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의를 보이는 그리스도인들

 

 

 

“그 날에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 곧 율법에 정한대로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모든 성읍 밭에서 거두어 이 곳간에 쌓게 하였노니 이는 유다 사람이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인하여 즐거워함을 인함이라 저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결례의 일을 힘썼으며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도 그러하여 모두 다윗과 그 아들 솔로몬의 명을 좇아 행하였으니 옛적 다윗과 아삽의 때에는 노래하는 자의 두목이 있어서 하나님께 찬송하는 노래와 감사하는 노래를 하였음이며 스룹바벨과 느헤미야 때에는 온 이스라엘이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날마다 쓸 것을 주되 그 구별한 것을 레위 사람들에게 주고 레위 사람들은 그것을 또 구별하여 아론 자손에게 주었느니라” (느헤미야 12장 44-47절).

 

 

여러분, 성도를 품고 사랑하는 목회자, 목회자의 숨은 고충을 가슴 깊이 끌어안는 성도, 이해와 사랑으로 세우는 교회를 꿈꿔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러나 목회자의 현실은 목회자는 보통사람보다 더 높은 삶의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성인들이 전체의 80퍼센트에 이릅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그와 같은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목회자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루비에타). 여러분은 여러분의 목회자에게 거는 기대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각자 다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해와 사랑으로 세우는 우리 교회가 되도록 우리 모두가 다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서로에게 성의를 보여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 문을 열고 대화하며 서로를 알아가며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 주면서 주님의 사랑을 나눠야 합니다. 이 일에 우리 모두가 성의를 보여야 합니다.

저는 오늘 느헤미야 12장 44-47절 중심으로 성의를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바라기는 목회자나 성도님들이나 주님 앞에서 주시는 말씀을 잘 경청하여 노력하는 가운데 이해와 사랑으로 세워지는 주님의 몸 된 교회가 되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오늘 본문에서 찾는 성의를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은 성의를 보이는 목회자들입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12장 45절을 보십시오:

“저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결례의 일을 힘썼으며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도 그러하여 모두 다윗과 그 아들 솔로몬의 명을 좇아 행하였으니.”

 

여기서 “힘썼으며”(performed)라는 말은 “주의하다, 보호하다, 지키다, 준수하다”라는 의미입니다. 근원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매우 신경을 써서’라는 말입니다. 첫 번째 의미는 동사와 합성어일 때에는 ‘조심히 혹은 부지런히 행하다’라는 의미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언약이던 율법의 책임이던 지간에 매우 조심히 주의하여 감당하고 있음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세 번째 의미는 ‘돌보다, 보호하다’란 의미입니다. 네 번째 의미는 ‘중요시하다, 주의/유념하다’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 성곽이 재건 된 후 성전에서 섬겼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성전에 관하여 무엇을 매우 신경 썼을까요? 과연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어떠한 일에 더욱더 성의를 보였습니까?

(1)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힘썼습니다. 45절을 다시 보십시오: “저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만일 목회자가 하나님을 예배의 중요성을 망각하고 예배하는 일을 힘쓰지 않는다면 교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만일 목회자가 성의 없이 준비하여 예배를 인도한다면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목회자들은 예배의 중요성을 깨달아 알아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를 지키며, 주의하며, 매우 신경을 써서 보호해야 합니다.

(2) 그들은 결례의 일을 힘썼습니다. 45절을 보십시오: “저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결례의 일을 힘썼으며 ….” “결례의 일”이란 느헤미야 12장30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몸을 정결케 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을 정결케 하니라.” 우리는 자신의 정결과 가정의 정결 더 나아가서 교회의 정결에 힘을 써야 합니다. 특히 목회자는 자기 자신과 가정을 정결케 해야 하며 교회에 관하여서는 예배의 정화를 힘써야 합니다.

세계 교회가 놀랄 정도로 경이적인 성장을 한동안 거듭했던 한국 교회 1980년대부터 성장이 멈추기 시작했습니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그 중에 하나는 목회자의 설교권이 도전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시대를 올바로 내다보지 못한 목회자들의 안이한 자세와 설교를 전하는 목회자들의 도덕성 문제가 여기저기에서 제기되면서 더 이상 목회자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도출되기 시작했다는 지적입니다. 누가, 어떤 사람이 말씀을 전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의 철저한 자기갱신과 회개만이 무너지고 있는 강단을 살릴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합니다. 목회자들의 올바른 목회를 바탕으로 교인들에게 올바른 예배를 강조하고 이것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예배는 철저히 본질에 맞추어 드려져야 하며, 예배 회복을 이루는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신학자들은 지적합니다. 예배와 설교의 목회계획이 교회의 양적인 부흥에 바탕을 둔 목회현장에 대한 갈급함만으로 치우질 것이 아니라, 시대적 상황을 살피고 성도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도록 목회계획을 수립하는 목회자의 주의가 요구됩니다. 결국 목회자의 권위는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이며 도덕적인 것으로, 목회자의 경건한 생활과 설교를 통하여 나타나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만을 말하는 목회자는 존경을 받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김남중). 그러나 지금 우리는 목회자가 존경 받지 못하는 시대를 맞이한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중 하나는 우리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 모범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 느헤미야 12장에 나오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예배하는 일과 결례의 일을 행함에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범이 되었던 것을 배워야 합니다. 특히 이들의 모범 중에서 한두 가지 적용할 만한 원리들이 있습니다:

(1) 첫 번째 원리는 팀워크(team work)입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12장 45절을 보십시오: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도 그러하여 모두 ….” 현대 말로 해본다면 담임 목사와 부교역자들 그리고 성가대/찬양팀과 안내 위원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과 성전을 정결케 보존하는 일에 힘을 썼다는 말입니다.

(2) 두 번째 더 중요한 원리는 하나님의 말씀 순종입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다윗과 그 아들 솔로몬의 명을 좇아 행하였으니.” 오늘 말로 하자면 지금 교회의 목회자들과 또 다른 섬기는 자들과 한 팀이 되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과 자기 자신과 성전을 정켤게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30, 45절) 힘써 행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함에 있어서 자기 생각과 마음대로 드리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1. W. 토저 목사님의 그의 책 《예배인가, 쇼인가!》에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있으나 예배가 없다. 기도회에는 참석하지 않으면서, 단지 교회 운영위원회에 참여하여 교회의 예산을 얼마나 지출해야 할지 계산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이런 사람들은 단지 교회를 운영하는 사람으로 우리는 그를 기도회에 참석하게 만들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예배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도하지 않고 예배도 드리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를 운영하고 이끌고 나간다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모순이다.”

 

우리 목회자들이나 우리 성도님들은 성의를 보이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과 정결케 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리 가정을, 우리가 섬기는 교회를 예배자의 공동체로 세워 나아가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케 된 예배자들로 세움을 받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중에서 찾는 성의를 보이는 그리스도인들, 성의를 보이는 성도들입니다.

 

느헤미야 12장 44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 곧 율법에 정한 대로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모든 성읍 밭에서 거두어 이 곳간을 쌓게 하였노니 이는 유다 사람이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인하여 즐거워함을 인함이라.”

 

유다 사람들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에게 보였던 성의는 무엇이었습니까?

첫째로, 유다 사람들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로 인하여 즐거워하였습니다.

 

44절을 보십시오:

“… 이는 유다 사람이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인하여 즐거워함을 인함이라.”

 

오늘 말로 한다면 성도들이 목회자의 성의를 보면서 그가 얼마나 큰 수고를 기울이고 있는가를 알고 있기에 그의 섬기는 일로 말미암아 그를 기쁘게 여겼다는 말입니다. 과연 요즘 교인들이 자신들의 교회 목회자를 기쁘게 여기고 있습니까? 다시 질문한다면, 요즘 교인들이 목회자의 섬김에 만족을 하고 있습니까? 교회란 공동체 안에서 목회자와 성도들 간의 관계에서 매우 경계해야할 것 중 하나는 바로 ‘원망’입니다. 목회자가 성도를 원망하며 성도들은 목회자를 원망한다면 그 공동체는 말이 살아있는 공동체지 마치 죽어가는 세포와 같습니다. 예를 들어, 한 성도가 자기 교회 목사님을 향하여 원망을 품고 있다고 가장하십시다. 그러면 그 성도는 그 원망을 품고 있다가 또 다른 성도가 자기와 비슷하게 목사님을 원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결국 두 죽어가는 세포가 뭉치게 되어 서로가 영적으로 퇴보의 길을 걷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래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 교회는 목회자가 성도님들을 원망의 대상으로 삼지 말고 기쁨의 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이며 성도님들도 마찬가지로 목회자를 원망이 대상이 아닌 기쁨의 대상으로 삼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심각한 것은 목회자와 성도들 간의 관계에 있기보다 어쩌면 목회자들 자기 스스로에게 있는 좌절감과 낙심 등이 더 심각할 수도 있습니다.

《목회자 충격 보고서》(피터 칼도르,로드 풀피트 저)란 책을 보면 목회자들은 자기들 스스로가 좌절감과 낙망 속에서 탈진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즉,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기뻐하지 못하고 실망한다고 합니다. 왜 실망 속에서 탈진합니까? 탈진 평균 수치 제일 높은 것 목록 한 몇 가지 만 나눈다면 일상생활에서 피로감과 상한 감정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내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성취하려고 시도하다가 스스로에게 실망하게 됩니다. 교회 또는 성도에게 영적 변화나 성장 등이 일어나지 않는 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낍니다.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배를 인도하며 정결한 삶을 사는 모범을 보면서 그들을 기뻐해야 합니다.

 

둘째로, 유다 사람들은 성전 사역자들을 지지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12장 44절을 보십시오:

“그 날에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 곧 율법에 정한 대로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모든 성읍 밭에서 거두어 이 곳간을 쌓게 하였노니…”

 

모세의 율법의 기록된 대로 성전 사역자들인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지지하고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성전에 받쳤습니다. 그러면 레위 사람들 중에 몇 몇 사람들은 책임을 지고 백성들이 성전에 받친 것들을 잘 곳간에 쌓아두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십일조나 헌물을 성전에 받친 이유는 성전 사역자들을 도와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도록 하려고 했던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Hudson Taylor 선교사님은 이러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일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방법대로 행해졌을 때 그 일에는 하나님의 지지가 결핍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 목회자들이 Taylor 선교사님의 이 말처럼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의 방법되고 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지지는 결핍되지 않을 것입니다. 결국 성도님들은 그러한 종의 사역을 위하여 후원하는 일을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며 결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않을 것입니다(고후9:7). 즐거운 마음으로 후원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 결과 ‘그 집’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 위에 복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겔44:30).

 

어느 교회에 사업하는 집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교회 봉사나 헌금 내는 일에 몹시 인색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주일 목사님의 설교 제목이 ‘기독교인과 돈’이었습니다. 그 집사는 대단히 흥미롭게 설교를 듣고 있었다. 목사님의 설교는 3대지로 되어 있었다. 1대지는 돈을 많이 벌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그 집사는 계속 ‘아멘!’이었다. 2대지는 저축을 많이 하라는 내용이었는데 그것도 역시 ‘아멘!’이었다. 집사의 얼굴은 밝았고 설교 말씀이 계속되는 동안 ‘아멘’ 소리가 계속해서 크게 들렸습니다. 그런데 3대지에서 하나님께 많이 바치라는 내용의 설교를 듣더니 그때부터 그 집사의 ‘아멘’ 소리는 들어가 버렸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면서 그 집사는 친구 집사에게 말했습니다.

“오늘 목사님의 설교 제목이 멋지지 않았어? 1대지, 2대지 아주 은혜로웠단 말이야. 그런데 3대지에 가서 그만 은혜를 쏟고 말았어. 한 마디로 말해서, 3대지 때문에 설교 전체를 망쳐 버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