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바른 인간관계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자기의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그 등불이 유암 중에 꺼짐을 당하리라 처음에 속히 잡은 산업은 마침내 복이 되지 아니하느니라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잠언 20장 19-22절).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바른 인간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인가요? 혹시 여러분들 중에도 사람 사귐이 버거운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이 있으십니까? 인간관계에 있어서 참 용납하기 힘든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우리를 힘들게 하고 우리 마음에 상처를 주며 아프게 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인간관계란 참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직장 생활 하는 분들은 인간관계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더 잘 아실 것입니다. 어느 조사 결과에 의하면 직장의 어려움이 크게 두 가지라고 합니다. 하나는, 일이 주는 어려움이고 또 하나는 인간관계의 어려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인간관계의 어려움이 일이 주는 어려움보다 두 배에 달한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인간관계 하면 잠언 3장 27-25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저는 그 말씀을 묵상하면서 “지혜로운 자의 인관관계”에 있어서 한 3 가지 원리들을 배웠습니다: (1) 지혜로운 자의 인간관계 첫 번째 원리는 우리는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잠언 3장 27-28절을 보십시오: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 우리에게 베풀 힘이 있을 때 베푸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2) 지혜로운 자의 인간관계 두 번째 원리는 우리는 까닭 없이 다른 사람을 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잠언 3장 29-30 절을 보십시오: “이웃이 네 곁에서 안연히 살거든 그를 모해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거든 까닭 없이 더불어 다투지 말며.” 까닭 없이 시비 걸로, 까닭 없이 더불어 다투면 안 됩니다. (3) 지혜로운 자의 인간관계 세 번째 원리는 우리는 포학안 자를 부러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 잠언 3장 31절을 보십시오: “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며 그 아무 행위든지 좇지 말라.”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 패역한 자를 미워하시고(32절), 저주하시며 (33절), 비웃으시며(34절) 또한 부끄럽게 하실 것(35절)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잠언 20장 19-22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그리스도인의 바른 인간관계에 대한 교훈은 한 3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을 피해야 합니다.

성경 잠언 20장 19절을 보십시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여기서 ‘말을 많이 사람’이란 바로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인데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사람은 바로 남 얘기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남 얘기하기를 좋아하되 특히 남의 비밀(confidential information)을 누설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영어 성경에는 “두루 한담하는 자”를 “gossiper” 즉 수다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러한 수다쟁이와 어울리지 말고 피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남 얘기하기를 좋아하는 수다쟁이와 어울리지 말고 피해야 합니까? 그 이유는 그러한 사람은 남의 비밀을 누설하기 때문입니다(19절, 11:13). 다시 말하면, 우리가 수다쟁이를 피해야 하는 이유는 그런 사람은 신뢰를 저버리기 때문입니다. 이 이유 외에도 잠언을 읽다 보면 수다쟁이를 왜 피해야 하는지 또 다른 이유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이유란 수다쟁이는 다툼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성경 잠언 26장 20절을 보십시오: “나무가 다하면 불이 꺼지고 말쟁이가 없어지면 다툼이 쉬느니라.” 또 다른 이유는 수다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잠언 16장 28절을 보십시오: “패역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 여러분, 여러분도 그리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는 수다쟁이는 다툼을 일으키고 친한 친구를 이간시킨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뭐 어디 친한 친구만 이간시키겠습니까? 형제도, 자매도 이간시킬 뿐만 아니라 심지어 부부관계도 다투게 만들고 이간시킵니다. 어떻게 수다쟁이는 이렇게 사람들을 이간시킵니까? 바로 거짓 증언하므로 수다쟁이는 사람들을 이간시킬 수가 있습니다. 성경 잠언 6장 19절을 보십시오: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이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많이 하는 사람과 어울리지 말고 피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부모님을 저주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 잠언 20장 20절을 보십시오: “자기의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그의 등불이 흑암 중에 꺼짐을 당하리라.” 이 말씀을 들을 혹이 여러분 마음에 ‘아니 어느 자식이 부모님을 저주할까?’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이 “저주”란 단어를 원어 히브리어로 보면 “저주”라는 의미 외에도 ‘하잖게 만드는’(경시하는, 과소평가하는)(belittle)이란 의미도 있습니다(Vine). 그 말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자기의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란 말씀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하잖게 만드는 자’라고도 번역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번역하면 이젠 문제가 달라지지 않습니까? 부모님을 저주하는 자식은 좀 없을 수 있을지라도 부모님을 하잖게 만드는 자식들은 있지 않습니까? 부모님을 경시하는 자식들, 부모님을 대수롭지 않게 보고 업신여기는 자식들, 부모님을 얕보고 과소평가하는 자녀들이 많지 않습니까? 신약 성경 마태복음 15장 4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영어 성경에는 부모님을 ‘curses’(저주)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한국어 성경에는 부모님을 “비방”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생각해 볼 때 부모님을 저주한다는 것은 부모님을 비방하는 것, 부모님을 욕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부모님을 저주하던지 하잖게 만드는 자는 십계명 중 5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을 위반하는 것입니다(출20:12). 그 위반에 대한 형벌을 성경 출애굽기 21장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참고: 레20:9). 어느 주석에서는 이 말씀을 부모님을 “저주”(cursing)하는 것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부모님에게 ‘반항하는(rebelling against) 자도 반드시 죽일지니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Walvoord). 오늘 본문 잠언 20장 20절 하반절에서도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그의 등불이 흑암 중에 꺼짐을 당하리라”는 말씀도 죽음을 말하고 있습니다(Walvoord).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그 분들을 저주하지 말고 오히려 우리는 그분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부모님을 하잖게 여기지 말고 그 분들을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부모님을 경시하며 과소평가하지 말고 그 분들을 공경해야 합니다.

 

셋째로, 우리는 복수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 잠언 20장 22절을 보십시오: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고 여호와를 기다리라 그가 너를 구원하시리라.” 여러분, 인간관계에서 누군가 나에게 고통을 입혔으면 우리 사람의 심리는 내가 당한 고통에 대해 그 사람에게 갚아 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우리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라(마5:43)는 말씀보다 “네 원수를 미워하라”(마5:43)을 더 좋아합니다. 원수를 미워하데 우리는 “생명에는 생명으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손에는 손으로, 발에는 발로” 상대방에게 갚아주고 싶어 하는 심리가 우리에게 있습니다(신19:21).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경 잠언 24장 29절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그 사람에게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 또한 성경 잠언 20장 22절에서도 우리에게 “너는 악을 갚겠다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상대방이 나에게 고통을 안겨줬다고 나도 그 사람에게 고통을 안겨주려고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도 그 상대방하고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우리는 말하지 않나요?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 사람들과 뭔가 좀 달라야 하지 않나요? 그 달라야 할 점 중에 하나가 바로 악을 갚지 말고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잠20:22). 여기서 하나님을 기다리라는 말씀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선 우리는 로마서 12장 19절을 봐야 합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즉, 우리가 친히 악을 갚지 말고 하나님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는 원수 갚는 것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 갚아 주실 것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성경 신명기 32장 25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실족할 그 때에 내가 보복하리라 그들의 환난 날이 가까우니 그들에게 닥칠 그 일이 속히 오리로다.” 무슨 말씀입니까? 복수는 하나님의 것이다 라는 말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 하나님의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말입니다. 성경 나훔1장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보복 때에(렘51:6) 우리를 위해 보복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수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복수하시고 우리를 건져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