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하는 성도님들, 근심케 하는 목사님

 

 

 

“그러나 비천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의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저의 온 것뿐 아니요 오직 저가 너희에게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고함으로 나로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린도후서 7장 6-10).

 

 

우리 주위엔 위로가 필요한 성도님들이 참 많습니다. 궁핍과 고난, 외로움과 괴로움, 질병과 고통, 상처와 아픔, 심지어 생사의 갈림길에서 허덕이는 사랑하는 성도님들을 생각할 때 그 분들 모두 다 위로가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왠지 그 “사람들” 가운데 우리가 우리 “목사님”은 잘 포함시키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어쩌면 우리가 생각할 때 ‘우리 목사님은 믿음이 좋으시닌까 뭐 믿음으로 다 잘 이겨 나아가실꺼야’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도 바울조차도 위로가 필요한 하나님의 종이였다는 사실입니다(고후7:6).

 

오늘 본문 고린도후서 7장 6-7절을 보면 우리는 사도 바울이 위로를 받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위로를 받았는지 한 세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첫째로, 바울은 디도의 옴으로 위로를 받았습니다(6절). 다시 말하면, 위로의 하나님께서는(6절) 바울의 동무요 동역자(8:23)인 디도가 고린도 교회를 방문한 후 바울에게 오게 하므로 바울을 위로하셨습니다(7:6). 이와 같이, 우리 목사님은 디도와 같은 그의 동무요 동역자를 통하여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특별히 그 동역자가 목사님을 위해서 무엇을 했기 때문에 위로가 된다기 보다 그저 목사님을 찾아뵙는 것이나 목사님과 함께 하므로 그 동역자는 목사님을 위로할 수 있습니다. (2) 둘째로, 바울은 디도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위로를 받았다는 것을 앎으로 위로를 받았습니다(7절). 우리 목사님이 사랑하는 디도와 같은 동역자가 섬기는 교회에서 성도님들에게 위로를 받았다는 소식을 접할 때 우리 목사님은 위로를 받습니다. 마치 할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이 손주들로 부터 위로를 받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위로받은 아들과 위로한 순주들로 인하여 위로를 받는 것처럼 우리 목사님은 우리 성도들이 서로 위로를 할 때 그로 인하여 위로를 받습니다. (3) 셋째로, 바울은 디도가 전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소식을 듣고 기뻐함으로 위로를 받았습니다(7절). 디도가 바울에게 전한 소식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편지를 받고서 그 훈계를 존중시하며 경모한다는 것[“너희의 사모함”(7절)]과 그들이 그 경모하는 사도의 훈계에서 자기들의 죄과를 깨닫고 통회하는 것[“애통함”(7절)] 그리고 그들이 열심을 분발하여 사도를 성심껏 봉사하려 하는 것[“열심”(7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도와 고린도 교회 성도들로 인하여 위로를 받았습니다. 우리 목사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목사님도 교회 성도님들로 인하여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마치 바울이 디도를 통해 전해들은 기쁜 소식으로 위로를 받았던 것처럼 우리 목사님도 교회 성도님들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해 들으므로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무엇이 우리 목사님에게 기쁜 소식입니까? 그 기쁜 소식이란 성도님들이 목사님의 훈계를 존중하며 사모한다는 소식이요 그 훈계를 통하여 자기들의 죄를 깨닫고 애통한다는 소식이요 또한 성도님들이 열심을 내어 목사님을 성심껏 봉사하려 한다는 소식입니다. 여러분 성도님들은 이렇게 여러분의 목사님을 위로하고 계십니까?

 

우리 주위엔 근심케 할 필요가 있는 성도님들이 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아니하고 옛 사람의 습관대로 행하므로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성도님들을 생각할 때 그 분들은 모두 다 근심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왠지 그 성도님들을 근심케 하는 목사님들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어쩌면 목사님들이 그 성도들을 책망하는 것을 두려워해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목사님들은 그 성도님들이 시험에 들어 교회에 나오지 않을까바 염려해서 책망을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도 바울은 죄를 범하고 있었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근심케 하였다는 사실입니다(8절). 오늘 본문 고린도후서 7장 8-10절을 보면 우리는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근심케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바울은 그들을 근심케 하였습니까? 바로 고린도 교회의 잘못된 점들을 책망하는 서신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보내므로 바울은 그들을 근심케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후회하였습니다(8절). 마치 아버지가 사랑하는 자녀들을 책망한 후 후회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가 더 이상 후회하지 않았던 이유는 자기가 써서 보낸 서선이 그들을 잠시만 근심하게 하였기 때문입니다(8절). 오히려 바울은 기뻐하였습니다(9절). 그 이유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9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는 것입니다(9, 10절).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세상 근심과 달리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입니다(10절).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서신으로 하여금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케 하시되 그들로 하여금 간절하게 하였으며, 변명하게 하였으며, 분하게 하였으며, 두렵게 하였으며, 사모하게 하였으며, 열심 있게 하였으며 또한 벌하게 하였으므로 결국에 가서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깨끗함을 나타내게 하신 것입니다(11절). 이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아닙니까?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되(“간절하게 하며”)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용서를 빌고(“변명하게 하며”), 자기 자신을 고통의 원인자로 여겨 자신에게 대하여 분히 여기며(“분하게 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두렵게 하며”), 바울 오기를 사모하며(“사모하게 하며”), 잘못된 것을 고치기 원하는 열심을 내며(“열심 있게 하며”), 또한 범죄한 자기 자신들을 벌하고자 원하는 심정으로(“벌하게”) 자기 자신들의 깨끗함을 나타내었으니 이 얼마나 유익한 근심케 함입니까. 이러한 근심함은 손해 보는 것이 아니요(9절) 오히려 교회 성도님들의 신앙생활에 유익이 되므로 우리 목사님은 그들을 근심케 해야 합니다. 죄를 범하고 있는 교회 성도님들을 회개케 하는 근심함은 우리 목사님이 후회할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간절히 하나님께 그 성도님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그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므로 말미암아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여러분 목사님들은 이렇게 여러분이 섬기시는 교회 성도님들을 근심케 하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