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서 212-18]

 

 

당신은 구원을 받으셨습니까? 성경 사도행전 4장 12절을 보면 “다른 이에게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하늘 아래에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이 인간에게 주어진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현대인의 성경)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성경은 오직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10절)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오직 “주 예수의 은혜로”(행15:11)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엡2:8). 성경 베드로전서 1장 9절은 믿음의 결국은 곧 영원의 구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12절을 보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현대인의 성경) “사랑하는 여러분, 그러므로 여러분은 내가 그곳에 있을 때뿐만 아니라 내가 없는 지금에도 더욱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의 구원을 계속 이루어 가십시오”].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제목 아래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12-18절 말씀을 묵상하면서 주님이 우리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먼저 우리가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너희 구원을 이루라”(work out your salvation)는 말씀의 뜻이 무엇인가 입니다.

 

제가 이 말씀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이유는 좀 분명히 해야 할게 있기 때문입니다.

 

(1) 무엇을 분명히 해야 하는가 하면 첫째로 지금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할 때에 행함(선행)으로 구원을 받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바울이 쓴 다른 편지들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2장 8-9절을 보면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지 결코 우리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또한 로마서 3장 22-24절을 보면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값없이 의롭다 하심 얻은 자”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했을 때에는 결코 행함으로 구원을 얻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사실입니다.

 

(2) 우리가 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구원이란 과거, 현재, 미래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구원의 3시기 중 주로 과거와 미래만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구원의 과거는 무엇입니까? 구원의 과거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성경구절이 바로 “구원이 확신” 구절인 요한일서 5장 12-13절입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을 보면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이미 영생(구원)을 얻었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앞으로 장차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미래입니다. 그 대표적인 성경구절들이 바로 사도행전 16장 31절과 로마서 10장 9절입니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행16:31),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10:9). 이 두 말씀들을 보면 주 예수님을 믿으면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고 앞으로 장차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미래형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미래형 구원을 우리는 장치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면(재림) 우리를 영원한 하늘나라로 인도하시사 그 천국에서 영원토록 사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구원”을 주로 예수님을 믿으면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과 앞으로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신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바울이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의 현재형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지금 현재 구원을 이루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구원을 이루라”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말하였는데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구원은 사람들이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예를 들어 요나 2장 9절 하반절을 보면 성경은 “…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현대인의 성경) “구원은 여호와께서 주시는 것입니다”](Salvation is from the Lord)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7장 10절 보면 성경은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보면 우리는 구원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주시는) 것이지 죄인 된 우리 인간이 노력(선행)을 하므로 우리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닌 것을 명백히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바울은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성경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분명히 성경은 구원은 하나님께서 이루시(주시)는 것인데 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너희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힘(노력)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뜻입니까? 그것은 말이 안 되잖습니까. 분명히 구원은 사람이 이루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인데 말입니다. 실제로 바울은 우리가 이미 묵상한 빌립보서 1장 6절에서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 우리는 확신하노라”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께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 안에 시작하신 구원의 일을 그리스도 예수님의 날인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이루신다는 확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잖습니까.

 

과연 바울이 말하고 있는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의 뜻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 말씀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원”이 무엇인지를 좀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구약성경에서 “구원”이란 말은 히브리어 “예수아”란 말로서 이는 죄와 위험한 환경으로부터 구출해 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는 “구원”이란 헬라어의 “소테리아”란 말인데, 이는 죄로 말미암아 오는 형벌(죄의 형벌)과 죄의 권세와 죄 된 생활에서부터 구출하여 영원한 천국백성으로 살게 한다는 의미로 쓰여졌습니다(인터넷). 저는 “구원”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생각할 때 로마서 5장 6, 8, 10절 말씀에 근거해서 한번 생각해 보았습니다:

 

(1) 로마서 56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helpless)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는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이 말씀에 비춰볼 때 구원이란 전적으로 무기력(helpless)하고 경건하지 않는(ungodly) 우리를 하나님께서 도우사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 건져내시사 우리를 경건한 자(godly)로 삼으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로마서 5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이 말씀에 비춰볼 때 구원이란 죄인 된 우리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게 하시므로 우리를 의롭다하신 것입니다(9절). 이 말은 구원이란 헬라어 “구원”이란 단어의 의미처럼 우리를 죄의 형벌과 죄의 권세와 죄 된 생활에서부터 구출하셨다는 의미일 뿐만 아니라 더 나가서 우리를 의롭다하셨다는 사실까지 포함하는 것입니다.

 

(3) 로마서 510절을 보십시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이 말씀에 비춰볼 때 구원이란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사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저는 이 현재형 “구원”은 바로 “영생” 즉, 영원한 생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당신들의 영원한 생명을 이루십시오’라고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가 조금 전에 생각해 본대로 성경에서 구원을 미래형으로 말씀하고 있는 성경구절들을 볼 때 구원이란 장차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면(재림) 우리를 영원한 하늘나라로 인도하시사 그 천국에서 영원토록 사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도 요한일서 5장 12-13절 말씀에 근거해서 생각하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미 영생(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과거형 구원이나 미래형 구원이나 우리가 “구원”을 “영원한 생명”으로 이해할 때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는 말씀을 일관성 있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너희는 영원한 생명을 이루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우리에게 적용한다면 지금 성경은 우리에게 ‘당신들은 영원한 생명이 있는 자들답게 사십시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 적용 한다면, 지금 성경은 우리에게 ‘여러분, 천국 백성답게 사십시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두 번째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을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나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영원한 생명이 있는 자들답게, 즉 천국 백성답게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이냐 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천국의 계명인 예수님의 이중계명을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경 마태복음 22장 37-39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즉, 우리가 이 땅에서 천국 백성답게 영생을 얻은 자로서 살아간다는 말은 하나님을 우리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사랑하며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 같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우리로 하여금 가능케 하십니까?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13절을 보십시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현대인의 성경) “하나님은 자기의 선한 목적에 따라 여러분이 자발적으로 행동하도록 여러분 안에서 일하십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행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우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욕도 주시고, 또 그것을 행할 힘도 주신다는 뜻입니다”(박윤선). 어떻게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고자 하는 의욕과 힘을 주십니까? 바로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열매인 사랑을 맺으시사(갈5:22-23)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며 또한 이웃을 사랑하게 만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문제는 우리가 성령을 따라 행하지 않고(갈5:16) 오히려 성령을 거스르고 육체의 소욕을 따라(17절) 육체의 일을 행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19절). 그 육체의 일 중에는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20절)이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가 빌립보 교회 안에도 있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 중 “유오디아”와 “순두게”란 이름을 언급하면서 그들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하면서(빌4: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2:2-3)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빌립보서 1장 15절을 보면 바울은 “어떤 이들은” 옥게 갇혀 있는 바울을 더욱 괴롭힐 생각으로 “투기(시기)와 분쟁(다툼)으로”(17절)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with fear and trembling)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한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속죄하여 주신 사랑을 입은 자들”로서(박윤선)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함께 있을 때뿐 아니라 없을 때 더욱더 항상 복종하여 “하나님을 경외함”(시2:11)과 겸손한 마음으로(a humble frame of mind)(Pfeiffer) 영원한 생명을 얻는 자답에 서로 사랑하며 살라는 말입니다. 바라기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자들로서 내주하시는 성령님을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기원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어떻게 서로 사랑하며 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까? 3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바울은 그들에게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14절을 보십시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현대인의 성경) “무슨 일이든지 불평이나 다툼으로 하지 마십시오”](Do all things without grumbling or disputing). 헨리 나우웬은 그의 책 “삶의 영성”에서 이러한 말을 하였습니다: “원망은 우리를 실패나 실망에 집착하게 하며, 삶에 찾아오는 상실에 대해 불평하게 한다"(나우웬). 공감이 되는 말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제가 원망을 했을 때 제가 실패나 실망에 집착했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헨리 나우웬의 말처럼 삶에 찾아오는 상실에 대해 제가 불평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언젠가 묵상했던 신명기 1장 27절 말씀을 찾아 보았습니다: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는 고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붙여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저는 이 말씀 중심으로 “원망의 죄”란 제목 아래 말씀을 묵상한 적이 있었는데 그 묵상한 글을 다시금 읽어 보았습니다. 왜 우리가 원망하는가 하면 그 이유는 우리의 "불신앙"이 그 원인입니다. 신명기 1장 32절을 보면 성경은 "이 일에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불신앙이 바로 원망의 쓴 뿌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려운 현실을 접하면 "왜?"라는 질문 속에서 원망하면서 우리의 피해의식을 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14절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빌립보 교회 안에 원망(불평)과 시비(다툼)가 있었음을 암시해 줍니다. 실제로 바울은 빌립보서 2장 3절에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 고 말한 것을 보면 그 교회 안에는 불평과 다툼이 있었음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다툼의 불평과 다툼의 원인은 바로 허영심이었습니다(3절). 즉, 교회 안에 분수에 넘치고 실속이 없이 겉모습뿐인 영화를 추구하는 사람이 있다면 교회 안에서는 불평과 다툼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빌립보 교회가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 내려 가면서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무슨 일이든지 불평이나 다툼으로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한 것입니다(14절).

 

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 말한 것인가요? 왜 그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말한 것인가요? 그 이유를 바울은 오늘 본문 15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현대인의 성경) “그러면 삐뚤어지고 잘못된 세대 가운데서 여러분이 흠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깨끗하고 순수하게 살 수 있을 것이며 하늘의 별처럼 빛날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어그러진(삐뚤어진) 세상’입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르고 곧은길로 가지 않고 구부러진 길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구부러진 길이 바른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절대 진리를 부인(거부)하고 거짓을 진리로 여기고 있습니다. 마음도 삐뚤어져 있습니다. 마음이 삐뚤어져 있기에 말과 행동 다 삐뚤어져 있습니다. 이렇게 어그러진 세상에서 과연 우리 크리스천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는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예수님의 빛을 나타내며 살아가야 합니다(빌2:15).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모든 일을 원망(불평)과 시비(다툼)가 없이 해야 합니다.

 

둘째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생명의 말씀을 밝히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16절을 보십시오: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현대인의 성경) “그렇게 되면 생명의 말씀을 밝히게 되어 내가 노력하고 수고한 일이 헛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나에게 자랑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생명의 말씀”이란 “복음”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밝혀”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기서 “밝혀”라는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다른 사람들에게 제의하다/권하다’(offering something for others to take)입니다(MacArthur). 동시에 이 단어에는 “견고히 붙잡다”(hold firmly)란 뜻도 포함돼 있습니다(Walvoord).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을 견고히 붙잡고 그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라는 말입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 기독신자는 그 존재와 행위로써 복음이 참으로 생명과 능력을 주는 말씀인 것을 실증해야 된다. …”(박윤선).

 

어떻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우리의 존재와 행위로써 복음이 참으로 생명과 능력을 주는 말씀인 것을 실제로 증명해 보일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 교회가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 뿐 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는 것입니다(빌2:2-4).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 14절에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모든 일을 원망(불평)과 시비(다툼)가 없이 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다툼이 없이 할 때에 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예수님의 빛을 나타내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성경은 생명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은 바울은 빌립보서 1장 5절에서 이미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다 라고 말을 했는데 왜 오늘 본문 2장 16절에 와서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말한 것일까 라는 의문이 듭니다. 저는 그 이유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복음 전파 사역에 동참을 하고 있었지만 그 복음에 견고히 서서 복음의 합당한 삶을 사는데 부족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즉, 그들은 한 마음을 품어 한 사랑으로 겸손히 원망과 시비가 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빌립보 교회의 결점(단점)은 복음 전파 사역에 결코 도움이 될 수가 없기 때문에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모든 일을 원망과 다툼이 없이 하라고 권면한 후 생명의 말씀인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도 바울은 생명의 말씀인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권면한 것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16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현대인의 성경) “… 내가 노력하고 수고한 일이 헛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 나에게 자랑할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할 때에 바울은 자기의 노력하고 수고한 일이 헛되지 않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재림) 자기에게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쓴 편지를 보면 그는 그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살전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현대인의 성경) “우리 주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 누가 우리의 희망과 기쁨과 자랑이 되겠습니까?”].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그들이 자기의 소망과 기쁨, 그리고 “자랑의 면류관”이라고 말하였는데 빌립보서 4장 1절에서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현대인의 성경)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나의 기쁨이며 면류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님 안에 굳게 서십시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바울에게 있어서 그의 기쁨이요 (자랑의) 면류관이었습니다. 특히 바울은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들로써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이 세상에서 복음의 빛을 발하면서 살아가는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재림 때에 그 성도들이 자기의 자랑의 면류관이었기 때문입니다. 새찬송가 502장 “빛의 사자들이여”란 찬송가 가사가 생각납니다: (1절) 빛의 사자들이여 어서 가서 어둠을 물리치고 주의 진리 모르는 백성에게 복음의 빛 비춰라, (2절) 선한 사역 위하여 힘을 내라 주 함께 하시겠네 주의 크신 사랑을 전파하며 복음의 빛 비춰라, (3절) 주님 부탁하신 말 순종하여 이 진리 전파하라 산을 넘고 물 건너 힘을 다해 복음의 빛 비춰라, (4절) 동서남북 어디나 땅 끝까지 주님만 의지하고 눈 어두워 못 보는 백성에게 복음의 빛 비춰라, <후렴> 빛의 사자들이여 복음의 빛 비춰라 죄로 어둔 밤 밝게 비춰라 빛의 사자들이여.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예수님을 모르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사랑하므로 그들에게 생명의 말씀인 복음의 빛을 비추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함께 기뻐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17-18절을 보십시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현대인의 성경) “여러분의 믿음의 재물과 봉사 위에 내 생명의 피를 제사 술처럼 따라 붓는다고 해도 나는 기뻐하고 여러분 모두와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 바울에게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비록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었던 이 순간에도 그는 복음을 전하다가 옥에 갇혀 있는 상태였지만 그에게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를 대적하는 자들이 있었고(1:28) 그 대적 자들로 인하여 바울은 고난을 받는 가운데서도(29절) 그에게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바울은 골로새서 1장 24절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지금 나는 여러분을 위해 받는 고난을 오히려 기뻐하며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인 교회를 위해 받으신 고난에 남은 부분을 내 몸으로 겪고 있습니다”(현대인의 성경). 또한 바울은 고린도후서 7장 4절에서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을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현대인의 성경) “나는 여러분을 크게 신뢰하고 자랑하며 많은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온갖 어려움을 당하면서도 기쁨이 넘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17절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내려가면서 그들의 믿음의 제물과 섬김(봉사) 위에 자기 자신을 전제로 드릴지라도 자기는 기뻐하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전제”(a drink offering)란 “재물 위에 붓는 술”로서 바울은 지금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자기 자신의 피를 제물로 부은바 될지라도 자기는 기뻐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박윤선). 그 말은 한 마디로, 바울은 자기가 순교한다 할지라도 기뻐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과 함께 기뻐하길 원했습니다(17절).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그러므로 여러분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십시오”(18절, 현대인의 성경)라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신앙생활을 한 교회에서 한다는 것은 우리가 함께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모두가 생명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입술로 전할 뿐만 우리의 삶으로 복음을 실제로 증명해 보이는 가운데 대적 자들로 인하여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바울의 말처럼 우리 가운데 주님의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다가 심지어 순교를 한다 할지라도 우리를 주님 안에서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구체적으로 서로 사랑하며 사는 삶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우리 구원을 이루는 삶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이루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가 되길 기원합니다.

 

 

 

 

나의 구원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 공동체의 구원을 함께 이루길 기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이미 영원한 생명을 받은 천국 백성답게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기쁨을 맛보길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