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주의

 

 

 

[빌립보서 31-3]

 

 

당신의 생각에 우리 한국 국민들의 안전의식 수준이 어느 정도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2014년 10월 20일 현대경제연구원이 발표한 ‘안전의식 실태와 정책과제’에 따르면 8월초 20세 이상 성인남녀 1004명을 대상으로 한 전화 설문조사에서 “우리 사회의 안전의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더니 95%가 안전의식이 부족하다고 답변했다고 합니다. 절반 이상인 50.9%는 ‘매우 부족하다’고 답했으며 44.1%는 ‘다소 부족하다’고 답했다. ‘매우 부족하다’는 답변은 0점, ‘다소 부족하다’는 답변은 0.3점으로 책정한 결과 안전의식이 100점 만점 중 17점으로 조사됐다고 합니다. 이것은 낙제 수준입니다. 구체적으로 ‘승용차 뒷좌석에 탈 때 어떻게 하는지’ 묻는 질문에 안전벨트를 안 하고 간다는 응답이 67.5%에 달했다고 합니다. ‘노래방의 비상구가 없거나 불안해 보일 때는 어떻게 하냐’는 물음엔 81.9%가 그냥 이용한다고 답했다고 합니다. ‘안전한 나라’를 만드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시민의식인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응답자의 32.0%가 ‘안전의식과 문화의 미숙’을 가장 큰 걸림돌로 꼽았습니다. 김동렬 현대정책연구실장은 “아직도 국민들의 안전의식에 많은 문제가 있다”며 “특히 20대, 학생, 전업주부 등 안전의식과 교육 및 훈련의 사각지대에 있는 계층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인터넷).

 

얼마 전 라디오를 통해서 한국 뉴스를 들으니까 인천 제철소에서 일하는 한 40대 직원인 용광로로 추락하여 숨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마 이 직원은 제철소 작업장에서 1천 500에서 2천도의 쇳물을 분배장치에 주입하는 작업을 하다가 한 2~2.5 미터 아래의 용광로로 추락해서 결국 사망했는데 시신도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 때 뉴스에서는 일하는 장소에 ‘안전장치’에 대해서도 말하면서 안전주의 의식이 부족함도 지적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그만큼 한국 국민의 안전주의 의식이 부족하며 그러기에 안전장치도 잘 되어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 미국 캘리포니아도 장차 올 초대형 지진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미국 연방 지질연구소(USGS)에 따르면 7.8 규모 이상의 대지진은 1994년 노스리지 지진보다 위력이 50배나 강해 2천 명 이상의 사망자와 수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고, 2천억 달러(212조4천억 원)의 재산피해를 가져올 것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작년 10월 16일에는 캘리포니아 주 전역에서 초대형 지진 발생에 대비한 대규모 모의 훈련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이날 모의훈련에는 캘리포니아 주 전역의 관공서·학교·병원 등에서 1천30만여 명이 참가했는데 이 가운데 지진 발생률이 높은 LA 카운티는 330만 명, 오렌지카운티는 98만3천여 명이 각각 참여했었다고 합니다. 훈련은 지진이 발생했을 경우를 가상해 `땅에 엎드리고(drop), 숨어서(cover), 60초간 기다리기(hold on)' 순서로 진행됐다고 합니다. 캘리포니아 주정부는 지진이 발생하면 주민들은 포복 자세로 몸을 낮춰 엎드려 책상이나 테이블 등 머리를 가릴 수 있는 공간에 몸을 숨긴 뒤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기둥 등을 붙잡고 기다려야 한다고 권고했습니다. 이어 지진이나 주요 재난에 대비해 각 가정에서는 사흘간 자급자족할 수 있는 대비태세를 갖춰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상약과 식품, 하루 1갤런(3.78ℓ)을 마실 수 있는 충분한 물을 확보해야 한다고 합니다(인터넷).

 

그러면 당신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안전의식 수준은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과연 우리는 영적안전주의 의식이 어느 정도입니까? 분명히 성경은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는다 고 말씀하고 있는데 우리는 성경 말씀대로 얼마나 근신하고 깨어 있습니까?(벧전5:8). 제 생각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점점 더 근신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점점 더 절제력을 잃어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제력을 잃어서(방자하게 행하여) 원수 마귀에게 조롱거리가 되게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숭배했던 것처럼(출32:25)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절제력을 잃어서 이런 저런 마음의 우상을 품고 숭배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사도 바울이 예언을 했습니다. 그는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면 사람들이 “절제하지 못”한다고 말하였습니다(딤후3:3). 그 예언처럼 말세인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조차 절제력을 잃어서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하면서 분수에 넘치는 행동까지 하므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이 세상에서 욕되게 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깨어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깨어서 하나님께 간구해야 하는데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여 우리는 졸고 있습니다(마26:41).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 5절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은 서로 몸을 거절하지 마십시오. 다만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서로 합의하여 얼마 동안은 그렇게 하더라도 다시 정상적인 부부 생활을 하십시오. 이것은 여러분이 절제하지 못할 때 사탄이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깨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지 못하므로 절제력을 잃어버려 사탄의 시험에 들어 자꾸만 넘어져 죄를 범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1절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통하여 말하였습니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현대인의 성경) “형제 여러분, 마지막으로 말합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에게 같은 말을 다시 쓰는 것이 내게는 귀찮은 일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여러분에게 안전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미 1장에서 말한 두 가지 내용에 관하여 다시금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 두 가지 내용이란 무엇입니까?

 

(1) 첫 번째 내용은 바로 기쁨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미 빌립보서 1장에서 ‘기쁨’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그 예로 빌립보서 1장 4절을 보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할 때마다 그들을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하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빌립보서 1장 18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고 있으므로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말씀들을 보면 사도 바울은 비록 자기가 처해 있는 상황은 옥에 갇혀 있었지만 그가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였던 이유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었고(5절) 또한 자기가 옥에 갇히므로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12절). 한 마디로, 바울이 주님 안에서 기뻐하였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 두 번째 내용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2절을 보면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관하여 말하고 있는데 그는 이미 빌립보서 1장 28절에서 그 “대적하는 자들”에 대하여 언급을 했었습니다. 그 내용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생활하라”(1:27)는 내용에 포함된 것으로서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28절). 그리고 바울은 29절에 가서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내용을 보면 그 당시 빌립보교회 성도들은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었던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 있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편지를 계속 써 내려가면서 오늘 본문 3장 1절에 와서 빌립보 교회 형제들에게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다시 말하면서 그들의 안전을 위하여 그들에게 “같은 말”을 또 쓰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이렇게 하는 것이 오히려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안전하기 때문이었습니다(1절하). 여기서 “안전”(safeguard)란 원어 헬라어 의미에는 ‘(심각한) 위험으로부터 안전하다’(safe, secure from peril)라는 뜻이 있습니다(헬라어 사전).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어떠한 심각한 위험에 쳐해 있었기에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같은 말을 또 쓰고 있는 것입니까? 그 위험이란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2절을 보십시오: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Beware of the dogs, beware of the evil workers, beware of the false circumcision;”(NASB)]. 여기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3번이나 반복해서 위험하니까 “삼가라”(beware), 즉 조심(주의)하라(watch out)고 말씀(경고)하고 있습니다. 과연 바울은 누구 혹은 무엇을 조심하라고 말(경고)하고 있는 것입니까? 한 3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바울은 개들을 조심하라 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2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개들을 삼가고”(beware of the dogs). 당신도 종종 뉴스에서 사람이 개한테 물린 사건들을 들으신 기억이 나실 것입니다. 지금 미국에서 해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치명적인 개 공격을 당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개 전문 변호사인 케네스 필립이란 사람에 따르면 2010년에만 미국에서 모두 34건의 치명적인 개 공격 사건이 있었고, 해마다 35만 명이 개한테 물려서 병원 응급실을 찾는다고 합니다. 상상이 되십니까? 해마다 35만 명이니 개한테 물려서 병원 응급실을 찾는다니 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개한테 물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가끔 보는 여기 저기 건물 주차장 철조망에 붙여 있는 “Beware of Dog“(개 조심)이란 경고 싸인 판이 생각납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2절 상반절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개들”을 조심하라(주의하라)고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개들”은 누구입니까? 그 당시(1세기 AD) 개들은 사나우며 제멋대로 길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먹을 것 등을 찾아 쓰레기 더미를 뒤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개들을 아주 더러운 동물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당시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개들처럼 여겼습니다. 즉,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아주 상종하지 못할 더러운 동물처럼 여겼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를 보면 사도 요한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요4:9). 주후 1세기 그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민족이라는 우월감을 가지고 이방 사람들을 사람으로 취급해 주지 않고 아예 그들을 개들로 여겼습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탈무드를 보면 옛날 유태인 남자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하나님께 하는 세 가지 감사기도 중에 제일 첫 번째가 바로 “하나님, 내가 이방인이 아니라 유태인으로 태어난 것에 감사합니다”라는 기도였다고 합니다. 꼭 누가복음 18장 11절에 기록된 바리새인의 기도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인들이 개들처럼 여겼던 이방인들을 주의(조심)하라고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개들을 주의하라”(빌3:2)고 말했을 때에는 유대인들, 특히 유대주의 자들(Judaizers)를 염두해 둔 것입니다. 여기서 ‘유대주의 자들’이란 누구입니까? 유대 주의자들은 초기에 복음을 맹공격을 퍼부은 단체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들은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이방인들이 구약의 어떤 의식(특히 할례의식)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이 유대주의 자들과 그들의 거짓된 복음을 이단으로 말하고 있으며 심지어 저주까지 하였습니다(갈라디아서). 그런데 문제는 유대주의 자들은 교회 안에 있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진짜 신자로 인정받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교회에서 그랬습니다(갈2:12). 그러나 정작 그들은 그 교회에서 복음의 명료성을 훼손하고, 복음을 심각하게 더럽혔으며 또한 이방 신자들을 혼란에 빠트렸습니다. 그 혼란에 원인을 간략하게 요약한다면 바울의 논리는 누군가가 (1) 먼저 그리스도를 믿고, (2) 그런 다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고, (3) 다음에 즉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준비를 한다고 말한 반면에 유대주의 자들은 누군가가 (1) 그리스도를 믿고, (2) 최선을 다해 율법을 지키고, (3) 그리고는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말한 것입니다(그래샴 메이첸). 여러분, 이 차이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아주 미묘한 차이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큰 차이입니다. 그 차이란 바울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는 반면에 유대주의 자들은 인간이 노력하여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바울이 전파하였던 참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에 초점을 맞추지만(은혜), 유대주의 자들이 주장한 거짓된 복음은 죄인인 사람들이 행하는 일에 초점을 맞춥니다(공로). 한 마디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유대주의자들은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인간의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거짓 가르치는 유대주의 자들을 가리켜 “개들”이라고 말한 이유는 그들이 물질을 탐하여 스승으로 자처하고 돌아다니는 까닭이었습니다(3:19). 그러므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 거짓된 복음(가르침)을 전하는 거짓 스승들인 유대주의 자들이 위험하기에 그들을 주의(조심)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라(worship in the Spirit of God)고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3절 상반절에서 말하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봉사하라”는 단어의 원어 헬라어 의미는 “예배하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라는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배하라”는 말입니다. 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유대인들, 특히 유대주의 자들을 조심(주의)하라고 경고하면서 오히려 성령님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말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자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시사 우리를 구원해 주신 목적입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은 예배입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는 출애굽기 3장 12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worship)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이 말씀 외에도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몇 번이고 모세에게 애굽(이집트) 왕 바로에게 가서 그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말씀하셨고 모세는 순종하여 바로 왕에게 그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내 백성을 보내라 그들이 나를 섬길 것(worship)이니라”(4:23, 7:16, 8:1, 9:1, 10:7). 그래서 바로 왕은 메뚜기 재앙과 흑암 재앙 이후 모세와 아론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가 가서 주 너희의 하나님께 예배하여라. 그런데 갈 사람은 누구누구냐”(10:8, 새번역), “’그렇게는 안 된다! 가려면 너희 장정들이나 가서, 너희의 주에게 예배를 드려라. 너희가 처음부터 바란 것이 그것이 아니더냐?’ …” (11절, 새번역), “너희는 가서 주께 예배하여라. 그러나 너희의 양과 소는 남겨두고, 너희의 아이들만 데리고 가야 한다”(24절, 새번역). 그러다가 바로 왕은 마지막 10번째 재앙 이후에는 모세와 아론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와 너희 이스라엘 자손들은 일어나 즉시 내 백성을 떠나라. 너희가 요구한 대로 가서 여호와를 섬겨라”(예배하여라) (12:31).

 

우리 승리장로교회에는 삼대 목표가 있습니다. 그 삼대 목표란 (1) 진정한 예배 자를 세우는 것, (2) 신실한 제자를 세우는 것, (3) 영혼을 사랑하는 전도자와 겸손한 봉사자를 세우는 것입니다. 이 삼대 목표의 근거하여 우리 교회는 삼대 목적 진술이 있습니다. 그 중에 첫 번째 목적 진술은 이렇습니다: “주님을 모시는 교회: 예배-증인들.” 이 첫 번째 목적 진술에 대한 구절은 고린도전서 14장 25절 말씀입니다: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이 말씀은 제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다닐 때 밑에서 배운 John Frame 교수님이 쓴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는 책에서 도전을 받고 우리 승리장로교회가 우리에게 제일 원하고 계시는데 예배요 그 예배는 증거의 역할 또는 전도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므로 우리에게 구원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구원의 하나님께서 요한복음 4장 23절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시기에 우리 모두가 예배의 우선순위를 두고 거기에 심혈을 기울여 하나님께 바른 예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우리 교회는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의 예배를 통하여 우리 가운데 있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조차도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라고 선포하는 역사가 일어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둘째로, 바울은 행악하는 자들을 조심하라 고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개가 더 무섭습니까 아니면 사람이 더 무섭습니까? 좀 더 구체적으로 질문한다면, 당신은 공격적인 개(vicious dog)를 더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악한 마음을 품고 공격적인 행악 자(vicious wicked worker)를 더욱더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제 생각엔 공격적인 개보다 공격적인 행악 자를 더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공격적인 행악 자는 짐승보다 더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개는 아무리 사납고 공격적이래도 자기 주인을 잘 물지 않는데 공격적인 행악 자는 자기를 사랑해주고 먹여주고 보호해 주고 등등 하는 사람도 충분히 공격하여 해를 깨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미국 뉴스에 미국 월스트리스에서 운용자산이 2천 2백억 원에 달하는 헤지펀드를 설립, 운영하던 70살의 토머스 길버트 씨가 미국 명문 프린스턴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자기 아들이 쏜 총에 맞아 숨진 사건이 보도되었습니다. 근데 그 아들이 자기 아버지를 죽인 원인이, 아버지가 실업 상태였던 자기에게 매달 아파트 2백 6십만 원과 용돈 60만원을 지원해왔었는데 앞으로 월세도 끊고 용돈도 30만원으로 줄이겠다고 하자 격분한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방아쇠를 당겨서 죽였다고 합니다(인터넷). 이런 자식을 한국어로 “패륜아”(an immoral/a depraved person)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패륜아란 네이버 사전을 보니까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하여야 할 도리에 어그러지는 행동을 하는 사람.” 그런데 아마 대중적으로 더 잘 알려진 말은 “패륜아”란 말보다 “후레자식”(bastard)일 것입니다[“후레자식”이란 “배운 데 없이 제풀로 막되게 자라 교양이나 버릇이 없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네이버 사전)]. 이러한 후레자식(폐륜아)은 “가시고기”만도 못하지 않습니까? 가시고기는 물고기 중 유일하게 둥지를 만드는 고기라고 합니다. “가시고기는 주둥이로 강바닥의 모래를 퍼내고 그 곳에 둥지를 짓습니다. 모래집에 수초까지 덮어 완벽한 산란의 보금자리를 꾸밉니다. 가시고기 수컷은 이때부터 알을 보호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입니다. 몸집이 큰 물고기들과 처절한 싸움도 불사합니다. 알에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부지런히 알을 넣고 꺼내는 작업도 잊지 않습니다. 가시고기 수컷은 보통 15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은 채 알을 보호 합니다. 그리고 알이 부화할 무렵, 둥지 옆 에서 장렬하게 죽습니다. 영문도 모르는 치어들은 무심하게도 제 아비의 살을 뜯어먹으며 성장합니다. 가시고기는 치어를 위해 생명을 바치고, 최후에는 몸까지 내어놓습니다. 그 부성애로 인해 가시고기의 부화율은 90%를 웃돕니다”(인터넷).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2절 중반절을 보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안전을 위하여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라(주의/조심하라)고 말(경고)하고 있습니다[(빌3:2b) “행악 자들을 삼가고”(beware of the evil workers)].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행악하는 자들”이란 누구일까요? 여기서 ‘행악하는 자들’이란 원어 헬라어의 의미를 사전에 찾아보니까 이런 도덕적인 의미(a moral sense of meaning)가 있다고 합니다: ‘사악한, 사나운/공격적인, 마음과 행동과 인격이 나쁜/형편없는’[“wicked, vicious, bad in heart, conduct, and character”(Zodhiates)]. 그리고 이 헬라어 단어가 신약 성경에 오늘 본문 외에 한 3군데 더 나옵니다. 그 중에 두 군데를 살펴보면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조심(주의)하라고 말하는 “행악하는 자들”이 누구인지 파악하는데 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첫 번째 성경구절은 마태복음 21장 41절입니다: “그들이 말하되 그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열매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포도원 농부 비유”로서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악한 자들”이란 “농부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이 농부들을 가리켜 “그 악한 자들”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그들이 세를 내고 빌려 쓰는 포도원의 주인이(33절) 자기들로부터 열매를 받으려고 종들을 보냈을 때(34절) 그 농부들은 집 주인이 보낸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기 때문입니다(35절). 그래서 집 주인은 처음보다 많은 다른 종들을 그 농부들에게 보냈는데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였”습니다 (36절). 그래서 집 주인은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면 그 농부들이 자기 아들을 존대할 줄 알고 보냈는데 그 농부들은 그 아들을 죽여 그의 유산을 차지하자고 하고 그 아들을 잡아 포도원 밖에 내쫓아 죽였습니다(37-39절). 예수님은 이리 행한 그 농부들을 가리켜 “그 악한 자들"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41절). 이 포도원 농부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악한 자들(농부들)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유대인들입니다(눅23:21). 그 유대인들 중 특히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듣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마21:15)을 가리켜 “악한 자들”(41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 성경구절은 마태복음 24장 48-49절입니다: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감란 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3절)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 어느 때에 이런 일[성전 건물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2절)]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3절)라는 질문에 답변하시는 중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인자(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시면서 (44절)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45절). 그러신 후 예수님께서는 “만일”이라고 말씀을 시작하시면서 “그 악한 종”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악한 종”에 대하여 몇 가지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1) 악한 종은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48절을 보십시오: “만일 그 악한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2) 악한 종은 잘못된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49절을 보십시오: “동료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게 되면.” (3) 악한 종은 “외식하는 자”(the hypocrites)라는 것입니다. 51절을 보십시오: “엄히 때리고 외식하는 자가 받는 벌에 처하리니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예수님께서 주로 누구를 가리켜 “외식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마7:5, 15:7, 22:18, etc.).

 

이 두 성경 구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악한 자들” 또는 “악한 종”은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이 사실에 비춰볼 때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2절에서 사도 바울이 “행악하는 자들”을 조심(주의)하라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말(경고)하였을 때 바울이 염두해 두고 있었던 “행악하는 자”"는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누구였습니까? 성경 주석가 아더 핑크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1) “서기관은 국가의 서기관, 교회의 서기관이 있는데 여기서는 교회의 서기관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율법 학자라고 할 수 있다. (2) 바리새인은 한 분파를 나타내는 것으로써 그들은 모세 율법이 명하는 것보다 더 엄격하며 조상들의 유전에 기초를 둔 도덕법과 의식 법을 만든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바리새인들은 유대인들 사이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았다. (3) 하지만 그들의 결점은 단지 형식적이었으며 외면적으로 율법을 준수하였으나 더러운 생각과 탐욕과 미움과 하나님에 대한 냉담한 마음에는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다. 또한 그들은 율법의 도덕적인 요구보다 의식적인 계율을 훨씬 더 강조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자기유익이 그들을 지배하는 동기였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영혼의 순결함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외면적 행위의 신앙이 복되고 영원한 세계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핑크). 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입니까? 당신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생각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어떻게 외면적 행위의 신앙으로 복되고 영원한 세계를 충분히 확보할 수가 있습니까? 달리 말한다면,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과 조상들의 유전에 기초를 둔 도덕법과 의식 법을 철저히 인간이 노력해서 준수하면(지키면) 충분히 구원(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고 영원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고 생각하였다는 말입니다. 이 생각이 왜 위험한 생각입니까? 저는 한두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1) 그 이유는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신앙(종교?) 생활을 할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외식하는 자가 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외면적 행위의 신앙을 하면 할수록 더욱더 형식적이며 외면적인 신앙생활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러한 생활을 신앙생활이라고 말하기보다 종교 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그것은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삶이 아니라 형식적이고 외면적인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행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1장(현대인의 성경)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수많은 제물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나는 너희가 수양이나 짐승의 기름으로 드리는 제물에 이제 싫증이 났다. … 기뻐하지 않는다. 누가 너희에게 그런 것을 가져오라고 하였느냐? 너희는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다. 너희는 무가치한 제물을 더 이상 가져오질 말아라. .. 나는 싫어졌다. 너희가 .. 종교적인 모임을 가지면서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차마 볼 수 없구나 … 내가 싫어하는 것은 그것이 오히려 나에게 짐이 되어 내가 감당하기에도 지쳤기 때문이다”(11-14절).

 

(2) 그 이유는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신앙(종교?) 생활을 하면 공로의식으로 인하여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자기의 영광을 들어내고자 하기 때문에 매우 위험한 생각입니다.

 

우리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1문 대답)인데 우리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신앙(종교?) 생활을 하게 되면 우리는 은혜의식을 상실하고 오히려 공로의식으로 가득차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사람의 영광을 추구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3절에서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라고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하였습니다.

 

우리가 우리 각자 자신에 대하여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좀 더 성경적으로 질문한다면 우리가 “육신을 따라”[“육적인 것으로”(현대인의 성경)](고후11:18) 자랑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유대인들, 유대주의 자들이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는 육신을 따라 자랑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3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선 민족, 율법, 할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자부심, 즉 그들이 자랑으로 삼았던 것은 바로 자기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았다는 선 민족이라는 것과 하나님께 받은 율법과 할례였습니다. 이것들이 그들로 하여금 교만하게 만들었고 또한 영적 우월감을 가지게 만들므로 자기들을 이방인들과 차별화 시키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받은 것에 대해 매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이러한 자부심 속에서 그들은 율법을 의지하며 자랑하였습니다(롬2:17). 그런데 문제는 그러면서 그들은 자기들 스스로 율법을 어기며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2:12ff.). 그들은 하나님을 뜻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2:18) 교만한 가운데 “어린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면서(20절) 율법을 가르치기는 좋아했지만 자기들 스스로는 가르치지 않았습니다(21절). 그들은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그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였습니다(23절). 그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았습니다 (24절). 이러한 육신을 따라 자랑하는 것에 대해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성경 고린도전서 3장 21절 상반 절은 “아무도 사람을 자랑하지 마십시오”(현대인의 성경)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 야고보서 4장 16절은 “도리어 허영에 들떠 자랑만 하고 있으니 그런 것은 다 악한 일입니다”(현대인의 성경). 유대인들, 특히 유대주의 자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자기들이 하나님의 선 민족이요 율법과 할례를 받았다는 것을 자랑으로 삼아 결국 육신을 따라 자랑하였던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허영에 들떠 자랑”하는 것(허탄한 자랑)이었으며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었습니다(16절). 특히 그들이 하나님의 선 민족으로서 율법을 지켜 행하므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그리 행동한 것은 하나님을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는 것이었습니다(삿7:2). 이러한 자랑은 바로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2절),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내가 율법을 철저히 지키므로 나 자신을 구원하였다’고 자랑하는 것으로서 하나님 보시기에는 허탄한 자랑이요 하나님을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뭐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에베소서 2장 8-9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고린도전서 1장 29절을 보십시오: “이것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현대인의 성경).

 

성경은 분명히 “구원”이란 결코 “우리의 선행으로 된 것이 아니므로 아무도 자랑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엡2:8-9). 그 이유는 우리의 선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구원이란 우리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격이 없는 죄인이 은혜로 구원이란 선물을 받았는데 우리가 그 선물을 주신 분을 자랑해야지 어떻게 그 선물을 받은 우리 자신을 자랑할 수가 있습니까? 그 구원의 선물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우리가 자랑해야지 어떻게 우리가 행한 일을 자랑할 수가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을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혹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자랑할게 있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고린도후서 11장 30절을 보십시오: “그가 꼭 자랑해야 한다면 내 약한 것이나 자랑하겠습니다”(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성경 고린도후서 10장 17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참고: 고전1:31). 여기서 “주 안에서 자랑”한다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4절 상반 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명을 받은 자로서 자기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면서도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기쁜 소식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은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내가 기쁜 소식을 전하지 않으면 나에게 불행이 닥칠 것입니다”(고전 9:16, 현대인의 성경).

 

우리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갈6:14).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을 자랑하는 우리가 돼야 합니다(빌3:3). 하루 종일 주님을 자랑하고 영원히 주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는 우리가 되길 기원합니다(시44:8, 현대인의 성경).

 

마지막 셋째로, 바울은 몸을 상해하는 일을 조심하라 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미 묵상한 것처럼 유대인들, 유대주의 자들이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는 육신을 따라 자랑할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선민족, 율법, 할례, 이 3가지였습니다. 이들이 가지고 있었던 자부심, 즉 그들이 자랑으로 삼았던 것은 바로 자기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택함을 받았다는 선민족이라는 것과 하나님께 받은 율법과 할례였습니다.

 

할례가 무엇입니까? “할례”란 영어로 “circumcision”인데 그 뜻은 “cut around”(빙 둘러 자르다)란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브릿트 말라”라고 하는데 그 뜻은 ‘브릿트”는 “계약(언약)”이란 뜻이고 “밀라”는 “할례”를 뜻합니다. 그래서 “할례”라고 말할 때 그 말의 원어 의미는 바로 “언약의 할례”입니다. 그래서 할례를 행한다고 할 때에 그 의식은 남자의 성기 귀두 위에 덮여 있는 표피를 제거하였습니다. 그리고 할례는 태어난 지 8일째 되는 날 실시하도록 규정 되었습니다(창 17:12, 24-25; 레 12:3).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할례가 가지고 있었던 상징적인 의미였습니다. 그 상징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할례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에 대한 상징이었습니다. 성경 창세기 17장 11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아브라함과 노예를 포함한 그 가정에 속한 모든 남자들에게 할례를 행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언약의 표시로 이스라엘 백성의 몸에 새겨진 흔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그 당시 할례는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백성이라!"는 징표이며, 상징이었고, 또한 표시(mark)였습니다. 즉, 할례는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증명서였습니다. 할례는 옛 사람이 죽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예식이며 증거였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확실한 표시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 때부터 이스라엘 남자들은 이 언약 의식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은밀한 표식을 몸에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의식은 엄격히 지키도록 명령된 외적 의식이었습니다(창 17:12; 출 4:24; 수 5:2).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2절을 보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안전을 위하여 그들에게 3가지를 주의(조심)하라고 경고하면서 마지막 세 번째로 “몸을 상해하는 일”을 주의(조심)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몸을 상해하는 일”이란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개역한글 성경에는 “손할례당”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손할례당이란 ‘몸(양피)을 상하는 할례를 자랑하는 당파”를 가리킵니다(박윤선).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2절에서 바울이 말한 “몸을 상해하는 일”이란 헬라어 단어는 우리가 여태껏 말한 구약의 “할례”라는 헬라어 단어인 “페리토메”(peritome)와 다른 단어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모든 남자들이 행하라고 했던 “할레”는 헬라어로 “페리토메”인데 그 의미는 “to cut around”(빙 둘러 자르다)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 2절에서 바울이 말한 “몸을 상해하는 일”이란 헬라어 단어의 의미는 “to cut down(off)”[(몸/양피의 밑 부분을 잘라) 쓰러뜨리다(잘라내다)]입니다. 죤 맥아더 목사님에 의하면 바울이 말한 “몸을 상해하는 일”(몸/양피의 밑 부분을 잘라내는 일)이란 마치 열왕기상 18장 28절에 나오는 갈멜 산에서 엘리야와 대결하였던 바알 선지자들이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자기들의 신이 바알의 이름을(26절)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의식에)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자신들)의 몸을 상하게” 한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식 구약에서 금지되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구약에서 말하는 할례가 아니라 오히려 구약 성경에서 금지하고 있는 의식대로 자기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하나님의 믿는다고 하는 손할례당 사람들을 주의(조심)하라고 말한 것입니다(빌3:2). 그러면 질문은 여기서 바울이 손할례당 또는 “몸을 상해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주의하라고 말할 때 그는 누구를 염두해 두고 있었을까요? 바로 유대주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몸을 상하게 하면서까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였지만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는 할례는 아무 영적인 상징이 없이 그저 자기 육체적인 몸만 상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박윤선). 왜 유대주의자들은 아무 영적 의미도 없는 자기 몸만 상하게 하는 이러한 할례를 행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그들은 마음의 할례를 행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렘9:26).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목을 곧게 하여(신10:16) 항상 성령님을 거스렸습니다(거역하였습니다)(행7:51). 그들은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형식적으로나 외식 적으로는 철저하게 율법과 조상들의 유전을 따라 규례(의식)들을 지켜 행하다보니 결국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외식주의자들(the hypocrites)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유대인 성도들을 염두해 두고 이렇게 권면하였습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영에 있고 율법 조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 서니라”(롬2:29).

 

바울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하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빌1:8) 이미 성령님에 의한 마음의 할례(진정한 할례)를 받은 자들로서 몸을 상해하는 일을 주의(조심)하고 더 나아가서 “육체를 신뢰하지” 말라(put no confidence in the flesh)고 말하고 있습니다(2:2-3). 그는 진정한 마음의 할례를 받지 못하고 그저 모세의 율법의 표면적으로 의식과 책임에 따라 육신적으로 할례를 행하여 그것을 신뢰하고 그것에 자부심을 갖고 할례 받은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유대인들(과 유대주의 자들 및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주의하고 ‘당신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어 성령님에 의한 진정한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들로서 그 유대인들처럼 육체를 신뢰하지 말라’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결코 육체와 육신의 할례를 신뢰하지 않고 성령님에 의한 마음의 할례를 신뢰하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보길 원했던 바울,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 이유는 유대인들처럼 육체를 신뢰할 경우에는 공로의식을 가지고 교만함과 영적 우월감 속에서 헛된 영광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만일 그들이 유대인들처럼 육체를 신뢰하게 되면 형식적이고 외면적인 것들을 취중 하다가 보면 위선자들이 될 위험이 충분히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위선자들이란 소리를 듣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진정한 할례는 행하지 않고(진정으로 세례를 받지 않고?) 그저 교회 나오다가 보니 형식적으로는 세례를 받았지만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신30:6) 겉으로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 같이 말하고 행동하면서 형식적으로 외면적인 종교 의식을 철저하게 지키려고만 하기에 우리는 위선자라는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주님과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행하였고 지금도 행하고 있는 일들에 초점을 맞추어 공로의식을 가지고 우리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면서 살아가고 있기에 우리는 위선자란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위선자라는 소리를 듣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돼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일을 믿음으로 바라봅니다. 또한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에 초점을 맞추고 은혜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갑니다. 그러한 우리가 되길 기원합니다.

 

 

 

우리 교회의 안전이 되시는 주님을 의지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율법적인 종교생활을 경계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성령으로 예배하며 그리스도 예수님을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기를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