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를 신뢰하지 말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34-6]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떠한 의식을 가지고 있느냐가 참 중요합니다. 여기서 제가 생각하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의식이란 바로 “은혜의식”과 “공로의식”입니다. 먼저 우리는 은혜의식이 충만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을 우리 심비에 깊이 기록해 놓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전15:10) 라고 고백하면서 더욱더 그 은혜의 힘으로 수고해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는 공로의식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가 주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선을 행했다는 행함을 우리 머릿속에 기록해 놓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이 공로의식 외에 우리는 또 한 가지 의식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 의식이란 바로 “특권의식”입니다. 새뮤얼슨(Samuelson)에 의하면 우리는 ‘특권의식의 시대(Age of Entitlement)’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즉 사람들은 과거에 비해 정확하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받아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아울러 원하는 것을 받을 때 즉각 받아야만 옳다고 느끼는 경향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 이것은 타인의 복지와 안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개인의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나는 무조건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사회나 조직, 상대방에 대해 과도한 기대를 갖는 성향으로 발현됩니다(인터넷). 가끔 우리가 입술로나 또는 마음속으로 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말이란 바로 “내가 누군지 알아?”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우리 안에 특권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 특권의식 속에서 자부심을 가지고 자기의 지위 등을 자랑하며 과시하는 경향이 충분히 있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 내려가면서 빌립보서 3장 1-3절에 와서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안전을 위하여 ‘주의하라’(삼가라”)로 세 번이나 말했습니다. 과연 바울은 누구를 주의하라고 말한 것입니까? 바로 “개들”이요 “행악 자들”이요 “몸을 상해하는” 자들인 유대주의 자들입니다. 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유대주의 자들을 주의하라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말(경고)한 것입니까? 그 이유는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가 아니라 인간의 노력인 행함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추구한 인간의 노력이란 바로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켜 행하므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철저히 지켜 행한 율법 중 하나는 바로 할례를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를 “손할례당”(2절, 개역한글)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유대주의 자들이 진정한 할례파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자신의 편지를 받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진정한 할례파라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자랑하며 육적인 것을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참 할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우리가 곧 할례파라”고 말하였는데 여기서 바울은 참 할례 파에 대해서 3가지로 요약하였습니다: (1) 하나님을 성령으로 예배하며, (2) 그리스도 예수님을 자랑하며, (3)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자들이 바로 참 할례파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육체”(육적인 것)란 말은 “인간적 특권이나 영예”를 가리킵니다(박윤선). 바울이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자들이 참 할례파라고 말하였을 때에 그는 분명히 육체를 신뢰하였던 유대인들, 유대주의 자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염두에 두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들이 육신을 따라 자랑하고 있었던 3가지, 즉 ‘하나님의 선 민족, 율법, 할례’를 염두해 두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이 참 할례파가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특히 바울은 마음의 할례를 행하지 않고 그저 표면적으로 또는 육체적 인 몸만 상하게 한 유대주의 자들의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할례에 대하여 그것을 신뢰하고 그것에 자부심을 갖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유대인들을 주의하고 그들처럼 육체를 신뢰하지 말라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말하였습니다.

 

그런 후 바울은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4절에 와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만일 다른 사람이 육체를 신뢰할 만한 이유가 있다면 자기는 육체를 신뢰할 만한 이유가 더욱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왜 자기가 육체를 신뢰할 만한 이유가 유대주의 자들 보다 더 있는지 그 이유를 한 6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6가지를 크게 2 그룹으로 나눠서 생각해 보았습니다. 참고해야 할 것은 이 두 그룹 중 첫 번째 그룹의 세 가지(할례를 받은 이스라엘 족속, 베냐민 지파 사람,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은 바울 자신이 스스로 노력을 해서 얻는 특권은 결코 아닙니다. 이 특권은 자기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반면에 두 번째 그룹의 3가지(율법으로는 바리새인,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는 바울에게 주어졌다기보다 그가 노력하여 얻는 것입니다.

첫째 그룹은,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입니다(5).

 

여기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왜 자기는 유대주의 자들보다 육체를 신뢰할 만한 이유가 더 있는지 3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 바울(사울)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 족속이었습니다.

 

사울(바울) 또한 유대주의 자들처럼 8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이미 묵상했듯이 할례란 유대인들이 받아 누렸던 특권 중의 하나로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할례를 받았다는 것을 매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자랑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할례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언약의 표시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할례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명서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할례에 대해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할례도 한 3 종류의 할례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3가지란 (1) 이방인 개종자들은 성인이 연령에 미쳐서 할례를 받았다는 것, (2) 이스마엘 자손들은 13세 때에 할례를 받았다는 것, 그리고 (3) 아브라함의 정통 가문은 생후 “8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박윤선). 그런데 사울(바울)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 족속이라고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5절에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야 말로 아브라함의 정통 가문으로서 자신의 특권(영예)을 충분히 신뢰하고도 남았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로마서 11장 1절 하반 절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자요 베냐민 지파라.”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도 자기 또한 육신을 따라 자랑할 것이 있다(고후11:18)고 말하면서 자기는 히브리인이요 이스라엘인이요 또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말하였습니다(22절). 바울은 어떤 유대주의 자들과 달리 그의 부모 둘 다다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의 가족의 족보를 추적해 보면 결국 그는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그야 말로 진정한 언약 백성이었습니다(Walvoord). 그는 이스라엘 족속으로 개종한 것이 아니라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이스라엘인 이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선택 백성으로서 모든 권리와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Martin).

 

(2) 바울은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습니다.

베냐민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야곱의 아내인 라헬의 둘째 아들입니다(창35:18). 그리고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의 12지파들 중 엘리트 지파 중 하나로서 유다 지파와 함께 다윗 왕국의 충성한 지파로서 남쪽 유다 왕국의 한 지파였습니다(왕상 12:21)(MacArthur). 또한 베냐민 지파는 귀족적인 지도자로 여김을 받았으며(삿5:14) 또한 그 지파에서 이스라엘의 첫째 왕인 사울이 나왔습니다(MacDonald). 특히 성경 신명기 33장 12절을 보면 베냐민 지파는 “여호와의 사랑을 입은 자”[(현대인의 성경) “여호와여, 그들은 주의 사랑을 받는 자들 입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바울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말한 것은 자기의 조상들 중에 한 사람도 이방인이 없고 모두 다 순전한 히브리인들이였기 때문입니다(박윤선). 바울은 히브리인 부모님에게서 태어나서 히브리 전통과 언어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는 이방인 도시에 살고 있으면서도 히브리 전통과 언어를 유지했음(참고: 행21:40; 26:4, 5)(MacArthur).

 

둘째 그룹은,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입니다(:3:5-6).

 

여기서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왜 자기는 유대주의 자들보다 육체를 신뢰할 만한 이유가 더 있는지 3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이 3가지를 사도 바울은 헬라어 원어로 “kata”(according to), 즉 “…으로는”이란 단어를 사용해서 구분하였습니다:

 

(1)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as to the Law, a Pharisee)(κατνόμον)입니다(3:5).

 

바울은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고 예루살렘 성에서 자라나되(행 22:3) 바리새인의 아들로서(23:6) 그는 율법교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바리새인 가말리엘(행5:34)의 문화에서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습니다(22:3). 그리고 그는 모세의 율법을 지킴에 엄격하여 바리새인이었습니다(박윤선). 그래서 바울은 사도행전 26장 5절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라”[(현대인의 성경) “그들은 처음부터 나를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격한 바리새파에서 생활해 왔다는 것을 얼마든지 증거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성경 사도행전 23장 6절을 보면 바울은 공회에 모여 있는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 앞에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이렇게 바울에게 있어서 “바리새인”이란 영광스러운 칭호(a title of honor)였습니다. 그 칭호란 신적인 토라가 규정한 하나님께 향한 책임을 이행함에 있어서 최고의 정직과 또한 신실함을 주장합니다(Martin). 그 당시 '바리새인'은 유대교도 중 엘리트층을 가리켰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 연구에 열심이었고(성경을 열심히 읽고 묵상하였고), 그 행함에서 흠이 없었으며(성경 말씀대로 살았으며),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말과 행함이 일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대교의 순수성을 존중하였고, 다른 문화에 물든 유대 민족의 타락을 비난하였으며, 로마의 지배에 항거하는 애국자들이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의 수는 약 6천 명이었다고 하는데 그 영향은 대단하였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두 사람이 들어가게 된다면 그 중 한 명은 바리새인일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에게는 종교인으로서 큰 흠집이 있었기 때문에 주 예수께서 그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시며(마23:27),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33절) 하고 호되게 꾸짖으셨습니다. '바리새(pharisai)'라는 말은 원래 '분리한다'는 뜻인 히브리어 파라슈(parash)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즉, 그들은 순수주의자로서, 헬레니즘 문화와 그 영향을 받은 사람들로부터 자기들을 구별하여 분리하였습니다. 그 동기가 틀린 것은 아니지만 거기에서 독선과 배타의 정신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주 예수께서 가장 비난한 것은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눅 18:9) 바리새주의였습니다(김희보).

 

(2)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as to zeal, persecuting the church) (κατζλος)입니다(3:6).

 

바울은 그저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만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바리새인으로서 열심으로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을 향한 “열심”(zeal)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순수성(the purity of God’s covenant community)을 향한 열심으로써 이러한 열심을 가진 자만이 진정으로 하나님의 종으로 여겨졌습니다(참고: 민25:1-18; 시106:30, 31)(Martin). 그리고 바울이 열심으로 교회를 박해하였다고 말하였는데 여기서 “박해”(persecuted)란 헬라어 단어는 군대가 원수를 추격하여 싸우던지 또는 사냥꾼이 그의 사냥감을 찾아내서 추격하는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 하는 단어입니다. 실제로 사울(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하여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행9:1) 길이신 예수님을 좇는 그리스도의 예수님의 교회인 신자들을 추격하여 “미친 듯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남녀를 가리지 않고 믿는 사람들을 끌어내어 모두 가두어 버렸”습니다(행 8:3; 9:1; 22:4–5; 26:9–11)(Martin).

성경에는 두 종류의 열심이 있습니다. 그 두 종류의 열심은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 하나님을 향하여 가지고 있었던 열심과 구약 성경에 하나님의 열심으로 질투한 비느하스의 열심입니다. 먼저 구약 성경 민수기 25장 11절을 보면 바른 열심으로 하나님의 노를 돌이킨 사람이 나옵니다. 그 사람은 바로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열심(“질투심” à “zealous”)으로 열심을 내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회막 문에서 울 때에 이스라엘 자손 한 사람인(6절) 시므온인의 종족 중 한 족장인 살루의 아들 시므리(14절)가 모세와 온 회중의 목전에서 미디안의 한 여인인(6절) 수르(미디안 백성 한 종족의 두령)의 딸 고스비(15절)를 자기 형제들에게 데리고 온 것을 보고 비느하스는 손에 창을 들고(7절) 시므리를 따라 그의 막에 들어가서 시므리와 고스비의 배를 꿰뚫어서 두 사람을 죽였습니다(8절). 그 때서야 하나님께서는 그의 노를 돌이키시므로 말미암아(11절) 이스라엘 자손에게 임했던 염병이 그쳤습니다(8절). 이 비느하스의 열심은 하나님 보시기에 바른 열심이었습니다. 비느하스의 열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비느하스의 바른 열심은 ‘하나님의 열심’이였습니다. 이 열심 참된 열심이요 올바른 열심입니다. 그러면 잘못된 열심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을 믿기 전에 바울(사울)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을 향한 열심입니다. 그 열심은 참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롬10:2). 다시 말하면, 사울의 열심은 올바른 지식에 근거한 열심이 아니었습니다. 성경 사도행전 22장 3절을 보십시오: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 성경 갈라디아서 1장 14절을 보십시오: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 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사울의 잘못된 열심은 잘못된 성경 지식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을 열심으로 섬겼던 사울은 신약의 예수님을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아, 즉 그리스도로 모르고 있었습니다. 즉, 사울은 그의 무지함으로 말미암아 잘못된 확신을 가지고 잘못된 열심으로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그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한 마디로, 사울이 주님의 교회를 박해한 이유는 바로 불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줄 믿지 않았기에 ‘예수가 그리스도 입니다’라고 전파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는 유대주의를 사랑하였기에 유대주의를 위협하는 그 어떤 것도 미워하였기 때문입니다(참고: 행8:3, 9:1)(MacArthur). 이것이 바로 사람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참 지식에 근거한 열심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지식에 근거한 열심이 아닙니다. 또한 사람의 열심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은 참 믿음에 근거한 열심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이 없기에 바른 믿음이 없이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지식과 잘못된 믿음으로 열심히 하나님의 일을 하였던 사울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면서도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생각하였습니다(요16:2).

 

(3)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as to the righteousness, faultless)(κατδικαιοσύνην)입니다(3:6).

 

이것은 사울(바울)이 부지런히 이룬 세 번째 업적으로서 그가 충분히 육적으로 신뢰하며 자랑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율법의 의로는 그는 흠이 없는 자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울이 말하였던 “율법의 의”라는 것은 인간이 율법을 지켜 행하므로 얻을 수 있는 의로서 인간의 공로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음을 가리킵니다. 사울은 마치 누가복음 18장 21절에 나오는 부자 청년처럼 모든 계명을 지켜 행하였습니다. 그는 율법에 근거하여 의롭다하심을 얻기 위하여 인간의 노력으로 율법에 요구하는 모든 기준들을 따라 살아왔습니다(Martin). 그래서 그는 자기의 눈으로 자기 자신을 보았을 때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러나 성경 로마서 3장 20절은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율법은 다만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는 것뿐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율법의 의로 흠이 없는 삶을 추구했지만 그가 나중에 예수님을 믿고 나서는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우리는 죄에 대한 인식이 더 많아지고 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입니다(참고: 딤전1:15). 바울이 예수님을 믿고 깨달은 것은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는데(롬 3:21) 그 의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22절)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입니다(24절).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은혜 의식이 더 많아지고 공로의식이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입니다(고전 15:10, 눅 17:10).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겸손히 질 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의 보십시오: (1)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고린도전서 15장 9절), (2)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에베소서 3장 8절), (3) “… 죄인 중에 괴수니라”(디모데전서 1장 15절).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못하고 있다는 증거는 한 3가지를 점검해 보면 좀 알 수가 있습니다: (1) 나는 점점 더 죄에 대하여 무감각해지고 있다(혹은 있는 것 같다)(엡 4:19). 나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있다 (롬5:13). (2) 나는 점점 더 공로의식에 매여 있다 (눅18:11-12). 나는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시는 일보다 내가 주님과 교회를 위하여 행하는 일을 생각하고 있다(마25:44). (3) 나는 점점 더 교만해 지고 있다(잠21:4, 겔 28:5). 나는 하나님의 영광보다 자기의 영광을 드러내길 좋아한다(요12:43).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나님 보시기에 올바르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죄에 대하여 더욱더 민감해져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범한 죄를 더욱더 인식하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은혜의식으로 충만해 져야 합니다. 우리 공로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았으면 예수님의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았습니다(롬4:25). 그러므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욱더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겸손, 또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해야 합니다(고전10:31). 우리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영광을 돌리지 마옵소서(시 115:1).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구원의 은총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로 찬양과 경배를 올려 드려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결코 우리는 육체를 신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싶은,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육체를 신뢰하는 것을 거부하는데 헌신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