더 알기를 원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므로 복음의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기원합니다.

 

 

 

 

오직 한 가지 일만 분명히 하고 싶은,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온전히 예수님을 닮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엎드려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하며 경배할 그 날을 기다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