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쌔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사도행전 7장 55-60절).

 

 

과연 “성령 충만은 무엇입니까?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은 성령충만에 대해 이러한 말하였습니다: "성령 충만을 받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이나 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고 일하기는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온 마음을 다하여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한다”. 성령 충만 이란 첫째로 그리스도의 충만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시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겠습니라?”(요 16:13-14). 성령님이 역사하는 곳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높아지며 그 이름이 증거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 어려움을 당하자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가하나님의 말씀을 전싸하게 하여" 달라고 기도할 때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더욱 열심히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분은 자기 모습을 강조하시지 않고 그분이 일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임하기에 성령님은 "숨어계시는 하나님"이라도 했습니다. 둘째로, 성령 충만은 예수 그리스도가 높아지는 것뿐만 아니라 그분의 말씀이 능력으로 나타남을 뜻합니다. 주께서도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진리의 영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 에베소서 5장18절을 보면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을 골로새서 3장 16-18절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켜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로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성령 충만" 대신에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하여"로 바꾸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성령충만이란 말과 그리스도의 말씀이 충만히 거한다는 것은 같은 뜻입니다. 성령 충만은 단순히 우리의 감정적인 변화가 아니고 영원하신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그 말씀으로 우리를 충만히 지배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또한 성령 충만은 술 취함으로 비교 설명하고 있습니다. 술이 우리 속에 들어와 우리의 중추신경을 지배해 버리는 것처럼 성령님께서 우리의 모든 삶을 지배하되 그분의 말씀 다라 우리의 삶을 지배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삶을 우리 속에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있었던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은 목이 곧은 사람들로써 성령님을 거슬러서 분개 가운데 의인들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들은 말씀을 받고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성경 사도행전 7장55-60절에는 목이 곧은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과 달리 성령 충만하였던 스데반이 나옵니다. 과연 성령 충 크리스천은 누구인지 한 세 가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보고 말합니다.

성경 사도행전 7장 55-56절을 보십시오: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스데반이 보고 말한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보았을 때 그가 본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스데반이 성령 충만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인자 예수님을 보았는데 왜 예수님께서는 서 계셨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신약성경은 한결같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것을 증거합니다 (유상섭). 그런데 왜 오늘 본문에서만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셨습니까? 학자들의 해석은 다양합니다. 순교자 스데반이 죽은 후 영광스러운 나라에 들어오는 것을 영접하시고자 예수님께서 일어서 계셨다는 해석도 있고 또한 예수님께서서 계셨던 이유는 유대인들의 법정에서처럼 예수님께서는 증인으로서 그의 종인 스데반의 메시지와 사역을 증언하시기 위해서라는 해석도 있습니다(Wiersbe). 유상섭 교수님의 말입니다: “인자 예수님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일어서신 것은 그를 담대하게 증거하고 인정하는 스데반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그가 신실함을 잊지 않고 끝까지 굳게 해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중보 기도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스데반에게 이러한 천상 비전을 허락하신 것은 한편으로 는 그에게 용기와 담대함을 북돋아 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이 여전히 그의 신실한 증인을 위해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법정 대리인과 중 보자로 역할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롬 8:34; 히7:24 참고).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보고 들은 바를 전하는 자들입니다. 성경 요한일서1장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과연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보고”란 무슨 말씀입니까? 다시 질문하면, 과연 우리가 예수님을 본다는 말은 무슨 말씀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입니다. 성경 요한복음12장44-45절을 보십시오: “예수게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이 성경구절을 보면 ‘예수님을 보는 자’와 ‘예수님을 믿는 자’가 동의어로 쓰이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예수님이 음성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성령님의 역사 가운데서 들은 후 그 들은 말씀을 전하는 자가 바로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즉,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로서 그 복음을 전파하는 자입니다. 그렇게 하는 목적은 듣는 이들로 하여금 예수님과 사귐이 있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둘째로,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의지합니다.

성경 사도행전 7장 59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스데반은 성령 충만한 가운데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인자 예수님을 보고 그를 향하여 심히 분개하여 이를 갈고 있는 산헤드린 공회원과 그를 고소하는 자유인들의 회당 소속의 지도자들이 그가 본 것을 말하였을 때(56절) 이들의 반응은 어떠했었습니까? 성경 사도행전 7장 57-58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앞에 두니라.” 이 산헤드린 공회원들과 고소하는 자유인들의 회당 소속 지도자들은 스데반이 말한 것처럼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51절)로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것이 지금까지 사도들이 부활과 승천하신 예수님에 대하여 한 증거가 한 치의 거짓이 없음이 입증함에도 불구하고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인 살인자들로서 그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스데반이 말할 때 두 손으로 귀를 완전히 틀어막았습니다(유상섭). 이들은 성령님을 거슬렀고 또한 성령 충만한 스데반을 거슬렀고 또한 대적하고 있었습니다(55절)(유상섭). 이들은 더 나아가서 일심으로 분개함 가운데서 스데반에게 달려들어(57절) 그를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치기 시작하였습니다(58절). 그 때에 스데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웅호하고 변호하시는 예수님께 자신의 영혼을 의탁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성경 사도행전 7장 59절을 보십시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이 기도는 시편 31편5절에도 나옵니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 이 시편 기자의 기도는 결국 예수님의 십자가의 상의 기도를 가리킵니다: “…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23:46).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이 예수님의 기도를 드리고 있는 성령 충만한 스데반의 모습을 봅니다. 삶과 죽음의 갈림 길에서 스데반은 자기의 생명을 주님께 맡긴 것입니다.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성령님을 거스른 자들은 주님을 부인하고 자기 자신을 의지하지만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돌을 맞아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주님만을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성령 충만했던 스데반은 죽으시고 부활하시사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신 영광스러운 주님을 보았기에 죽음 앞에서도 그 주님께 자기의 영혼을 의탁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우리도 스데반처럼 부활의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렇다면 생사의 문제 가운데서도 우리는 스데반처럼 주님께 우리의 영혼을 맡겨야 합니다. 어떠한 상황에 우리가 놓여 있을지라도 우리는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용서합니다.

성경 사도행전 7장 60절을 보십시오: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성령 충만하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용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용서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드리셨던 기도와 유사합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이 용서의 기도에는 자기를 죽이는 이 일에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사울을 위한 용서 기도도 됩니다(유상섭). 그런데 이 스데반의 용서 기도가 즉시 응답이 되었습니까? 자기를 죽이는 자들의 배후 조정 인물인 사울은 즉각적으로 변화되기는커녕 오히려 사울은 더욱더 교회를 핍박하는데 앞장서서 전권을 휘둘렀습니다(유상섭). 그러나 결국 사도행전 9장에 가서 사울은 개종하여 스데반을 이어서 사도행전 9장부터 28장까지 고난 받는 증인의 사역을 신실하게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렇게 용서의 기도는 힘(powerful)이 있습니다.

 

미국의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의 “용서하는 마음”이란 글을 보십시오: 그는 “주위에 자기보다 훨씬 탁월한 인재들을 수없이 많이 두었던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어떻게 그런 뛰어난 인물들을 옆에 둘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카네기는 그 비결 중에 하나로 '용서의 마음'을 들었습니다. 카네기가 그런 마음을 갖게 된 데는 아주 특별한 사연이 있습니다. 20대 초반이었을 때, 그는 일하던 회사의 공금을 가방에 넣어서 전달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엄청난 거금이든 가방을 가지고 기차를 탄 그는 열차 난간에 앉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정신을 차려 깨어보니 가방이 없어졌습니다. 졸다가 열차 밖으로 가방을 떨어뜨린 것이 분명했습니다. 온몸이 얼어붙는 것 같은 충격에 카네기는 사색이 된 채 기관사에게로 뛰어가 사정을 설명하고 열차를 후진시켜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턱도 없는 일이지만, 그 당시만 해도 사람들의 마음이 비교적 순박했던 때라, 딱하게 여긴 이 기관사는 몇 킬로미터 정도 열차를 후진시켜 주었습니다. 눈이 튀어나오도록 밖을 주시하고 있던 카네기의 눈에 문득 개울가에 떨어진 낯익은 가방이 들어왔습니다. 카네기는 비명에 가까운 환호성을 지르면서 열차에서 뛰어내려 가방을 열어 보았습니다. 다행히 현금이 그대로 들어 있었습니다. 그는 돌아오는 열차에서 계속 보물단지처럼 그 가방을 끌어안았습니다. 그 아찔했던 기억을 발단으로 해서, 카네기는 평생 실천에 옮길 중요한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나는 젊은 사람이 아주 결정적인 큰 실수를 해도, 그가 사기성을 가지고 일부러 한 일이 아닌 이상 용서하고 품어 주기로 했습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아무리 성실하게 노력해도 돌연히 당하는 사태가 일어나는 법인데, 그것 때문에 평생의 꿈이 좌절되는 불이익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성경 사도행전 6장을 보면 스데반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5절)이였으며 또한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였다(8절)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는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와 더불어 변론하는 자들이 능히 당치 못했었습니다(10절). 결국 그 변론자들은 사람들을 충동시켜서(12절) 스데반을 잡아가지고 공회에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 후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스데반을 모함하였습니다. 그 때에 성경 사도행전 6장 15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스데반처럼 성령 충만하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바라보며 (주목하며) 신앙생활 하므로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는 자입니다(은혜충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의지하여 신앙생활 하므로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자입니다(믿음충만).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용서의 기도를 드릴뿐만 아니라 실제로 실천에 옮기는 그리스도인입니다(권능충만). 이러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