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빌립보서 25-11]

 

 

당신은 건강하십니까? 우리 모두가 건강에 관심이 있을 것입니다. 저 또한 30대 후반부터 건강에 관심을 가지고 건강관리 차원에서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육신의 건강보다 마음의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지 점점 더 깨닫고 있습니다. 그러한 깨달음을 준 성경 말씀이 바로 잠언 4장 23절입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어떻게 우리 마음을 잘 지킬 수 있을까요? 어떻게 우리는 마음의 건강관리를 해야 할까요? 언젠가 “마음을 잘 지켜야”란 제목 아래 이런 짧은 글을 써서 나눈 적이 있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의심이 들기 시작하면 그 의심은 불신으로, 불신은 불만족 속에서 불평과 원망으로, 그리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건강보다 마음을 더 잘 지켜야 합니다.” 지금 당신의 마음은 건강합니까? 우리의 마음이 건강할 때 교회도 건강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건강한 마음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는 마음이요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형제, 자매를 사랑하는 마음이 건강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너희가 내 마음에 있”다(빌1:7), “한마음으로 서”있으라(27절), “한 마음을 품”으라(2:2), “마음을 같이하”라(2절)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간곡히 권면하였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저는 이 말씀 중심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란 제목 아래 우리 모두가 품어야 할 예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한 3가지로 묵상하면서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아 순종하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우리 모두가 품어야 할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은 다른 사람들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6절을 보십시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금년 10월 28일 스위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14년판 국가별 남녀평등 순위에서 한국이 조사대상 142개국 가운데 117위에 올랐다고 합니다. 한국의 남녀평등 순위는 지난해 111위에서 6계단 떨어졌다고 합니다. 남녀평등 순위는 고용, 취학 기회, 건강, 정계진출 등에 따른 성별 간 격차를 수치화해 순위를 정한다고 하는데 한국이 남녀평등 순위가 최하위 권에 머문 가운데 아이슬란드가 1위를 차지했고 뒤이어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등 북유럽 국가들이 톱 5에 올랐다고 합니다. 아시아에선 필리핀이 9위로 가장 높은 순위를 자랑했고, 중국이 87위, 일본이 104위에 이름을 올렸다고 합니다(인터넷). 그러면 한국이 남녀평등 순위가 그리도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불평등의 이유 중 제일 큰 이유는 바로 “성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이라고 합니다(47.8%). 그 다음 이유들은 “남녀의 신체적 차이”(22.5%), 사회 및 인간관계에서의 차이”(10.8%), “가사 및 유아부담의 남녀 차이”(9.3%) 등이라고 합니다(인터넷).

 

성경에서는 남녀평등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다보면 성경에서는 여성을 차별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한 예로 고린도전서 14장 34절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여자는 교회 안에서 잠잠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러한 성경 말씀은 충분히 교회 안에서 여성을 차별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이상원 교수님에 의하면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바울의 “잠잠하라”는 명령은 여자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 명령은 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여자는 교회 안에서 잠잠하라”는 말씀 바로 앞 구절에 “모든 성도의 교회에서 함과 같이”(33절)라는 말씀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왜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모든 성도들에게 “잠잠하라”고 명한 것입니까? 그 이유는 그는 고린도교회 안에는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너도 나도 다 방언을 하니까 교회가 너무 무질서해졌기에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공 예배에서는 방언을 자제하라는 뜻에서 모든 교인들에게 ‘잠잠하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그런데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 중에는 특히 여자 성도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여자 성도들을 특별히 지칭하여 잠잠하라는 명령을 한 것입니다. 즉, 방언을 하려거든 조용히 다른 사람에게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하라는 말이지 결코 여자가 교회 안에서 말하거나 동료 성도들을 가르치는 일을 못하게 하는 명령이 아닌 것입니다(인터넷). 성경 창세기 1장 2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대로 “사람”인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평등하게 창조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에게 각각 그 성에 맞는 다른 개성과 특징과 기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는 공동으로 협력하여 하나님이 주신 소명을 이룰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 한 예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소명을 주셨는데, 이 소명은 남녀 혼자는 절대로 이룰 수가 없습니다. 남자가 공급하는 정자와 여자가 공급하는 난자가 만나야 아기를 낳을 수 있잖습니까. 아기를 낳아야 하나님의 명령대로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지 않습니까(인터넷).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성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즉, 우리는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은 본질에서는 동일하십니다[서로 동등한 세 위격(persons)].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제 6문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몇 인격들이 계신가?”라는 질문이 있는데 그 답은 이렇습니다: “하나님께는 세 인격들, 즉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계시는데, 이 셋은 본체에 있어서 동일하시며, 능력과 영광에 있어서 동등하신, 한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동등하신 한 하나님이신 성부 하나님,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은 역할이 다른 세 위격이시며 하나의 존재(being)이십니다[신격의 하나 됨(unity)]. 그러면 어떻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할이 다른가요? 그 좋은 예가 바로 성삼위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과 역사를 보면 좀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심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은 구원의 계획을 세우셨고, 성자 예수님은 그 구원의 계획을 이루셨으며, 성령 하나님은 그 구원을 적용하신다(참고: 롬8:1-17; 고후13:14; 엡1:3-14; 살후2:13-14, 벧전1:2) (패커). 우리가 믿는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삼위의 협동적인 역사를 이루시는 성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성부 하나님을 믿고, 성자 예수님을 믿으며 또한 성령 하나님을 믿습니다(참고: 사도신경). 그런데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6절을 보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셨다는 말씀의 뜻은 예수님께서 영광에 있어서 성부 하나님과 동등하시지만 그 동등한 하나님의 영광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박윤선). 그러면 여기서 왜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리스도의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5절에서 말씀한 후 6절에서 예수님께서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영광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동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고 말하였을까요? 저는 그 이유를 3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지금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 고 말하고 있는데 그 말은 오늘 본문 5-6절에 비춰서 생각하면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 다른 사람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신 그리스도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품어서 너희들도 다 동등하지만 서로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말로 다른 형제, 자매를 자신보다 낫게 여기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 갈라디아서 3장 28절을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 딸들이 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남자이던 여자이던 한국인이던, 미국인이던 남미 사람들이던 사장님이던 종업원이던 부자이던 가난하든 이 모든 것을 떠나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다 하나입니다. 결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차별이 없습니다(롬10:12, 골3:11).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차별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약2:1). 만일 우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9절). 그러나 우리는 분별해야 합니다. 무엇을 분별해야 합니까? 우리는 구별된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로서 거룩하고 속된 것, 부정하고 정한 것을 분별해야 합니다(레10:10).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분별력을 가지고 우리는 세상과 분리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결코 우리는 교회 안에서 형제, 자매들과 서로 나뉘고 분리하며 세상과는 하나가 되어 사는 죄악 된 삶을 끓어 버리고 형제, 자매들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된 것을 잘 지켜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 모두가 품어야 할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은 우리 자신을 비워 종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혹시 “왕자와 거지”라는 동화 이야기 아십니까? 왕자와 거지가 만나서 서로 옷을 바꿔 입고 왕자가 거지생활을 하다가 왕자로 돌아가려고 노력을 하고, 거지는 왕자가 되어 정치를 조금씩 이해해가는 상황 이였습니다. 왕자는 처음 거지생활에 익숙지 못하고 여러 사람에게 "나는 왕자다"하면서 왕자라는 것을 밝히려 하지만 오히려 미친놈 취급을 받아 여러 사람에게 미움을 받습니다. 그때 거지는 점점 왕자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나라 일을 조금씩 해나갔지만 거지역시 "나는 한낮 거지에 불과합니다"라고 사실을 밝혔지만 사람들은 "왕자님께서 미치셨다!" 라고 생각하고 더 잘 모시려고만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이야기 끝에 왕자와 거지는 만나게 되었고 서로 만나서 왕자는 다시 왕자 아니 왕으로 되었습니다. 왕자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고 끝까지 버텼기 때문에 결국에는 왕이 되었습니다(인터넷). 이 동화이야기가 생각난 이유는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7절에서 성경은 예수님께서 “근본 하나님의 본체”(being in very nature God)신되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제(taking the very nature of a servant)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왕자가 거지 생활을 했다는 것과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종이 되셨다는 것과는 천지 차이가 있겠지만 조금이나마 예수님의 성육신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기에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7절을 보십시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but emptied Himself, taking the form of a bond-servant, and being made in the likeness of men. (NASB)].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을 가리켜 “성육신”(incarnation)이라고 말합니다. 성육신이란 요한복음 1장 14절에 있는 말씀에 근거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사건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세상의 창조 이전부터 계신 분이며, 이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을 뿐만 아니라 이 말씀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요 1:1). 요한의 증언에 따르면,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은 이 말씀을 통하여 지음을 받았습니다(요 1:3). 이 말씀은 이제 육신이 되어서 사람들 사이에 거하셨는데, 이 말씀은 참 빛이며 모든 사람들의 생명입니다. 육신이 되신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로서 우리에게 오셨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사건이 곧 성육신의 사건입니다. 성육신의 개념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신 것, 곧 자기를 비워 모든 조건에서 인간과 같이 된 것을 의미합니다. 성육신은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이 지음을 받은 존재 가운데 하나가 되었음을 뜻합니다(인터넷). 여기서 예수님께서 “자기를 비”우셨다[made himself nothing/emptied himself]는 말씀은 하나님의 성품이나 본질 등 하나님의 “정체”를 비우셨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만 내어 놓으셨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신성을 내어 놓으셨다는 의미가 아니고 하늘 영광을 떠나셨다는 것입니다(박윤선). 이렇게 하늘 영광을 다 내려놓으시고 “근본 하나님의 본체”(being in very nature God)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사 “종의 형체”(taking the very nature of a servant)를 가지셨다(빌2:6-7)는 말씀은 예수님께서는 “주님이시지만, 모든 것의 종이 되는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다”는 말입니다(박윤선).

 

놀랍지 않습니까?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종이 되는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다는 사실이요? 왜 예수님께서는 종의 되는 낮은 자리로 내려오신 것일까요? 마태복음 20장 27-28절을 보십시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주님이심에도 불구하시고 우리의 종이 되신 이유는 우리를 섬기려 하시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여기서 “대속 물”이란 헬라어의 의미는 노예나 포로를 해방할 때 지급하는 몸값(속적)을 가리킵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를 지은 우리를 죄의 노예(종)에서 해방(자유)시키시고자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걸머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말입니다. 주님이신 우리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땅히 섬김을 받으셔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우리를 섬기려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불러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막9:35). 지금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우리에게도 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섬기는 자가 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 이웃을 어떻게 섬길 수 있을까요?

 

2007년 우리 승리장로교회의 표어는 “섬기는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섬기는 교회로서 “겸손히 교회를, 즐거운 마음으로 가정을, 자발적으로 이웃을” 섬기자고 도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해 첫째 주간에 특별새벽기도회 때 하루하루 섬김에 대한 말씀 중심으로 설교를 했었습니다. 그 주간 셋째 날 에베소서 6장 5-7절 말씀 중심으로 설교를 했었는데 새벽기도회 후 교회 집사님 한분이 이런 글을 써서 이 메일로 보내셨습니다: “각자의 삶 속에서 --- 가정과 사회, 직장 또 교회에서 --- 우리가 섬겨야 할 대상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들을 섬겨야 합니까? 우리는 순종함으로 그들을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순종하지 못함은 내 뜻과 내주장이 너무 뚜렷하고 강하기 때문입니다. 직장상사에게, 학교 선생님들에게, 부모님께, 교회의 목사님과 어른들께 순종하지 못함은 우리에게 종의 의식, 노예의식의 결여로 인함입니다. 또한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을 주인으로 섬기며 그에 대한 순종의 훈련이 부족함 때문이기도 합니다”(김창만).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5절에서 자기나 아볼로나 “사역자”(servants)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사역자”란 헬라어 단어는 “diakonoi”으로서 우리가 익히 들어 아는 “deacon”, 즉 “집사”란 말이 그 단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섬기는 사람들’라는 뜻입니다. 그런 후 바울은 고린도전서 4장 1절에서 자기와 자기의 동역자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일꾼”(servants of Christ)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영어로는 “사역자”나 “일꾼”이나 다 “servants”, 즉 ‘섬기는 사람들’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나 원어 헬라어를 보면 “사역자”란 ‘섬기는 사람들’이란 뜻이지만 “일꾼”이란 좀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일꾼”이란 헬라어 단어 “huperetes”는 문자적 의미는 배 밑에서 ‘노 젓는 사람’(under rowers)을 뜻합니다. 죤 맥아더 목사님에 의하면 그 당시 배 밑에서 노 젓는 노예들은 제일 천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요, 아무도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이요 또한 제일 경멸을 받는 사람들이였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단어가 나중에 와서는 모든 권위에 절대 복종하는 사람을 가리키게 된 것입니다(MacArthur). 결국 바울은 자기나 아볼로나 베드로를 자랑하는 육신에 속한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자기나 자기의 동역 자들은 그리스도의 “하인”(또는 “하급 노예”)(박윤선)로서 주님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주님의 노예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꾼들로서 주님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주님의 노예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노예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언젠가 제가 설교하면서 우리에게는 “노예근성”이 필요하다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왠지 우리는 노예근성이나 노예 의식보다 ‘주인 근성’과 ‘주인 의식’이 더 많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을 섬기는지 아니면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섬김을 받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섬김의 의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종의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 의식을 가지고 우리는 형제, 자매들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말고 그/녀를 나보다 낫게 여기면서 겸손한 마음으로 섬겨야 합니다.

 

한 3년 전에 사랑하는 딸 예리가 귀걸이를 하기 전에 제가 출애굽기 21장 1-6절에 나오는 말씀을 이야기를 얘기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 성경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의 법규가 나오는데 그 법규란 히브리 종을 사면 그는 6년 동안 섬기다가 7년째에는 자유인이 되는 것입니다(2절). 그런데 만일 그 종이 “내가 상전과 내 처자[만일 상전이 그에게 아내를 주었다면 그녀는 상전에게 속하기에 그와 함께 자유인이 될 수 없기에(4절)]를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인이 되지 않겠노라 하면”(5절) 상전이 그를 데리고 재판장에게로 갈 뿐만 아니라 그를 문이나 문설주 앞에서 데리고 가서 그것에다가 송곳으로 그의 귀를 뚫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종신토록 그 상전을 섬기리라”(6절)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예리에게 말해주었는데 감사하게도 그녀는 그 성경 말씀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딸아이에게 ‘만일 네가 귀걸이를 꼭 하고 싶다면 그 성경 말씀에 나오는 노예처럼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께 종이 되겠다는 헌신을 해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러면 이 아빠는 네가 귀걸이 하는 것을 허락하마’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이 성경 이야기를 생각할 때 그 말씀에 근거하여 만든 미국 복음성가 “Pierce My Ears”(내 귀를 뚫으소서)라는 찬양이 생각납니다. 그 가사를 제가 한국어로 번역해 보았습니다: (1절) 오 주님 나의 하나님/ 이 날 저를 당신의 문으로 데리고 가소서/ 저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않겠습니다/ 주님 저는 머무르고자 여기에 있습니다, (2절) 당신은 저를 위하여 값을 치루셨습니다/ 당신의 피로 저를 구속하셨습니다/ 이제 저는 당신만 영원히 섬기겠습니다/ 주님 저는 머므르고자 여기에 있습니다, (후렴) 그러므로 오 주님 나의 하나님 저의 귀를 뚫으소서/ 이 날 저를 당신의 문으로 데리고 가소서/ 이제 저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않겠습니다/ 오 주님 저는 머무르고자 여기에 있습니다.’ 언젠가 새벽기도회 때 이 찬양을 부를 때에 제 마음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이 생각났습니다.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었던 저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 그 예수님으로 인하여 영원히 죄의 종노릇 할 수밖에 없었던 제가 구원을 받아 죄에서 자유를 누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다는 사실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출애굽기 21장에 나오는 종이 “내가 상전과 내 처자를 사랑하니” 제 칠년 째 자유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유하기를 거부하고 사랑하는 상전을 영영히 섬기고자 송곳으로 귀를 뚫은 것처럼 저 또한 제가 사랑하는 주님과 제 아내와 자녀들을 위하여 자유하기를 거부하고 영영히 주님을 섬기겠노라고 마음의 귀를 뚫었습니다. 온전히 제 마음을 받쳐 영영히 주님만을 섬기고 싶은 마음을 주님께 고백했습니다. 이러한 고백 가운데서도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제 마음에 주님의 종으로서 노예 의식(slave consciousness)보다 상전 의식(master consciousness)이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을 보게 해주시면서 저의 죄를 자백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께서 빌립보서 2장 4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구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상전 의식을 버리고 노예 의식을 가지고 겸손히 주님을 섬기십시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이웃을 섬기는 우리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우리 모두가 품어야 할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은 우리 자신을 낮춰서 죽기까지 주님께 복종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8절을 보십시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을 헛되이 경배하는 자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멉니다(마15:8-9). 그들은 말만 하고 행자지 않습니다(23:3). 그리고 그들은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높임을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5-7절). 그래서 그들은 구제할 때에도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합니다(6:2). 이것이 바로 우리의 죄악 된 본능입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는 사람들 중에 높임을 받고자 바리새인들처럼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듯 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돈을 섬기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눅16:13). 이렇게 그들이 돈을 섬기는 이유는 “돈이 힘이다”(Money is power)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돈으로 사람들 중에 높임을 받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마치 성경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이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줄로 생각한 것처럼(행8:20) 심지어 그들은 교회 안에서는 돈으로 직분을 사서 사람들 앞에서 높임을 받으려고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누가복음 16장 15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우리는 이러한 교만한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교만한 사람의 높임 받기를 원하는 마음은 결코 만족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으려는 허영심은 결코 만족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결코 영광을 탐내서는 아니 됩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영광을 탐내지 않고 영광을 버리는 행동 원리는 멀리서부터 교만을 예방한다”(박윤선). 우리는 겸손한 사람이 돼야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우리 자신을 낮춰야 합니다. 우리는 낮아지고 또 낮아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빌2:5).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시자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6-7절). 그리고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8절에서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시사 자기를 낮추시고 저주의 나무인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 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오늘 본문 빌립보서 2장 9-11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예수님의 겸손의 결과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승천하셨고, 모든 무릎이 그에게 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인생의 힘든 시기 가운데서 가르쳐 주셨던 교훈 중 하나는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기보다 하나님께 높임을 받는 것이 훨씬 더 낫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높임을 받기 위해선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낮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겸손할 때에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높이신다는 것입니다(참고: 빌 2:5-11). 그러 면에서 위기는 기회입니다. 위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겸손케 하시는 기회입니다. 그리고 위기는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시는 좋은 기회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우리 자신을 비워 사람들 앞에서 우리 자신을 낮춰야 합니다. 낮아지되 우리는 예수님처럼 겸손히 죽기까지 주님께 복종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품어야 할 마음은 그리스도의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은 다른 사람들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마음은 자신을 비워 종으로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품어야 할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은 우리 자신을 낮춰서 죽기까지 주님께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겸손, 겸손 또 겸손한 마음을 추구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