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자부심

 

 

 

“날이 새매 상관들이 아전을 보내어 이 사람들을 놓으라 하니 간수가 이 말대로 바울에게 고하되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 하거늘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우리를 내어 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저희가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대 아전들이 이 말로 상관들에게 고하니 저희가 로마 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 두 사람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사도행전 16장 35-40절).

 

 

오늘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열등의식과 좌절감에 빠져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기를 비하하며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은혜를 받거나 축복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부정적이고 어두운 생각은 무서운 파멸의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 결과 중 하나는 자아학대입니다. 예를 들어 자신의 거울을 볼 때마다 자기를 보고 "이 못난 녀석아, 이 죄인아, 이 더러운 녀석아, 너는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자격이 없어"라고 자학할 정도로 열등의식과 좌절감에 싸여 자존심을 상실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열등감이란 무엇입니까? 국어사전적 의미로 열등감은 "자기를 다른 사람보다 무가치하게 낮추어 평가하는 생각"을 뜻합니다. 중국어로도 열등감은 "스스로 비천하게 여기고 얕잡아 보는 마음"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결국 열등이란 나 자신의 체격, 용모, 능력, 학벌 등을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하여 뒤떨어진다고 생각하거나 무가치한 인간으로 비하시키며 낮추어 평가하는 감정입니다. 열등의식을 가진 사람은 건전하지 못한 자아개념으로 인하여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열등의식에 사로잡히게 되면 소극적이 되고, 만사에 자신이 없어지며, 이 감정 때문에 아무 것도 적극적으로 하지 못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열등감에 빠지는 사람은 자기의 부족한 면만을 확대 해석하여 늘 다른 사람에 비해서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영국 캠브리지대학교 영문학자며 철학자인 루이스(C.S.Lewis)는 사단이 현대인들의 인격과 의식을 파괴하는데 사용하는 가장 큰 무기는 바로 "비교의식"인데 이는 열등감의 배후세력이라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조차 이 사단의 무기에 공격을 당해 열등감을 가지고 소극적인 삶, 만사에 자신이 없이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면적으로 불안해하고 두려움이 있으며 또한 자기학대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열등감이 많은 사람들 중에서는 때때로 열등한 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데서 오는 완벽주의적 증상을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열등을 느끼는 부분을 덮고 위장하고자 아주 철저하게 애쓰는 경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자부심이란 무엇입니까? 자부심이란 자기존재 가치를 긍정적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영국의 심리학자 J. 하드필드 박사가 자신감에 대하여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우리가 스스로에게 "넌 틀렸어. 이젠 끝났어!"라고 자괴감을 줄 때 우리는 실제 가진 능력의 30%도 채 발휘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넌 할 수 있어! 넌 특별한 사람이야! 저 사람은 하는데 왜 니가 못해!"라고 자신감을 줄 때, 우리는 무려 능력의 500%까지 발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 우리 자신의 긍정적인 존재 가치를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예수님 밖에서 뭔가 자부심을 느낄만한 것들을 우리 안에서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된 우리는 그의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부여된 영원한 자부심과 무한한 존귀성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 새 피조물이 된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떻게 보시는지 그의 관점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영안이 열리게 됩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 4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말씀의 관점으로 나 자신을 바라볼 때 내 자신의 존재 가치가 얼마가 귀한지 더욱더 깨닫게 됩니다.

 

바울과 실라는 로마 사람으로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가 억울하게 누명을 쓰다시피 해서 감옥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 때에도 그들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25절). 그리했을 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바울과 실라가 도망갈 수도 있었지만 그곳에 남아있으므로 결국 간수과 그의 온 집이 하나님을 믿으므로 크게 기뻐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34절). 그런 후 날이 새매 바울과 실라를 놓아주려고 상관들이 아전(법집행관)들을 보내었고 그들은 간수를 통하여 바울과 실라에게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고 말을 전했습니다(35-36절). 그 때 사도 바울의 답변이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바울이 이르되 로마 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우리를 내어 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저희가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대”(37절). 이 얼마나 담대한 바울의 태도입니까?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과 실라가 로마 사람임을 밝힌 것입니다. 분명히 귀신들린 여종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한 후 그 여종의 주인들이 돈을 더 이상 벌 수 없음을 보고(19절) 바울과 실라를 잡아가지고 저자(market)로 관원들에게 끌어가서 상관들 앞에서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하였을 때(20-21절) 사도 바울은 자기가 로마 사람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근데 오늘 본문에서야 자기와 실라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로마법대로 타당한 재판 절차를 받지 못하고 감옥에 집어넣었으니(유상섭) 그 상관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라고 담대히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왜 사도 바울이 지금에서야 자기와 실라가 로마 사람임을 밝히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만일 사도 바울이 상관들에게 자기와 실라가 잡혀서 상관들 앞에 있었을 때 자기들이 로마 사람임을 밝혔다면 그리 많이 매 맞고 혹심한 육체적 고통을 당하지 않을 수도 있었는데 왜 사도 바울는 로마 사람임을 밝히지 않고 다 고통을 당한 후 지금에 와서야 자신들이 로마 사람임을 밝히는지 흥미롭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사도 바울과 실라가 자신들이 로마 사람임을 밝히지 않았기에 결국 간수와 그의 온 집이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34절). 만일 사도 바울과 실라가 치유 받은 귀신들린 여종의 주인들이 송사할 때 로마 사람이라고 밝혔다면 감옥에도 갇히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감옥에서의 하나님의 임재로 말미암은 기적적인 기도의 능력도 체엄하지 못했을 것이고 당연히 간수하고의 만남도 없었을 것이기에 그 간수와 그의 온 집이 하나님을 믿었다는 오늘 본문에 34절에 나오는 기록 같은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기도의 사람들인 사도 바울과 실라를 통하여 이뤄진 것을 묵상할 때 사도 바울과 실라의 자세는 다른 사도들과 같이 ‘예수님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였습니다(행5:41). 사도 바울은 이렇게 감옥에서 풀려나는 상황에서 자기와 실라가 로마 사람임을 밝혔습니다. 그 때 아전(법집행관)들이 상관들에게 바울과 실라가 로마 사람임을 고했습니다(38절). 그 때 상관들은 두려워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그 당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비시민권자들에 비하여 아주 공정하고 정당한 절차를 밟아 재판을 받게 되어있는데 그러한 공정하고 정당한 절차가 없이 로마 사람인 바울과 실라를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로 매라 치라”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었기 때문입니다(22-23절). 그러니 이러한 사실이 로마 당국에 보고되면 그 상관들 (아미 치안 판사들)은 책임을 면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친히 감옥으로 와서 정식으로 사과하고 바울과 실라를 인솔하여 나와서는 도시를 떠나줄 것을 당부하였던 것입니다(39절). 얼마나 당당하게 사도 바울은 실라와 함께 감옥을 떠나고 있습니까? 자기의 권리를 찾아 로마 사람의 대접을 받는 모습을 볼 때에 사도 바울과 실라는 로마 사람임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들할찌 모르지만 오래 전에는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희망사항이었던 것 같습니다. 시민권만은 못하더라도 일단 미국 영주권이라도 취득하게 되면 세계인들이 부러워하는 미국 시민으로 인정받을 것이라 기대하는 것이 보통 이민자들의 생각이었던 것 같니다. 아마 1995년도였던 것 같습니다. 처음으로 한국에 나아갔었을 때 비자를 받고 나아가지 않아서 일본 후쿠오카 한국 대사관에 간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부산에 살고 있었던 사촌 동생하고 갔었는데 일본 비행장에 내려서 입국하려고 했을 때인가 사촌 동생이란 저랑 다 무엇인가를 써서 냈는데 저는 미국 시민권자여서 그 일하는 사람이 직접 고쳐주고 들어가라고 한 반면에 제 사촌동생은 한국 시민권자이기에 저기 가서 고쳐 오라고 다시 돌려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제 사촌동생은 기분이 매우 나빴었습니다. 그 때 미국 시민권의 힘이라고나 할까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작은 제 자신의 삶 속에서 겪었던 예이지만 미국 시민권이라는 것은 이렇게 편안면이 있었습니다. 결국 미국 시민권자로서 자기의 권리를 누린다는 것은 다른 나라들과 비교할 때 어쩌면 자부심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의 시민권은 미국이나 한국이 아닌 천국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빌립보서 3장 20-21절을 보십시오: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천국 시민권을 가진 저와 여러분들은 다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천국 백성들입니다. 그가 다시 이 세상에 오실 때 우리는 홀연히 변화되어 예수님의 경광의 몸의 형제와 같이 변케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긍지를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결코 열등감이나 좌절감을 가지고 자아학대하며 소극적으로 살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결코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계3:16) 물질적 부요함과 세속적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세속적 자부심은 결국 영적 궁핍함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세속적으로는 궁핍한 가운데서 영적 자부심을 가지고 저 천성을 향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저와 여러분들은 내게 능력주시는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빌4:13)는 자부심을 가지고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는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성경 요한복음 16장 33절을 보십시오: “…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자부심을 가지고 강하고 담대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떳떳하게 주님 안에서 자신감을 가지고 용기 있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두려워하면서 불안해하면서 살아가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 이사야 41장 10절을 보십시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