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고상한 지식

 

 

 

[빌립보서 37-9]

 

 

당신은 당신의 신앙생활에 무엇이 유익되고 무엇이 해가 되는지 알고 계십니까? 만일 우리가 우리 각자의 신앙생활에 지금 무엇이 유익되고 무엇이 해가 되는지를 알고 (구별하고) 있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당연이 우리는 우리 신앙생활에 해가 되는 것은 버리고 유익이 되는 것은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제 생각에는 제일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가 무엇이 우리 신앙생활에 유익이 되고, 무엇이 우리 신앙생활에 해가 되는지 구별을 잘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 몸의 건강에 비교할 때 만일 우리가 우리 몸의 건강을 관리함에 있어서 무엇이 우리 건강에 유익하고 무엇이 우리 건강에 해가 되는지를 구별을 못한다면 우리의 건강이 어찌되겠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건강관리를 제대로 잘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웬만한 어르신들은 여기저기 아파보시고 (또는 지금도 아프시고) 한 분들은 병원에 다니시면서 의사 선생님도 여러 번 만나보시므로 자신의 건강에 대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어르신들은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나름대로 신경을 써서 노력을 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고 자신의 건강에 해가 되는 일을 계속해서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는 이것이 더 큰 문제라 생각합니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무엇이 유익하고 무엇이 해가 되는 줄 알면서도 자신의 건강에 유익되게 하는 행동은 하지 않고 오히려 해가 되는 행동을 계속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큰 문제입니다. 이와 같이,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무엇이 유익하고 무엇이 해가 되는 줄을 알면서도 자신의 신앙생활에 유익한 행동은 하지 않고 계속해서 해가 되는 행동을 한다면 어떻게 영적으로 건강할 수가 있겠습니까. 영적으로 병들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간략하게 예를 들어본다면, 당신의 생각에 무엇이 당신의 신앙생활에 유익이 되겠습니까? 성경 말씀을 개인적으로 부지런히 읽고, 설교 말씀을 귀담아 듣고, 주일 오후 성경공부에 참여해서 열심히 배우고, 개인적으로 혼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들려주는 음성(깨달은 말씀)에 순종하면서 살면 우리 신앙생활에 유익이 되지 않겠습니까. 또한 우리가 새벽기도회나 수요기도회나 1박 2일 기도회나 주일 중보 기도회나 개인기도에 헌신해서 부지런히 하나님을 찾으면 우리 신앙생활에 유익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만일 우리가 이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도 가까이 하지 않고 기도 생활도 규칙적으로 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서 죄를 범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어떻게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에 유익이 될 수 있겠습니까. 도리어 우리의 신앙생활에 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7-8절을 보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가장 고상한 지식”이란 제목아래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7-9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귀한 교훈을 받아 실천에 옮기는 우리가 되길 기원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7절을 다시 한 번 보십시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현대인의 성경) “그러나 내게 유익하던 그 모든 것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다 버렸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But whatever was to my profit)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그것은 바울이 예수님을 믿기 전인 과거에 자기에게 주어진 특권과 자기가 노력해서 얻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가 이미 묵상한 성경 빌립보서 3장 5-6절 말씀에 나와 있는 사울에게 주어진 3가지 특권(5절상)과 사울이 노력해서 얻는 3가지입니다(5절하-6절). 그 3가지 특권이란 사울은 8일 만에 할례 받는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또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노력해서 얻는 3가지는 그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였고 그리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한다면, 바울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유익하게 여겼던 것은 바로 ‘육체(육적인 것)를 신뢰하는 것’이었습니다(4절). 그는 유대주의 자들보다 더 육체를 신뢰할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바로 5-6절에 나와 있는 6가지 목록입니다. 그 6가지 목록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기 전에 사울에게 있어서는 충분히 큰 유익이 되었습니다. 사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그가 추구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고(물론 여기서 그리스도는 사울의 입장에서는 예수가 아니었음), 최선을 다해서 율법을 지켜 행하므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이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율법의 의”(6절하)]를 추구했던 사울에게 있어서 5-6절에 나와 있는 6가지 목록은 그에게 엄청난 큰 유익이 되었습니다. 그 한 예를 들어, 6절 하반절에 기록한 마지막 6번째 목록을 보십시오. 사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사울에게 큰 유익입니까? 율법을 지켜 행하므로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있다고 철저히 믿고 있었던 사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었다는 것은 그에게 엄청난 유익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것은 사울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기(믿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자기 자신이 유익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것은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없었던 과거에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으로 여겼던 6가지 목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7절에 와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편지를 써 내려가면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그는 5-6절에서 말하였던 6가지 목록을 “다 해로 여”긴다 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6가지가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기에게 전혀 유익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해”가 된다는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인 ‘유익하다’와 ‘해로 여긴다’란 헬라어 단어의 의미는 회계 용어(accounting terms)으로 ‘유익하다’는 말은 ‘이익을 내다’(profit)란 뜻이고 ‘해로 여긴다’는 말은 ‘손실한 것으로 여긴다’란 의미입니다(MacArthur). 그래서 그는 자기에게 유익되었었고 자기가 신뢰하고 또한 자랑삼았던 그 6가지를 “다 바렸”다(7절하, 현대인의 성경)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바울은 과거에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을 이제는 다 해로 여길 수 있었을까요? 왜 그는 과거에 자신이 그리도 신뢰하고 자랑삼았던 그 6가지 유익했었던 목록을 이제는 다 무익된 것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자신에게 해로 여기기까지 하였을까요? 그 목적은 무엇이었습니까? 그 목적은 오늘 본문 7절 중반 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for the sake of Christ).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하심을 얻는 “하나님의 의”로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9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현대인의 성경) “그분과 완전히 하나가 되기 위한 것입니다. 이제 나는 율법을 지켜서 내 스스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이 의는 어디까지나 믿음에 근거한 것이며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기 전까지는 율법을 지켜서 스스로(인간의 노력으로) 의롭게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바울은 율법의 의가 아닌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하나님의 의)(9절)로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으므로 과거에 자기가 신뢰하였던 육체(4절), 곧 유대주의 자들보다 더 신뢰할 만한 육적인 것인 6가지로 목록(5-6절) 자기에게 아무 유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해로 여기게 되었습니다(7절).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해” 그것을 다 해로 여겼습니다(7절). 그 6가지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 8절 상반절을 보면 바울은 그 6가지 외에 다른 “모든 것”, 즉 “그 밖에 모든 이 세상 것들을”도 해로 여겼습니다(박윤선). 그 뿐만 아니라 바울은 그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겼습니다(8절). 여기서 우리는 한두 가지를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첫째는, 바로 배설물이란 단어입니다.

 

이 “배설물”이란 단어는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쓰레기”(garbage or waste)로 번역이 되있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식탁에서 버려지는 “찌꺼기들”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한 신학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바울이 전에 귀히 여기던 바리새식 율법주의는 식탁에서 내버린 찌꺼기들과 같은 것이다. 이 찌꺼기들이 개들(유대주의 자들 = 바리새식 유대인 신자들)에게는 좋아 보이나, 바울에게는 방해물이었다”(박윤선). 또한 배설물이란 우리 사람들 인체에서 나오는 것으로서“똥”(dung or manure)이라고도 번역될 수가 있습니다(박윤선).

 

(2) 둘째는, 오늘 본문 7절과 8절에서 세 번 반복해서 나오는 여기다라는 단어입니다.

 

한국 성경이나 영어 성경으로 보면 그 반복되는 단어의 차이점을 알 수가 없지만 원어 헬라어를 보면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 차이점이란 7절에 나오는 ‘여기다’라는 동사는 과거사이고 8절에 나오는 ‘여기다’라는 동사는 현재사입니다. 그 의미는 7절에서 바울이 과거에 자기가 신뢰하였던 육체(육적인 것)인 6가지 목록은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되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때부터 다 해로 여겼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8절에서 바울이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과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이라고 말했을 때 “’여김”이란 동사는 현재사로서 “영구히 취하는 계속적인 행동”을 말합니다(박윤선). 즉, 바울은 유대주의 자들보다 더 육체를 신뢰할 만한 6가지를(7절) 이미 다 해로 여겼을 뿐만 아니라 그 밖에 모든 세상의 것들(8절)도 다 해로 여기고, 잃어버리고 또한 배설물로 여기되 영구히, 계속해서 그렇게 여기겠다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말하였던 것입니다.

 

왜 그는 그리했습니까? 왜 바울은 그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기되 영구히 계속해서 그렇게 여겼습니까? 바울은 그 이유와 목적을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8-9절 상반절에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현대인의 성경) “더구나 내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처럼 여기는 것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훨씬 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내가 그 모든 것을 쓰레기처럼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과 완전히 하나가 되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이 자기가 과거에 신뢰하였던 육적인 것인 6가지와 그 밖에 모든 이 세상의 것들을 다 해로 여기고, 잃어버리고 또한 배설물로 계속해서 영구히 여겼던 이유는 바로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었습니다(8절). 과거에 율법으로는 바리새인 이였던 바울은(5절) 율법에 대한 지식이 많았었지만 그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는 줄을 몰랐었습니다(갈3:24). 특히 그는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많았었겠지만 바울은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줄을 몰랐었습니다. 그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을 몰랐었습니다(참고: 행9:20). 그래서 그는 예수가 그리스도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그 분의 도를 따르며 전하였던 그리스도인들을 열심으로 박해하였습니다. 그러던 사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음성인 “사울아 사울에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9:4)란 말씀을 들었을 때, 그리고 자기가 열심으로 박해하던 그리스도인들의 주님이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되었을 때(20절)그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빌3:8).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지식”이란 머리로만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것(intellectual knowledge about Him)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사용한 헬라어 단어(γνώσεως)를 보면 바울은 예수님을 “경험적으로”(experientially) 또는 “개인적으로”(personally)아는 것을 말합니다(참고: 요10:27, 17:3; 고후4:6; 요일5:20). 또한 이 지식이란 그리스도와 나누는 삶과 동등합니다(갈2:20).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아는 것(암3:2)과 그들이 하나님을 알므로 사랑하며 순종하는 것과 일치합니다(렘31:34, 호6:3, 8:2)(MacArthur). 저는 바울이 과거에 자기가 신뢰하고 자랑삼았던 육적인 것들이나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해(배설물, 쓰레기, 찌꺼기)로 여겼던 이유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는 말씀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했을 때 이런 글을 적어 보았습니다: “최고의 가치 있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가치가 하나도 없는 다른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빌립보서 3:7-8).”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최고의 가치 있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 개인적으로나 경험적으로(인격적으로) 예수님을 알게 되어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제일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다면 (혹은 점진적으로 깨달아가고 있다면) 그것이 비해 가치가 하나도 없는 다른 모든 것들을 버리지 않겠습니까? 바울은 그리했습니다. 그는 “내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자기가 과거에 신뢰하였던 육적인 것 6가지와 그 밖에 모든 이 세상의 것들을 다 해로 여기고, 잃어버리고 또한 배설물로 계속해서 영구히 여겼습니다. 그 목적은 무엇입니까? 두 가지 입니다:

 

첫째로,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8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그리스도를 얻고”(that I may gain Christ). 이 말씀을 좀 달리 번역한다면 “그리스도를 얻으려 하고”라는 말인데, 그 뜻은 바울이 전에 몰랐던 그리스도를 이제 얻으려고 모든 다른 것들을 배설물로 여겨 버린다는 것입니다(박윤선). 저는 그 예로 요나서 1장 4-5절을 들고 싶습니다: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마치 이방인 사공들이 배가 거의 깨지게 된 상황에서 자기들의 생명을 위하여 배를 가볍게 하려고 배 안에 있는 물건들을 바다에 던진 것처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다 던져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최고의 가치 있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가치가 하나도 없는 다른 모든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얻으려고 한다고 말하면서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두 주인을 섬기게 될 것입니다(마6:24).

 

둘째로, 바로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9절을 보십시오: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여기서 예수님 안에서 발견되려 한다는 말은 현대인의 성경에는 예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기 위한 것”이다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이 문구의 의미는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 곧, 참으로 의를 얻은 상태”입니다(박윤선). 이미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믿어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영적 연합으로 인하여 이미 의를 얻은 상태였습니다. 즉, 바울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영적으로 연합하여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이미”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의를 얻은 상태였지만 온전(완전)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직도” 예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참으로 의를 얻은 상태가 장차 다가올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주님으로 영접하므로 이미 구원을 받았을 때에는 “하나님의 의”가 그에게 전가(imputed)가 되었기에 그는 의롭다 칭함을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질적으로 그는 의를 온전히 행할 수 있는 완전한 의인의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로마서 7장에서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23절).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재림 때에 그가 홀연히 변화되어 영광스러운 영적인 몸을 입을 때에는 그는 참으로 온전(완전)한 의를 얻은 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그는 온전히 하나님의 법인 예수님의 이중계명의 말씀을 온전히 순종하여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때까지 바울은 자기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과거에 유익하게 여겼던 6가지와 그 밖에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계속해서 영구히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겠다고 헌신한 것입니다.

 

당신에게 제일 귀중한(소중한) 것이 무엇입니까? 과연 당신에게는 주 예수님 보다 더 귀한 것이 없습니까? 당신에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합니까? 당신은 그리스도와 나누는 삶을 살고 계십니까?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알고 계시듯이 당신도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있습니까? 당신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므로 그 주님께 순종하고 있습니까? 만일 그러시다면, 우리가 신뢰하는 육신적인 것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쓰레기(배설물, 똥)으로 여기고 영구히 계속해서 버려야 합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입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가 되기 위하여, 그 분과 온전한 영적 연합 상태에 이르기 위하여, 온전한 의를 얻는 상태에 이르기 위하여 입니다. 그 날 그 순간까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우리 모두가 자라나길 기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합니다 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길 기원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깨닫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예수님을 알아감에 있어서 무익한 것들과 해가 되는 것들을 버리고 또 버리는데 헌신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