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마음으로 완전한 길을 걷는 그리스도인들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시편 101편 2절).

 

 

사람들은 우리가 걸어가는 길을 보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가족 식구들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의 마음을 잘 주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의 마음을 못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도 잘 못보고 있는데 어떻게 그들이 우리도 잘 모르는 우리 마음을 잘 볼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잘 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 마음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는 마음에 초점을 맞추면서 살아갑니다. 그들은 주님의 마음을 본받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님의 마음으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려고 애씁니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종교생활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행실에 초점을 맞추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을 제대로 닮아가지 못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행실은 사람들 보기에 예수님의 모습을 닮은 듯해 보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들에게 칭찬까지도 받고 더 나아가서 존경까지도 받습니다. 어쩌면 처음에 칭찬을 받을 때에는 그들은 양심이 가책을 느끼며 또한 마음으로 괴로워했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회개하고 돌이켜 마음의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 앞에서 바른 신앙생활을 추구하지 못하므로 그들은 계속해서 사람들을 의식하며 그들 앞에서 칭찬과 존경을 받는 삶을 살고자 애씁니다. 그러한 삶이 지속되다 보니 결국에 가서 그들은 사람들 보기에 바른 신앙생활을 흉내 내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 그들은 바리새인들처럼 그들의 입술은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집니다(마15:8). 과연 우리는 어디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나님 입니까 아니면 사람들입니까? 마음입니까 아니면 행실입니까?

 

성경 시편 101편 2절을 보면 시편 기자 다윗 왕은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며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겠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이 시편 말씀을 생각하면서 말씀 묵상 제목을 “완전한 마음으로 완전한 길을 걷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적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제목을 그리 적고 나서 생각해 보니 이 말씀 묵상을 읽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완전한 마음”과 “완전한 길”이란 말에 동의를 할 수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생각에는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완전한 마음”과 “완전한 길”로 걷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한 분이신 예수님만이 이 땅에서 죄 없으신 완전한 사람으로서 완전한 마음과 완전한 길을 걸으셨던 사실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제자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완전한 마음과 예수님의 완전한 삶을 본받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참고로 오늘 본문에서 다윗 왕이 말하고 있는 “완전한 마음”과 “완전한 길”이란 ‘흠이 없는 마음’(a blameless heart)과 ‘흠이 없는 삶’(a blameless life)을 의미합니다. 즉, 우리는 흠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받습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흠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이 땅에서는 온전히 흠이 없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없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목표를 향하여 전진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우리는 흠이 없는 마음을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행실보다 마음을 우선시에 해야 하는 이유는 마음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행실이 나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흠이 없는 마음을 추구하므로 그 흠이 없는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흠이 없는 행실이 표출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흠이 없는 마음은 어떠한 마음일까요?

 

첫째로, 흠이 없는 마음은 사악한 마음을 멀리합니다.

성경 시편 101편 4절을 보십시오: “사악한 마음이 내게서 떠날 것이니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 여기서 “사악한 마음”이란 간사한 마음, 안과 밖이 다른 생활을 말합니다. 즉, 사악한 마음이란 위선을 가리킵니다. 다윗 왕은 이러한 위선, 즉 사악한 마음을 멀리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거짓을 행하는 자를 멀리하였습니다(7절). 그는 거짓말하는 자를 자기 목전에 서지 못하게 하였습니다(7절). 그러므로 다윗은 악한 일을 멀리하였습니다. 그는 모든 악인을 멸하므로 악을 행하는 자들을 하나님의 성에서 다 끊고자 했습니다(8절).

 

흠이 없는 완전한 마음을 추구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악한 마음을 멀리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간사한 마음을 멀리해야 합니다. 우리는 위선을 멀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과 밖이 다른 생활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짓을 멀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한 일을 멀리해야 합니다. 우리는 사악한 마음과 거짓된 마음을 멀리하므로 위선과 악한 일을 멀리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진실된 마음으로 선한 일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흠이 없는 완전한 마음을 추구하는 우리는 진실된 마음으로 선을 행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로, 흠이 없는 마음은 교만한 마음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성경 시편 101편 5절을 보십시오: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로다.” 다윗 왕은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가 왕으로서 눈이 높고 교만한 자를 용납하였다면 그 교만한 자가 나라 일에 관참하면, 안하무인의 심리를 가지고 민중을 학대하며, 고위에만 앉으려고 하다가 필경 반역을 도모할 것입니다. 그러한 교만한 자는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입니다. 즉, 교만한 자는 “은밀한 악선전으로 남을 해하는 자”입니다 . 이러한 교만한 간신들을 다윗 왕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멸하였습니다.

 

흠이 없는 완전한 마음을 추구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교만한 마음을 결코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우리는 교만한 자를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결코 우리 이웃을 은근히 헐뜯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들을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을 때 우리로 하여금 우리 이웃을 해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우리 이웃을 사랑하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흠이 없는 완전한 마음을 추구하는 우리는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 이웃을 우리 자신보다 낫게 여기며 우리 이웃의 일을 돌아보며 살아가야 합니다(빌2:3-4).

 

셋째로, 흠이 없는 마음은 충성된 마음입니다.

성경 시편 101편 6절을 보십시오: “내 눈이 이 땅의 충성된 자를 살펴 나와 함께 살게 하리니 완전한 길에 행하는 자가 나를 따르리로다.” 다윗 왕은 자기 백성들을 두루 살피면서 그 땅에 사악한 마음과 교만한 마음을 가진 자들을 멀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는 배교자들의 행위(the deeds of faithless men)를 미워하였습니다(3절). 그리고 그는 충성된 자들(the faithful)을 가까이 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기의 일꾼들로 삼아 수종들게 하였습니다(6절). 그 이유는 그에게는 간사한 사람들이나 교만한 사람들이 아닌 충성된 일꾼들이 필요하였기 때문입니다. 즉, 다윗 왕은 완전한 길로 행하는 충성된 일꾼들로 하여금 자기를 수종들게 하였습니다(6절).

 

흠이 없는 완전한 마음을 추구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배교자의 행위를 미워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충성된 자의 행위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우리 마음이 충성된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주님께 충성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기 때문입니다(고전4:2). 우리는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해야 합니다(눅16:10). 그리할 때 우리는 큰 것에도 충성할 수 있습니다(10절). 우리는 주님께 죽도록 충성해야 합니다(계2:10). 그러므로 주님 앞에 설 때에 우리는 주님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