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이란? (3)

 

 

 

[빌립보서 127-30]

 

 

당신은 “고난”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경 시편 119편 71절 상반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It was good for me to be afflicted). 어떻게 고난당하는 것은 우리에게 유익일까요? 적어도 2가지입니다: (1) 첫째로, 고난의 유익은 나의 잘못됨을 깨우쳐 준다는 것입니다. 시편 119편 67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현대인의 성경) “주께서 나를 벌하시기 전에는 내가 곧잘 잘못된 길로 갔으나 …]. 우리는 고난이 있기 전까지는 내가 그릇 행하고 있다(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물론 고의적으로 잘못된 길인 줄 알면서 그릇행할 때도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많은 때에 우리는 영적 장님과 귀머거리가 되어서 주님이 걸어가신 좁은 십자가의 길을 걷지 아니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쳐 우왕좌왕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주님이 허락해 주시는 고난을 통하여 우리는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마치 잘못된 길로 가는 양을 양치기 소년이 막대기로 쳐서 바른 길로 걷게 하듯이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주님은 고난이라는 막대기를 사용하시사 비뚤어 가는 우리를 바른 길로 걷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이사야 53장 6절에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우리가 다 양 같아서 그릇행하여 제 길로 갔거늘 ... .” 우리는 주님의 좁은 길이 아닌 세상의 넓은 길을 걸어갈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사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그릇 행함(잘못됨)을 깨우쳐 주십니다. (2) 마지막 둘째로, 고난의 유익은 주님의 말씀을 지키게 합니다. 시편 119편 67절을 보십시오: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Before I was afflicted I went astray, but now I obey your word). 여기서 우리는 한 여섯 가지로 어떻게 고난의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말씀을 지키게 하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1)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계명을 믿게 합니다.

시편 119편 66절을 보십시오: "내가 주의 계명을 믿었사오니 ... ."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우리의 그릇 행함을 깨우쳐 주는 고난은 우리고 하여금 U-turn을 만들게 하므로 주님의 계명만이 참된 길임을 믿게 합니다. 우리는 매일 둘 중의 하나의 길을 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의 좁은 길 아니면 세상의 넓은 길. 다시 말하면, 우리는 주님의 계명을 좇던지 아니면 사탄의 또는 세상의 말을 좇던지 둘 중의 하나의 선택을 매일 순간 순간하면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난은 우리의 잘못된 선택을 깨닫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 잘못된 선택의 결과인 사랑의 징계로서 우리로 하여금 바른 길, 주님의 길, 주님의 계명을 믿고 그 계명의 길을 걷게 합니다.

 

(2) 고난은 우리에게 "명철과 지식"을 가르쳐 줍니다.

 

시편 119편 66절을 보십시오: "...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 명철(good discernment), 즉 선한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무지한 가운데서 그릇된 길을 걷고 있는 우리 크리스천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영적 분별력 상실이란 영적 상태는 확신(conviction)이 아니 혼동(confusion)을 가지고 옵니다. 결국 주님의 계명의 길을 일관성(consistent)있게 걷지 못하게 합니다. 오히려 세상의 길, 혼동의 길을 방황하게 만듭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주님은 고난을 통해서 그 무지함과 선한 분별력의 상실의 늪에서 우리를 건져주십니다. 결국은 선한 영적 분별력과 주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주시므로 주님의 말씀을 향하여 달려가게 하십니다.

 

(3)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게 합니다.

 

시편 119편 68절을 보십시오: "주는 선하사 선을 행하시오니 ... .” 고난을 통하여 맛보는 주님의 선하심(시34:8) 중 제일 큰 유익 혹은 축복은 고난을 포함한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롬8:28) 좋으신(선하신)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제일 힘들고 괴롭고 지쳐 쓰러져 있을 때, 극심한 고통과 고난 중에 있을 때에 선하신 하나님의 영광은 더욱더 밝게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극심한 고난 중에도 "좋으신 하나님, 좋으신 하나님, 참 좋으신 나의 하나님"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4)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교만한 자의 거짓을 미워하게 만듭니다.

시편 119편 69절을 보십시오: "교만한 자가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하였사오나 ... .” 우리가 고난당하기 전에는 교만한 자의 거짓이 우리 귀에 너무나 분명하게 잘 들려서 그 교만한 자의 거짓된 길을 걷을 때가 수 없이 많습니다. 세상의 교만한 자들의 거짓, 너무나 진리같이 생각되어 그 거짓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릇된 길을 선택하는 혼동된 우리 크리스천들, 우리는 지금 그 거짓된 길을 분주하게 달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세상의 교만한 자들이 보여주는 거짓된 성공과 명예와 물질 만능주의의 길 ... 그러나 고난을 당한 후에는 그 모든 교만한 자의 거짓된 길을 미워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고난을 통하여 참된 길, 주님의 길을 밝히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길은 겸손하신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에서 보여주신 십자가의 좁은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의 결국은 죽음입니다. 이 얼마나 세상의 길의 결국과 다릅니까? 영적 매력을 느끼십니까? 우리의 가는 좁은 길의 climax가 죽음이라는 것 과연 저와 여러분들은 영적 매력을 느낍니까? 나 같은 죄인인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순교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매력을 느끼십니까? 이러한 진리는 아무나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교만한 자의 마음에 이러한 진리를 사수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하여 우리 주님은 우리 마음에 이 진리를 심고 계십니다. 그 심는 과정에서 우리 주님은 고난을 통하여 교만한 자의 거짓을 미워하게 만드시고 계십니다.

 

(5) 고난은 마음에 살찐 지방(fat)을 제거합니다.

 

시편 119편 70절을 보십시오: "저희 마음은 살찐 지방 같으나 ... .” 요즘 미국에서는 비만이 큰 문제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 빼겠다고 다이어트하고 운동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더 나아가서 "살찐 지방"을 제거하고자 수술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살찐 지방"을 제거하려고 노력을 기울이는 가운데서 우리 크리스천들도 동참하면서 "마음에 살찐 지방"은 제거하는데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육신의 "살찐 지방"이 붙어있으면 얼마나 이런 저런 불편함과 더불어 결국 이런 저런 성인병까지 걸립니까? 만일 우리가 마음의 살찐 지방은 우리의 신앙생활을 불편하게 하는 죄악 된 결과를 낳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죄악 된 결과를 가볍게 여기면 우리는 더 큰 죄를 낳을 위험이 많습니다. 이러한 영적 상태에서 고난이란 것은 마음에 살찐 지방을 제거하는데 필수적인 또는 최고의 약이라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마음에 살찐 지방들을 제거해야 합니다.

 

(6) 고난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의 최고의 가치를 깊이 깨닫게 해 줍니다.

 

시편 119편 72절을 보십시오: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승하니이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의 40년 고난을 통하여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신8:3)을 알려 주시길 원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또한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주님이 걸어가신 좁은 길, 즉 십자가의 길을 걸으면서 많고 다양한 고난들을 접하면서 결국 그 고난 중에 오직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만 살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때에 그 말씀의 가치란 것은 우리 생명보다 귀한 것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영원한 말씀과 이 땅에서의 우리 인간의 생명 연수와 어떻게 비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고난은 재물보다 이러한 말씀의 소중함 또는 말씀의 최고의 가치를 우리에게 깨닫게 해줍니다. 한 마디로, 고난이 우리에게 유익되는 것은 히브리서 5장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고난의 유익은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순종함을 배우게 됩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1장 27절 상반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 .” 우리는 이 말씀 중심으로 어떻게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하는지 이미 두 가지로 교훈을 받았습니다. 첫째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이란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한 마음, 한 뜻으로 서서 서로 협력하는 것입니다(빌1:27). 둘째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이란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것입니다(빌1:28).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것이란 그리스도를 위하여 믿음으로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1장 29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당신은 “고난”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009년 7월 즘에 저희 교회 집사님 한분이 이 메일로 보내신 글에 이러한 내용이 있습니다: “고난은 이생을 우리의 안식처로 착각하지 않도록 확실하게 막아줍니다.” 무슨 뜻일까요? 이 세상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신앙 때문에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우리는 이 세상이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가 아니고 잠시 머물렀다가 떠나는 거쳐 가는 곳임을 더욱더 실감합니다. 그리고 실감하면 실감할수록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에 나와 있는 믿음의 조상들처럼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인 “하늘에 있는 것”, 즉 영원한 안식처인 천국을 더욱더 사모하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고난은 이생을 우리의 안식처로 착각하지 않도록 확실하게 막아”준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1장 29절을 보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 내려가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한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무슨 말입니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주신 은혜는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믿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 믿음의 근거는 성경 말씀 에베소서 2장 8절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성경 말씀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결코 우리에게 난 것이 아니다 라고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진리는 우리가 다 믿고 받아들이는 진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빌립보서 1장 29절 하반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또 하나의 진리는 우리가 잘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진리는 바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우리이게 주신 은혜는 바로 예수님을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아니, 예수님을 믿으면 축복을 받아야지 왜 고난을 받아야 하느냐 라고 의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질문을 생각할 때 욥기 2장 10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가 이르되 그대의 말이 한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하지 아니하니라.”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 자체만 해도 하나님의 큰 은혜의 선물입니다. 그 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축복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사 창세전에 우리를 선택하시고 하나님의 때에 우리를 거듭나게(중생)하시사 예수님을 믿게 하시어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이미 우리는 받았습니다. 또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사 예수님을 닮아가게 하시는 이 놀라운 축복을 우리는 받았습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영적인 축복을 이미 받았습니다(엡1:3-6). 그러면 우리도 욥처럼 하나님께 축복만 받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복음을 위하여 고난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리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복음을 위하여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기 같이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비방하고 박해하던 폭행자, 즉 “죄인 중에 괴수”(딤전 1:15)에게 주님께서 긍휼과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를 충성되이 여겨 그에게 직분을 맡기시되 이방인의 사도로 삼아주신 것을 생각할 때 그는 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 예수님께 받은 사명인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자기의 생명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모든 환난과 고난을 당하면서도 계속해서 생명을 다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그가 당한 고난을 고린도후서 6장 4-5절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는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서는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for I bear on my body the marks of Jesus)고 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와 그 분의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많은 고난을 받은 바울은 오늘 본문 빌립보서 1장 29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면서 받는 고난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고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에 조금이나마 예수님의 제자로서 동참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여기고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 때에는 하나님이 크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고난당할 때에는 동일하신 하나님이 작게 보이고 오히려 우리의 고난이 너무나 크게 보입니다. 그 때 우리는 고난을 우리에게 유익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예수님처럼 순종함을 배워야 합니다. 순종함을 배우되 성경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빌1:27)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 마음, 한 뜻으로 서서 서로 협력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믿음으로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당신과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그리스도의 복음을 삶으로 전하는 승리공동체로 더욱더 세움 받길 간절히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