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빌립보서 225-30]

 

 

토니 캠폴로(Tony Campolo)는 노인문제를 연구한 결과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인터넷). 95세 이상이 된 노인 5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당신들에게 이제 다시 삶이 주어진다면 어떻게 살아가고 싶습니까?>라는 설문이었습니다. 3가지씩 답을 하라고 했습니다. 이에 대한 3가지 답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1) 날마다 반성하는 삶을 살겠다였습니다(They would reflect more). 그동안 정신없이 살아서 왜 사는 지도 생각 못하고 살았다. 좀 더 정신 차려 살겠다. (2) 너무 비겁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They would risk more). 불의와 타협하며 살고 남의 눈치나 보고 살았다. 이제부터는 좀 더 용감하게 살고 싶다. (3) 오늘날과 같은 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살고 싶다(They would do more things that would live on after they were dead). 죽음을 생각하고 살고 싶다. 죽은 후에 나는 어떻게 되는가. 무엇을 남길 것인가 후회스럽다. 내가 생각 없이 산 것이 후회스럽다고 공통적으로 고백하고 있다(인터넷).

 

우리는 이미 빌립보서 2장 19-24절 말씀 중심으로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게 속히 보내기를 원했던 그의 영적 아들이요 믿음의 신실한 아들인 디모데에 대해서 묵상했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기에 앞서 그에 대해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소개를 하였습니다. 그 소개를 한 5가지로 다시금 요약해 보았습니다: (1)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뜻을 같이한 자입니다(20절). 다시 말하면, 영적 아들 디모데는 그의 영적 아버지인 사도 바울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 디모데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하는 자였습니다(20절). 다시 말하면, 디모데는 그들을 진심으로 염려해 주는 자였다는 말입니다. (3)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일을 구하는 자였습니다(21절). 다시 말하면,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일에 관심이 있는 자였습니다. 그는 바울과 같이 주님의 일을 힘쓰는 자였습니다(고전16:10). (4) 디모데는 훌륭한 인품을 가진 자였습니다(빌2:22). 그는 시험 또는 연단을 통하여 그의 인품이 훌륭하다고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빌립보 성도들에도 인정을 받은 훌륭한 인품은 바로 “진실함”이었습니다 (20절). (5) 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한 자였습니다(22절). 수고하되 디모데는 마치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자신의 영적 아버지인 사도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했습니다. 바울이 이 디모데는 빌립보 교회에 “속히” 보내기를 주님 안에서 바랬던 이유는 그 교회 성도들의 사정을 앎으로 자신이 안위(위로)를 받기 원했기 때문입니다(19절). 그래서 바울은 자기 일이 어떻게 될지를 (자기 형편을) 보아서 “곧” 디모데를 그들에게 보내기를 바란다고 편지를 쓰면서(23절) 자기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한다고 말하였습니다(24절). 그렇게 말한 후 바울은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25-30절에서 또 다른 인물에 대해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인물은 바로 “에바브로디도”란 사람입니다. 이 에바브로디도란 사람은 누구인가요? 이 사람에 대해서 한 3가지로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빌립보 교회의 사자(messenger)로서 바울의 쓸 것을 돕는 자였습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25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현대인의 성경) “나는 에바브로디도를 여러분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나의 형제요 동역자요 전우이며 나의 필수품을 공급해 주라고 여러분이 보낸 사자입니다”]. 에바브로디도란 인물은 바울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이면서도 빌립보 교회의 사자(messenger)로서 바울의 쓸 것을 돕는 자였습니다. 여기서 “사자”란 단어는 원어 헬라어로 “ἀπόστολος”로 우리 한국어로 말한다면 “사도”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사자”나 “사도”란 단어의 의미는 바로 ‘보냄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예수님의 “사도”들이란 주님 되신 예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냄을 받은 자들로서 그들을 보내신 예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자들입니다. 곧, 예수님의 열두 사도들은 가서 온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온 족속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삼으라는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자들입니다(마 28:19-20). 그러면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25절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너희 사자"란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자가 아니라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에게 보낸 자였습니다. 한 마디로,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에서 파송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의 사자”라고 말하지 않고 “너희 사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자기들의 사자인 빌립보 교회의 교인인 에바브로디도 바울에게 보냈습니까? 그 목적이 무엇이었습니까? 그 목적은 바로 바울의 쓸 것을 돕기(공급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빌립보 교회가 에바브로디도를 바울에게 보낸 목적은 그로 하여금 바울의 쓸 것을 돕기 위해서였습니다[(25절하) “…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 여기서 “돕는 자”(minister)란 원어 헬라어 단어(λειτουργὸν)의 의미는 ‘개인적으로 서비스 하는 사람’(one engaged in personal service), ‘보좌관’(aide), “조수/보조원”(assistant)란 뜻입니다(Arndt). 즉, 빌립보 교회의 메시저(사자)인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의 조수/보조원, 보좌관과 같은 사람으로서 바울을 섬기는 자였다는 말입니다. 저는 빌립보 교회 성도인 에바브로디도가 섬기는 자였다는 말을 생각할 때 빌립보 교회는 다른 어느 교회보다 바울을 잘 섬겼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빌립보서 2장 17절입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 말씀을 보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믿음으로 자기를 섬긴 것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섬김의 재물로 인하여 바울은 만일 자기가 전제로 드릴지라도, 즉 순교할지라도, 그는 기뻐하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과 함께 기뻐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주님 안에서 교제입니까. 바울과 빌립보 교회와의 관계는 섬기며 섬김을 받는 아름다운 교제였습니다.

 

그러면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쓸 것을 어떻게 도왔습니까? 성경 빌립보서 4장 15-16절을 보십시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이 말씀을 보면 바울의 복음의 시초에 바울이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유일하게 빌립보 교회만이 바울의 복음의 사역에 참여하여(1:5) 바울의 쓸 것을 도와줬습니다. 또한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한 두 차례 바울에게 필요한 것을 보내 주었습니다. 보내주되 빌립보 교회는 에바브로디도 편에 바울에게 쓸 것을 보내주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서 4장 18절에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빌립보 교회는 자기들의 사자인 에바브로디도 편에 바울의 쓸 것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풍족하”다 고 말하면서 빌립보 교회가 자기에게 보내준 것들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실 향기로운 제물”이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빌립보 교회의 사자인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가 준비한 바울에게 필요한 쓸 것들을 가지고 바울이 마게도냐를 떠날 때와 데살로니가에 있었을 때 그에게 가서 선물을 전달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에게 선물을 전달한 후에도 그와 함께 있으면서 동역하였습니다(2:25). 다시 말하면, 그는 그냥 바울에게 쓸 것만 전달하고 다시 빌립보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바울과 함께 있으면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했습니다(25절). 즉, 에바브로디도는 바울과 복음 전도에 협력했습니다(박윤선). 또한 에바브로디도는 바울과 함께 “군사 된 자”였다(25절)고 바울이 말한 것을 보면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면서 복음을 대적하는 자들과의 영적 전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처럼 잘 싸우면서 담대히 복음을 바울과 함께 전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내려가면서 오늘 본문 25절에서 에바브로디도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내가 쓸 것을 돕는 자라”고 말한 것입니다.

 

저는 이 에바브로디도란 사람을 생각할 때 우리 승리장로교회와 우리 교회가 후원하는 선교사님들과의 사이에서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사람들이 더욱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우리 교회와 선교지에 있는 선교사님들을 후원함에 있어서 우리 교회의 메신저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더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 주님께서 저희 교회를 통하여 티화나 멕시코를 선교케 하고 계시는데 어느 면으로 보면 멕시코 선교 팀은 우리 교회에서 티화나 멕시코 선교지로 보내는 자들로서 멕시코에 선물들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물론 그 선물들 중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 멕시코 영혼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야 말로 참 중요한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 음식도 제공하고 이런 저런 선물도 주고 의료 선교도 하고 다 중요합니다. 그렇지만 그 외에도 그 곳에서 섬기는 멕시칸 Victor 목사님 부부와 일꾼들과 한 형제, 자매로서 함께 동역하며 그들의 필요한 것을 우리 교회가 선물해 주므로 채워주는 일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사역은 티화나, 멕시코뿐만 아니라 멕시코 엔세나다도 마찬가지고 또한 중국, 필리핀, 몽골 등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곳에서 선교하시는 분들이나 또는 사역하는 현지인 주님의 종들의 필요한 것들을 우리 교회가 선물해 주면서 함께 동역하며 함께 기도하며 함께 수고한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동역자의 관계요 주님 안에서 협력하는 귀한 사역이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이러한 귀하고 아름다운 협력사역을 계속해서 신실하게 감당하는 우리 교회가 되길 기원합니다.

 

둘째로,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간절히 사모하였고 또한 심히 근심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26절을 보십시오: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가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현대인의 성경) “그는 여러분 모두를 그리워하고 있으며 자기가 병든 것을 여러분이 알게 되었다고 걱정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에바브로디도란 사람은 병든 상황에서 그가 간절히 사모하였던 사람은 바로 빌립보 교회 성도(식구)들이였습니다(26절). 그가 빌립보 교회를 떠나 바울과 함께 얼마 동안 동역하며 수고하며 바울의 쓸 것을 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주님의 일을 하다가(30절) 병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정도로 그의 병이 심각했는가 하면 오늘 본문 27절과 30절을 보면 그는 병들어 죽게 될 정도였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다(그리워하고 있다)고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쓴 것입니다.

 

저는 편지를 쓰고 있었던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의 심정을 공감하고 이해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즉, 바울은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간절히 사모하고 있었던 그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바울의 편지들을 보면 그 또한 사랑하는 성도들과 멀리 떨어져 있었을 때 그들 보기를 간절히 원한다고 편지를 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로마서 1장 10-13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한다(10절),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한다(11절),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했다(13절)라고 말하였습니다. 그가 얼마나 그들을 보고 싶었으면 이렇게 편지를 쓰겠습니까. 또 다른 예는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쓴 편지를 보면 좀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 데살로니가전서 2장 17-18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막았도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매우 힘썼습니다. 이렇게 바울의 심정이 그리도 간절히 보고 싶은 교회 식구들을 못 보는 상황에 놓여 있어 보았기에 그는 에바브로디도가 자기 교회 식구들인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그리워하고 간절히 사모하는 마음을 공감하며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을 간절히 사모하며 그리워하는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한다(빌2:25), “그래서 내가 서둘러 그를 돌려보냅니다”(28절, 현대인의 성경)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에바브로디도는 자기가 병든 것을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들을 줄 알고 “심히 근심”하였다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말하였습니다(26절).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걱정되시지 않겠습니까? 슬프실 것 같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에바브로디도 같은 경우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자기가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알게 되므로 오히려 자기가 심히 근심(걱정)하였습니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에바브로디도는 자기가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는데 자기 자신을 걱정하기보다 빌립보 교회 식구들을 더 걱정했다는 사실이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아니, 지금 내가 병들어 죽게 생겼는데 나 자신을 걱정하기보다 내가 병들어 죽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가족 식구들이나 교회 식구들이 더 걱정이 되나요?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에바브로디도가 “심히 근심”했다(26절)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데 이 헬라어 단어(αδημονων)가 신약 성경 마태복음 26장 37절(막14:33)에 나와 있는 예수님의 겟세마네 동산 기도하는 말씀에도 나와 있습니다: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 새 고민하고 슬퍼하사”[(현대인의 성경)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만 데리고 가셨다. 예수님은 몹시 괴로워하시며”]. 여기서 예수님께서 “고민하고 슬퍼하”셨다(몹시 괴로워하셨다)는 단어가 바로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26절에서 에바브로디도가 “심히 근심”했다는 단어하고 동일한 단어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마치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셔서 “고민하고 슬프하”셨던 것처럼 에바브로디도는 예수님처럼 희생적인 사랑으로 빌립보 교회를 사랑하며 사모했다는 것입니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자기의 개인적 사정 때문에 교우들이 근심할까하여 자기편에서 도리어 근심하였다. 그는 그처럼 희생적 정신으로 교우들을 아꼈다.”

 

이것이 바로 빌립보서 2장 3-4절의 원리입니다. 그리고 에바브로디도는 이미 이 성경적 원리대로 살고 있었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에바브로디도는 자기 일을 돌보기보다 빌립보 교회 식구들의 일을 더 돌보았습니다. 그는 병들어 죽게 된 자기로 인하여 빌립보 교회 식구들이 걱정하고 염려할까봐 더 근심(걱정)을 했습니다. 이것이 희생적인 사랑이 아닌가요? 그 만큼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에바브로디도를 사모하고 생각한 것보다 오히려 에바브로디도가 그들을 더욱더 간절히 사모하고 그들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멀리에 계신 아버지가 병들어 죽게 되었는데 그 사실을 자녀들이 알면 충격 받고 슬퍼할까봐 말 안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 소식을 자녀들이 알게 되었을 때 그 아버지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에바브로디도처럼 심히 근심(걱정)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에바브로디도는 병들어 죽기까지 이른 상황에서 자기 교회 식구들을 간절히 사모하였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랑하는 우리 교회 식구들을 간절히 사모하며 그리워하고 있습니까? 저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2002년 제가 승리장로교회를 떠나 한국 서현교회에 가서 섬기면서 교회갱신목회자협의회 수련회 때 마태복음 16장 18절의 약속의 말씀을 받고 새찬송가 208장 “내 주의 나라와”를 찬양할 때 우리 승리장로교회가 생각나면서 그리움 속에서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합니다”(1절), “이 교회 위하여 눈물과 기도로 내 생명 다하기까지 늘 봉사합니다”(3절)라고 찬양하면서 그 머나먼 한국에서 여기 미국 L.A.에 있는 우리 승리장로교회를 그리움 속에서 울었던 그 때 그 순간이 아직도 제 기억에 생생합니다. 여러분, 우리 한국어에 “보이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진다”(Out of sight out of mind)는 말,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물론 그것이 우리의 본능이겠지만 주님 안에 있는 우리 그리스도들은 사랑하는 우리 교회 식구가 보이지 않으면 마음이 더 가까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멀리 있는 교회 식구들을 우리가 사도 바울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하며(빌1:8) 기도하고 있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그들을 더욱더 걱정할 것입니다(2:26). 우리 모두가 에바브로디도처럼 우리 자신보다 우리 이웃을 더 걱정하며 또한 간절히 사모하는 우리가 되길 기원합니다.

 

셋째로, 에바드로디도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까지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자였습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30절을 보십시오: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에 그는 그가 간절히 사모하는 그의 교회 식구들인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고 심힌 근심하였습니다. 그 때에 그렇게 병중에서 심히 근심하는 에바브로디도를 보면서 ‘근심 위에 근심’(sorrow upon sorrow)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바로 바울이었습니다. 성경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27절을 보십시오: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긍휼히 여기셨고 그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현대인의 성경) “그가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또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나에게 슬픔이 더 겹치지 않게 하셨습니다”]. 왜 바울은 근심 위에 근심이 더 있었을까요? 왜 그의 슬픔은 더 겹쳤었나요? 그 이유는 바울은 자신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에바브로디도가 병들어 죽게 되었기에 근심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심히 근심(슬퍼)하고 있을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랑하며 사모하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할 때 바울에게는 근심 위에 근심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젊은 부부가 결혼해서 아기를 낳았는데 그 아기가 병들어 죽어갈 때에 그 사랑하는 자식을 보는 부모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그 부모는 심히 근심(슬퍼)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부모의 부모님은 두 배로 근심(슬퍼)합니다. 그 이유는 사랑하는 손자가 병들어 죽게 되었기에 근심하는 가운데 그 손자를 보고 심히 근심하는 자식을 생각할 때 근심(슬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심정(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울이나 에바브로디도나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근심을 아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사 에바브로디도의 생명을 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 27절에서 하나님께서 에바브로디도를 긍휼히 여기셨을 뿐만 아니라 바울도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다 고 말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28절을 보면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다시금 빌립보 교회로 서둘러 돌려보낸다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말한 것(28절, 현대인의 성경)을 보면 에바브로디도는 적어도 빌립보 교회로 다시 돌아갈 정도로의 건강은 회복된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서둘러 빌립보 교회로 다시 돌려보내려고 했습니까?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2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그를 보낸 것은 너희로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내가 서둘러 그를 돌려보냅니다. 여러분이 그를 다시 보게 되면 기뻐할 것이며 내 근심도 덜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서둘러 빌립보 교회로 다시 돌려보내려고 했던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에바브로디도를 보고 기뻐하게 하며 또한 자신의 근심도 덜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에바브로디도를 다시 빌립보 교회로 돌려보내면서 그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로 권면하였습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29절).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에바브로디도를 주님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영접하고 그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권면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30절을 보십시오: “그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에바브로디도나 주님 안에서 기쁨으로 영접하며 그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겨야 하는 이유는 그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였다’는 헬라어 단어(παραβουλευσαμενος)는 초대교회 형제애란 공동체에서 자기 자신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도 자원하는 마음으로 아픈 사람들을 돌보고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일을 섬겼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parabolani”라는 같은 단어에서 유래된 것입니다[Parabolani were the members of a Christian brotherhood who is the Early Church voluntarily undertook the care of the sick and the burial of the dead, knowing full well they could die(Wikipedia)]. 이 말은 초대 교회 때에는 에바브로디도와 같이 자기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일을 하며 아픈 자들뿐만 아니라 바울과 같은 주님의 종들을 섬겼던 자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사람들을 “존귀히 여기라”고 말한 것입니다(29절).

 

우리는 에바브로디도와 같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에바브로디도처럼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않으면서 주님의 일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면으로 보면 우리가 주님을 일을 함에 있어서 무리할 필요도 있고 모험할 필요도 있고 위험을 무릅쓸 필요도 있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아끼지 않으시고 내주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생명을 주님께 받쳐서 주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것을 들어보십시오. 성경구절 두 군데를 보겠습니다: (행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21:13) “…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 …." 우리는 바울과 같은 사람,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사람을 존귀히 여겨야 합니다(빌2:29).

 

저는 “에바브로디도”란 인물에 대해서 묵상하면서 결론적으로 두 가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1) 첫 번째 생각은, 그 사람의 이름 뜻을 생각하면서 기도 제목으로 여러분과 함께 기도하고 싶습니다.

 

“에바브로디도”란 이름의 뜻은 바로 “사랑스럽다, 아름답다”입니다. ‘주님, 주님께서 주님의 몸 된 승리장로교회 안에서 “에바브로디도”와 같이 하나님 보시기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사람들을 세워주시옵소서.’ 세워주시되 주님의 종들과 함께 동역하며,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며 또한 그들의 쓸 것을 돕는 자들을 우리 가운데 세워주시길 함께 기도하십시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교회 식구들을 사랑하며 간절히 사모하는 자들로 우리 모두를 세워주시길 주님께 함께 기도하십시다. 또한 주님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면서까지 주님의 교회와 주님의 종들을 섬기는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하나님 보시기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들을 우리 가운데 세워주시길 함께 기도하십시다.

 

(2) 마지막 두 번째 생각은, 하나님께서는 병들어 죽게 된 에바브로디도를 긍휼이 여기시사 그의 생명을 아끼시사 살려주셨는데 독생자 예수님은 아끼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성경 로마서 8장 32절을 보십시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시고자 예수님께서는 자기 목숨을 돌보지 아니하시고 저와 여러분을 구원해 주시고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이 크신 사랑과 구원의 은총을 받은 저와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새찬송가 213장 “나의 생명 드리니”가 우리의 헌신 기도와 찬양이 되길 기원합니다:

 

1.나의 생명 드리니 주여 받아 주셔서 세상 살아갈 동안 찬송하게 하소서

  1. 손과 발을 드리니 주여 받아 주셔서 주의 일을 위하여 민첩하게 하소서
  2. 나의 음성 드리니 주여 받아 주셔서 주의 진리 말씀만 전파하게 하소서
  3. 나의 보화 드리니 주여 받아 주셔서 하늘나라 위하여 주 뜻대로 쓰소서
  4. 나의 시간 드리니 주여 받아 주셔서 평생토록 주 위해 봉사하게 하소서 아멘.

 

 

 

 

주님께서 주신 새 생명을 주님께 다시 돌려드리기를 헌신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주일 오후 사랑하는 고 임봉희 할머님을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