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빌립보서 112-19]

 

 

당신은 이번에 한국에 교황이 왔다 간 것을 다 아시고 계실 것입니다. 그 효과가 어느 정도 일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한 예가 기아 자동차 쏘울입니다. 그 이유는 교황이 방한 기간 중 대중과 가까이 하기 위해 방탄 처리가 되지 않은 검소한 자동차를 타고 싶다고 하여 기아 자동차 쏘올을 타고 다니므로 말미암아 막대한 간접 홍보 효과를 얻었다고 합니다. 특히 쏘울의 주요 판매 시장이 북미로(쏘울 수요의 80%가 미국) 한정돼 있었는데 이번 방한 기간 교황이 그 차를 타고 다니므로 말미암아 그 차의 이름과 모습이 전 세계 전해짐으로써 막대한 광고효과를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인터넷). 그 뿐아 아니라 실제로 교황의 방문을 앞둔 11일부터 교황이 출국한 다음날인 19일까지 영업일수 6일간 기아차 쏘올의 하루 평균 계약대수가 32.5대로 지난달 하루 평균 계약량 20대보다 62.5%나 증가했다고 기아차는 밝혔다고 합니다(인터넷). 저는 이러한 효과 외에 교황의 방한으로 인하여 카톡릭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실제로 지난 주 광화문 근처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어느 한 형제하고 카카오톡으로 대화를 했었는데 자기랑 같이 일하는 무신론자 회사 직원이 회식자리에서 교황이 좋다고 말했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그 회사 직원이 ‘기독교는 너무 이기적인 것 같다’고 말하면서 ‘목사들이 나쁜 짓도 많이 하고 그런데 천주교는 덜하다’고 말했나 봅니다. 저랑 대화했던 기독교인 형제가 큰일이라고 말하면서 “잘 모르는 무신자들이 천주교로 많이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을 염려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그 형제가 하는 말이 “지금 한국 기독교의 신뢰는 바닥입니다”였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기독교에 신물이 나서 천주교로 개종하겠”다는 사람도 있는가 봅니다. 당신은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당신도 지금 한국 기독교의 신뢰가 바닥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 형제에게 이렇게 권면하였습니다: “나 부터 직장에서 신뢰 받는 사람이 되야?” “말보다 행동으로? 이기적이기 보다 이타적인 섬김?” “인품으로” “소외된 사람에게 관심?” 어떻게 해야 우리 기독교인들이 다시금 신뢰를 회복할 수가 있을까요? 저는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진정한 회개가 없이는 회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들이 변화가 돼야 합니다. 우리가 변화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결코 세상 사람들에게 신뢰를 줄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기 위해선 먼저 디모데전서 4장 15절 말씀에 귀를 기울여 순종해야 합니다: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개혁한글)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우리의 진보를 모든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야 합니다(12절). 더 나아가서,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삶의 본이 돼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가 귀를 기울여 순종해야 할 또 다른 말씀은 바로 빌립보서 1장 25절 말씀입니다: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우리의 믿음의 진보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예수님의 말씀을 먹고(듣고) 믿음이 무럭무럭 계속 자라가야 합니다. 그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통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즉, 믿음의 사람들을 통하여 복음 전파의 진전(진보)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1장 12절을 보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길 간절히 기원합니다”라는 제목 아래 오늘 본문 1장 12-19절까지의 말씀을 한 2가지로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바울이 당한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1장 12절을 보면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가 당하고 있었던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이 편지 내용을 보면 사도 바울이 당하고 있었던 일은 바로 “나의 매임”, 즉 그는 옥게 갇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바울은 이 편지를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쓰고 있었던 당시 그는 로마 옥중에 갇혀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당하고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이 사실이 좀 흥미롭지 않습니까? 옥중에 있으면서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생각할 때마다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그들을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한 것이 좀 놀랍지 않습니까? (3-4절) 어떻게 바울은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였을까요? 어떻게 그는 감옥에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할 때마다 기쁨으로 항상 간구하였을까요? 보통 사람들 같으면 바울과 같은 상황에서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웬만한 믿음을 소유한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면 감옥에 갇혀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간구할 때에 기쁨으로 항상 간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16장에서도 그가 실라와 함께 “깊은 옥”에 갇혀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워져 있었을 때에도(24절) 한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25절). 어떻게 바울과 실라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찬송할 수가 있었을까요? 그들은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들이 빌립보에 이르러(12절)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이(16절) 그들을 따라와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여러 날을 그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녀)에게서 나오라”했을 때 귀신이 즉시 나왔습니다(17-18절). 그것을 목격한 그 귀신 들었던 여종의 주인들은 그녀가 점치므로 그녀를 통하여 수익이 많았는데(16절) 이젠 더 이상 그녀가 점을 치지 못하므로 자기들의 큰 수익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갔습니다(19절). 그리고 그들은 상관들 앞에 바울과 실라를 데리고 가서 고발하므로 (22절) 결국 상관들은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어 벗기게 하여 매로 많이 치게 한 후 옥게 가두었습니다(22-23절). 이렇게 바울과 실라는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한밤중에 기도하고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였을까요?

 

우리 사람들은 상황에 많이 좌지우지 당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우리는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상황을 접하게 되면 많은 때에 그 상황에 영향을 받아(지배를 받지 않는다 하여도) 우왕좌왕 할 때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바울처럼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된다면 우리는 감사하기보다는 불평(원망)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아무 잘못이 없고 이렇게 감옥에 들어올 만한 죄를 지은 것이 없는데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힌 자가 어떻게 그 상황에서 불평, 원망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우리의 본능입니다. 또한 어떻게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바울처럼 우리 마음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항상 기쁨으로 간구할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그러한 상황에서 기쁨이 있을 수 있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구약 성경 출애굽기 3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 앞에서 “갇힌 바 되었”을 때(3절) 그들은 애굽 왕 바로와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 것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10절). 그리고는 그들은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11-12절). 이게 말이 됩니까? 왜 자기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었느냐고 원망하는 게 말이 됩니까? 아니 노예 생활하던 애굽에서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고 애굽에서 모세에게 말했던 것을 지금 위기 상황이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모세에게 원망하는 게 말이 됩니까? 우리가 당하였고 혹시 지금도 아니면 앞으로 당할 역경과 위기 가운데서도 우리의 본능은 감사보다 불평/원망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우리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간구하며 찬송하며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우리가 바울처럼 감옥에 갇혔다든지 출애굽 당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사방으로 갇힌바 되었다는 것이 좀 실감이 나지 않는다면 한번 암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여러분이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갔다가 의사 선생님이 다 검사 후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는다면 과연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암 진단을 받은 환자들이 보이는 정서적 반응은 크게 3단계로 나눠 볼 수가 있다고 합니다(인터넷):

 

(1) 초기 반응 단계는 암을 진단받은 지 일주일 이내에 부정, 불신, 절망 등을 경험하는 시기이며 이때 일부 환자는 심한 불안 때문에 검사나 치료 방법에 대해 잘못된 판단을 하는 수도 있다고 합니다.

 

(2) 두 번째 단계는 감정적으로 동요되는 시기라고 합니다. 이 시기 환자들은 암이나 죽음에 대한 생각이 반복적으로 떠오르고 우울, 불안, 불면, 집중력 장애, 식욕부진 등이 1~2주 지속돼 일상생활을 유지하기조차 힘들어한다고 합니다.

 

(3) 세 번째는 적응 단계로 진단 및 치료 과정을 받아들이고 환자마다 자신의 대처 방식을 찾아 일상생활로 돌아가는 단계라고 합니다.

 

이러한 단계를 거치는 가운데 암 환자에게 흔히 나타나는 정신과적 문제는 이렇다고 합니다. 암 환자의 50~70%가 암과 관련해 겪는 어려움 때문에 불면, 불안, 우울 등이 생기는 적응장애를 경험한다고 합니다. 또 암 환자의 10~20%에서 치료가 필요한 우울증을 동반하는데 이때는 기분 저하, 의욕 감소, 불면증과 더불어 식사를 못하거나 여기저기 아픈 곳이 많아지는 등 다양한 신체증상을 겪게 된다고 합니다. 이 밖에도 죽음에 대한 공포, 암 재발과 전이에 대한 불안,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 앞으로 닥쳐올 변화와 고통에 대한 걱정 등이 많아지고 작은 신체적 변화에도 큰 병이 아닐까 지나치게 걱정하는 불안증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드물게는 가족들이 환자 자신을 죽기를 바라는 게 아닐까, 치료진이 일부러 잘못된 치료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피해망상을 보이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암 진단을 받았을 때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전립선 암 진단을 받았던 죤 파이퍼 목사님은 “당신의 암을 허비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어떻게 암을 허비하지 말아야 할지를 한 9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그 중에 한 5가지만 당신과 나누고자 합니다(파이퍼):

 

(1) 만일 우리가 우리의 암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디자인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암을 허비할 것입니다.

 

(2) 고린도후서 1장 9절을 보면 하나님의 디자인은 명백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3) 하나님께서 디자인 하신 것은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을 깊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으면 암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소중히 여기지 않을 때 암은 이기는 것입니다.

 

(4) 하나님께서는 암으로 하여금 우리 마음에 깊은 사랑과 사람들을 돌보는 마음을 창조하길 원하십니다.

 

(5) 암이란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눅21:12-13). 당신은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암이란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기고 계십니까?

 

우리는 바울처럼 우리가 당한 일이 어떠한 일이던지 간에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겨야(삼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가 당한 일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좋은 소식)이 진전할 수 있는지를 고민해 봐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당한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 것인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지를 기도하며 고민해야 합니다. 결코 우리는 우리가 너무 힘들다고 우리 자신에게만 몰두(self-absorbed)해서는 아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당한 일을 통해서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영혼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할 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마지막 둘째로, 바울의 매임을 통하여 이뤄진 복음 전파의 진전에 대해서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1장 12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써내려가면서 그들이 알기를 원하는 것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비록 감옥에 매여 있지만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었을 까요? 복음 전파자인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었으면 밖으로 나가서 복음을 전할 수가 없었는데 어떻게 복음 전파의 진전이 있을 수가 있었을까요? 13-14절을 보십시오: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 전파의 진전이 있었던 이유를 두 가지로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1) 바울이 옥에 갇혀있을 때에 그를 지키고 있었던 모든 시위대군인들이 바울이 감금된 것이 그리스도 때문에 된 줄로 알려지므로 복음 전파의 진전이 있었습니다(13) (박윤선).

 

무슨 말입니까? 바울이 로마 옥중에 감금돼 있었을 때 그를 지키고 있었던 동원된 군인들이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감금된 줄을 알게 되므로 복음 전파의 진전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 군인들뿐만 아니라 오늘 본문 13절을 보면 바울은 “그 밖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바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감금된 줄을 알려지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의 진보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만큼 바울의 감금이 그리스도 때문에 된 줄로 대외적으로 알려졌다는 말입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신자가 받는 고난이 그리스도 때문이라면 그것은 무상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또 그런 관계의 수난인 것이 드러난다면 그 사실을 아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얼마나 귀중하고 참된 줄을 알게 한다”(박윤선). 저는 이 박윤선 박사님의 말을 생각해 볼 때 얼마 전 뉴스에 몇 칠 동안 보도되었던 서아프리카 라이베리아에서 의료 활동을 하다가 에볼라 바이러스에 감염된 켄트 브랜틀리 박사가 생각났습니다. 그가 선교지 라이베리아로 떠나기 석 달 전 남긴 말은 “힘든 날이 오면 저는 다시 하나님의 소명을 마음에 되새길 겁니다”였다고 합니다. 이 말은 그는 아프리카를 섬기다가 시련의 순간을 맞더라도 하나님만 믿고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소명에 이끌림을 받겠다는 고백입니다(인터넷). 이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 고백입니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서아프리카 라이베리아에서 의사로서 섬기다가 에볼라 바이러스에 감염되므로 전 세계가 그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또한 그가 하나님을 믿는 자요 하나님의 소명에 이끌림을 받아 그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그 외지에 가서 의료 봉사하다가 에볼라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는 사실을 다 알게 된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소명에 이끌림을 받는 자는 아름답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아름답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나아가시며 영광을 받으십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어디로 가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냅니다. 그들은 이 세상 어디로 가든지 주님이 부르시는 곳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를 들어냅니다. 이러한 소명 자들에게는 사도 바울과 같은 신앙 고백이 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이러한 신앙 고백이 우리에게도 있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2) 바울이 감옥에 갇혀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복음 전파의 진전이 있었던 이유는 형제들 중 다수가 바울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1장 14절을 보십시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놀랍지 않습니까? 영적 지도자인 바울이 감옥에 있는데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두려워하기보다 오히려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보편적인 반응이 아닙니다. 핍박이 있는 가운데서 자신들의 영적 지도자인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다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복음을 반대하는 핍박 자들을 두려워하여서라도 피하던지 그리할 텐데 오히려 그들은 더욱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것을 보면 이것은 성령님의 역사가 분명합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바울이 당하는 핍박이 무섭다 하더라도, 그 무서운 핍박을 바울로 하여금 능히 견디어 서게 하신 성령님의 역사는 더욱 강하다. 그러므로 기독신자들은 핍박의 무서운 사실만 보지 말고 그것을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고 든든한 신뢰심을 가져야 한다”(박윤선). 이러한 든든한 신뢰심을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있었기에 그들은 바울의 매임 속에서도 주님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였던 것입니다(14절).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는 사람들 모두가 순수한 동기를 복음을 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15-17절을 보십시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착한 뜻으로”(out of goodwill), “사랑으로”(in love)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있었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투기와 분쟁으로”(out of envy and rivalry), 바울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하려고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out of selfish ambition)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습니다(17절). 여기서 순수하지 못하게 투기와 분쟁과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므로 바울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하려고 하였던 사람들은 아마도 바울을 시기하고 그를 미워했던 사람들 같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순순한 동기로 전하지는 않았습니다[18절, “겉치레로”(from false motive)].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8절).

 

이것이 바로 바울의 기쁨이었습니다. 그의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이었습니다. 불순한 동기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나 순수한 동기를 복음을 전하나 전파되는 내용은 올바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었기에 바울은 기뻐하고 기뻐하였습니다. 물론 여기서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에 있어서 불순한 동기를 전하는 것을 동의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빌립보서 2장 3절 상반절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Do nothing out of selfish ambition or vain conceit). 오늘 본문 빌립보서 1장 17절에서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out of selfish ambition)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렇게 빌립보서 2장 3절 상반절에 와서 바울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으로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였기에 바울은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고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말한 것입니다(18절). 또한 바울이 기뻐하고 또한 기뻐한 이유는 19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너희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무슨 말입니까?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자기를 구원에 이르게 할 줄을 알고 있었기에 바울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얼마 전 저는 라이베리아에서 의료 선교하다가 에볼라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미국 애틀란타 에모리대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던 캔트 브랜트리 의사와 낸시 라이트볼이 병원에서 퇴원했다는 소식을 CNN 인터넷 뉴스로 접하였습니다(인터넷). 그 소식을 접한 후 저는 인터넷상에서 캔트 브랜트리 의사가 퇴원하면서 한 연설을 동영상으로 들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생명을 건져주셨습니다’(God saved my life)라고 고백하는 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연설을 들으면서 저는 마음이 뭉클했었습니다. 특히 그가 라이베리아에서 에볼라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9 일 동안 침대에 누워있으면서 매일 매일 점점 더 아파지고 점점 더 약해지고 있었을 때 하나님께 드린 기도를 들을 때 참으로 그 귀한 신앙 고백으로 인하여 마음이 뭉클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한 기도는 ‘하나님, 저의 질병 속에서도 신실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하나님, 나의 삶이나 혹은 나의 죽음을 통해서라도 당신이 영광을 받으시옵소서’(As I lay in my bed in Liberia for the following nine days, getting sicker and weaker each day, I prayed that God would help me to be faithful even in my illness, and I prayed that in my life or in my death, He would be glorified). 그리고 저는 다른 에볼라 바이러스 감염 환자였다가 이미 지난 화요일 조용히 퇴원한 낸시 라이트볼 자매님이 말한 한 마디 말이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그 한 마디는 바로 “To God be the glory!”(모든 영광을 하나님께)였습니다. 이 두 형제, 자매가 당했던 일, 즉 그들이 치사율 90%의 치명적 전염병이 에볼라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던 것은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특히 그들이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있었던 그 상황 속에서 그들의 마음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가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은 그러한 생사의 갈림길 상황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오직 사나 죽으나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길 원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저는 캔트 브랜트리 의사가 퇴원 공식 회담에서 그 많은 기자들 앞에서 스스로 자청하여 연설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나의 생명을 건져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오직 사나 죽으나 하나님께만 영광 돌리길 원하여 하나님께 간구한 것을 볼 때에 이번 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의 진전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조금이나마 엿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한 형제, 자매들로서 사도 바울처럼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는 것입니다.

 

 

 

 

나의 당하는 일들을 통하여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아가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

(나의 삶과 죽음을 통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의 진전이 있길 간절히 기원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