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지는 그리스도인

 

 

 

“그 남은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및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는 모든 자와 그들의 아내와 그들의 자녀들 곧 지식과 총명이 있는 자들은 다 그들의 형제 귀족들을 따라 저주로 맹세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종 모세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우리 주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켜 행하여 우리의 딸들을 이 땅 백성에게 주지 아니하고 우리의 아들들을 위하여 그들의 딸들을 데려오지 아니하며 혹시 이 땅 백성이 안식일에 물품이나 온갖 곡물을 가져다가 팔려고 할지라도 우리가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그들에게서 사지 않겠고 일곱째 해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 하였고” (느헤미야 10장 28-31절).

 

 

한 고용주가 일할 사람(종업원)을 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지원자들이 많이 모여서 한 명씩 인터뷰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 때 한 지원자와의 대화입니다: 고용자가 말했습니다. “이일은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 맡아야 합니다.” 그러자 지원자가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지난 직장에서 무슨 잘못된 일만 생기면 사람들이 모두 제 책임이라고 말했거든요.”

참 어이가 없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 유머가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책임을 질 줄 모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직책을 맡아 주님을 섬기려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누구야?(Who are They anyway?, BJ 갤리거·스티브 벤추라 공저)》란 책을 보면 결정적인 순간마다 절묘하게 책임을 떠넘기는 '책임 회피형 인간'(professional victims)에 대해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핵심 질문 중 하나는 ‘책임 회피형 인간’을 '책임지는 인간'으로 바꾸는 방법에 세 가지 해답을 제시합니다. 가장 짧은 해답은 절대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이고, 긴 해답은 직접 바꿀 수 있는 것은 자신 밖에 없다는 것이며, 조금 더 긴 해답은 직접 바꿀 수 있는 것은 자신 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한 ‘책임감(ACCOUNTABILITY)’이라는 단어의 알파벳을 풀어, 우리가 책임감을 구현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사항들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A (인정): Acknowledge the situation (상황을 인정하라)

C (용기): Courageously face the difficulties (어려움에 용감하게 맞서라)

C (대화): Communicate with positive language (긍정적인 말로 대화하라)

O (내탓): Own the problem … and the solution (문제도 해답도 다 나에게 있다)

U (이해): Understand others’ viewpoints (다른 사람의 시각을 이해하라)

N (협상): Negotiate solutions that work for everyone (협상으로 윈-윈 해결책을 찾아라)

T (책임 떠맡기): Take on new responsibilities (새로운 책임을 기꺼이 떠맡아라)

A (실천): Act, don’t simply react (수동적인 모습에서 벗어나, 실행하고 실천하라)

B (유연한 대처): Be willing to reassess and renegotiate (재평가와 재협상에 유연하게 대처하라)

I (긍정적인 영향): Influence others and collaborate (주위에 긍정적 영향을 주고 협력하라)

L (무기력증 탈피): Leave the ‘poor me’ victim mentality behind (남 탓하는 무기력증에서 탈피하라)

I (주도적 태도): Initiate thoughtful and deliberate solving (깊이 생각하여 문제 해결을 주도하라)

T (자부심): Take pride in your results (자신이 한 일에 자부심을 가져라)

Y (예스 마이드): ‘Yes’ leads to success (예스!라는 말이 당신을 성공으로 인도한다)

 

과연 저와 여러분들은 책임회피 형이 아닌 책임형입니까?

 

저는 오늘 본문 중심으로 ‘책임지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제목 아래 우리 책임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 세 가지를 본문에서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로, 우리 책임지는 그리스도인들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세상 것을 끊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10장 28절을 보십시오:

“그 남은 백성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과 느디님 사람들과 및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

 

느헤미야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였습니까? 그 이유는 바로 ‘이 모든 일’ 때문입니다(9:38).

 

느헤미야 9장 3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 모든 일을 인하여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을 치나이다 하였느니라.”

 

‘이 모든 일’이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열조가 과거에 자주 범죄하고 벌 받은 사실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지금 이스라엘 회중은 ‘이 모든 일’ 때문에 지금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한 후 이스라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을 쳤습니다(9:38). 그 명단이 느헤미야 10장1-27절에 나옵니다. 지금 말로 하면 우리가 우리의 조상들이 과거에 하나님 앞에 범한 죄들과 하나님께 받은 벌을 회고하면서 더 이상 하나님께 (같은) 죄를 범하면 안 되겠다는 결심으로 하나님과 약속을 맺고 책임을 지겠다는 서명(싸인)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약속은 무엇 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율법(계명)을 준행하는 것이었습니다(28절). 이스라엘 회중은 지금 수문광장에서 말씀의 부흥을 경험하면서 결심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열조와 같이 하나님의 율법을 떠나 범죄치 않겠습니다. 오늘부터 우리는 오직 하나님 계명을 지키며 순종하겠습니다.”

 

어느 정도로 결심을 하였는가 하면 그들은 ‘만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자기 자신들이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는 ‘저주로 맹세하기’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심하였습니다(10:29). 하나님의 계명을 준행하겠다고 결단을 내리는 것. 이것이 진정으로 부흥의 열매입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동으로 옮긴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이방 사람과 절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더럽히지 않으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성경 에스라 6장 21절을 보십시오: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과 무릇 스스로 구별하여 자기 땅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을 버리고 이스라엘 무리에게 속하여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다 먹고.”

 

만일 저와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교제를 많이 보내면 신앙생활에 도움이 됩니까? 아니면 불신자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면 신앙생활에 도움이 됩니까? 여러분들도 알고 있다시피 신자들과 교제가 많을 때에 신앙생활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만일 불신자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면서 그들이 즐기는 세상 것들을 함께 즐길 때에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의 “눈에 가시”와 여러분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여러분들을 괴롭게 할 것입니다.

 

성경 민수기 33장 55절을 보십시오:

“너희가 만일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의 남겨 둔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그러나 안타까운 현실은 너무나 많은 교인들이 옆구리에 ‘가시’를 차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세상 것을 끊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기에 그의 신앙생활 괴롭고 신앙의 성장이 없습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녀도 믿음이 자라나지 않습니다. 어찌 세상과 짝지어 살면서(절교를 하지 않으면서) 믿음이 자라나길 바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언젠가 여기 미국에서 한인 노인들을 태우고 카지노를 가던 관광차가 소방차가 부딪혀서 한 사람이 사망하고 약 50명이 다쳤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저는 그 때 뉴스에서는 한인 타운에 노인들의 도박 중도성이 점점 심각해짐을 지적하는 것을 들은 기억이 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도박이나 술, 또한 니코틴 중독, 마약 중독과 성중독에서 헤어 나오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까? 왜 중독되고 있습니까?

한국 마약 퇴치운동본부에서 나온 글 중에 “[도박 중독] 처음엔 한두 푼…결국엔 무일푼”란 글에서 중독되는 이유를 몇 가지 찾아보았습니다:

(1) 첫 번째 원인은 사회 환경을 들 수가 있습니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하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이 많은 사회 환경도 도박중 독증을 부추기는 한 요인이 된다고 합니다. 특히 자기 조절능력이 부족한 청소년기에 노출되면 헤어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또한 사회적으로 병처럼 돌고 있는 “한탕주의”도 도박이나 복권 중독에 영향을 크게 미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 원인은 성격적인 요인을 들 수가 있다고 합니다. 대개 스릴을 추구하는 사람이 쉽게 중독됩니다. 끝없이 새롭고, 강렬한 자극을 필요로 하는 ‘탐닉형’ 성격의 소유자가 여기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3) 세 번째 원인은 우울증을 들 수가 있습니다. 우울증 환자들이 도박 중독에 빠지기 쉽다’고 한국 마약 퇴치본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4) 네 번째 원인은 현실도피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현실도피적인 사람들이 중독의 위험이 큰 이유는 그들은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으로 친구가 별로 없고 사회활동도 미약한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5) 또 한 가지는 의학적인 원인이 있다고 합니다. 도박 중독은 의학용어로 ‘병적 도박’ 혹은 ‘도박광’이라 불린다고 합니다. 이는 개인의 의지만으로 고칠 수 있는 습관이 아니라 일종의 충동조절장애. 즉 도박에 대한 욕구가 강해 자기 스스로 행동을 절제할 수 없기 때문에 알코올이나 약물 중독 등과 비슷한 원인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체에 치명적인 영향은 없지만 뇌 기능장애의 일종인 셈이라는 것입니다.

도박 중독 상태에 빠지면 특징적인 증상이 나타납니다. 바로 내성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도박하는 재미에 한번 빠지면 온통 그 생각뿐입니다. 같은 흥분을 얻기 위해서는 도박을 하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야 하고 거는 돈의 액수도 점점 커져야 합니다. 결국 웬만한 액수에는 눈 하나 깜짝 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무서운 증상은 금단 증상으로서 대부분의 도박꾼들이 어느 순간 자신에게 문제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낍니다. 가정과 직장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면 일시적으로 자제하려는 결심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금단 증상으로 번번이 실패하기 마련. 도박을 하지 않으면 초조하고 불안해 안절부절 못하고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그러다 도박을 하는 순간부터는 불쾌한 기분이 사라지고 다시 흥분 상태가 됩니다. 이 같은 증상이 반복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끊을 수 없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회에서 대두되고 있는 이러한 중독 현상의 문제들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세상 것을 끊어야 하는 책임이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 이러한 악행으로부터 어떻게 헤어 나올 수 있겠습니까? 아예 처음부터 발을 들여 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만일 이미 발을 들여 놓아 맛을 보았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 고린도후서6장 17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끊기는 어렵다. 일단 도박에 중독되면 자기 의지로 끊기는 쉽지 않다. 다른 중독증과 마찬가지로 도박을 끊으면 우울증, 불안감, 불면증 등의 금단 증상을 보이기 때문. 술기운이 떨어진 알코올 중독자가 다시 술을 찾는 것과 비슷하다. 따라서 도박증세를 보일 땐 가능한 빨리 적극적인 치료를 해야 한다. 중독자는 도박을 절대 병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가족 등 주변 사람이 강제로 치료를 받게 해야 한다.”

 

중독에서 빠져나오려면 오직 마음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육신이 마음을 지배하는 삶을 버리고 마음, 곧 영이 육을 지배하는 삶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풍부하게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10장 28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 ‘지식과 총명’을 간구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계명)을 깨달아 알아가므로 그 말씀을 준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 것을 끊는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죄에 중독된 인류를 치료하기 위해 오신 의원이신 예수님에게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 책임지는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 자녀의 결혼을 책임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10장 30절을 보십시오:

“우리 딸은 이 땅 백성에게 주지 아니하고 우리 아들을 위하여 저희 딸을 데려오지 아니하며.”

 

요즘 자녀 결혼 시키는 것 얼마나 힘듭니까? 한국가족상담교육연구소 책임연구원·가족학 박사인 배선희 박사는 「결혼 안하든 늦든 다그칠 일 아니죠」란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딸이 서른이 다 되어 가는데 결혼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어요. 걱정이 되어 결혼 말을 꺼내기만 하면 심하게 화를 내고 급기야는 싸움이 되어 말하기도 겁이 나요. 그냥 내버려두자니 때를 놓쳐 시집도 못가고 평생 혼자 살게 되는게 아닐까 걱정이 되고…. 딸 결혼 생각만 하면 밤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요. 부모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 되죠.”

 

적령기를 지나고도 결혼하지 않은 자녀를 둔 부모들의 대부분은 이런 걱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녀를 잘 키워서 적절한 시기에 좋은 사람과 결혼시키는 것을 자신들의 중요한 책임이자 의무로 생각하고 있는 부모들에게 이런 걱정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오죽하면 `결혼하는 것이 가장 큰 효도'라는 말이 있기까지 하겠습니까? 그만큼 부모들은 자녀의 결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때로는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얼마나 자녀 결혼시키는 부모님의 책임이 막중합니까?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자녀를 양육하고 있는 부모님으로서 아들, 딸을 결혼 시킨다는 것은 큰 책임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두 번째 결심은 자기 자녀들의 결혼을 책임지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자녀들을 이방인과 결혼시키지 않겠다고 결심하였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사람들과 통혼하지 않겠다고 하는 서약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일찍이 모세에게 주신 신명기 7장3-4절 말씀대로 돌아가겠다는 회개 운동이었습니다.

 

성경 신명기 7장 3-4절을 보십시오:

“또 그들과 혼인하지 말지니 네 딸을 그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 딸로 네 며느리를 삼지 말 것은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로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방인들 간의 결혼은 에스라와 느헤미야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큰 문제가 됐었습니다.

 

성경 에스라9장 2절을 보십시오:

“그들의(이방인들의) 딸을 취하여 아내와 며느리를 삼아 거룩한 자손으로 이방 족속과 서로 섞이게 하는데 방백들과 두목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 하는지라.”

 

거룩한 자손으로 이방 족속과 서로 섞이게 하는 이 죄악에 지도자들이 더욱 앞장을 섰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자녀 결혼에 대한 결심을 지금 말로 한다면 우리 그리스도인 부모님들이 자기 자녀들을 불신자하고 결혼 시키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의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성경 고린도후서 6장 14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

 

왜 하나님이 그러한 계명을 주셨습니까?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 자녀들로 하여금 불신자들에게 유혹을 받아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신7:3-4). 우리 주위에 불신자와 결혼하여 전에 다니던 교회를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질문은 과연 신자들끼리 결혼시키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것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사역을 하고 있었을 때 어떤 자매가 통계학적으로 생각해 볼 때에 예수님 믿는 처녀 자매들이 형제들 보다 많은 때 어떻게 믿는 사람들끼리 결혼이 다 가능한가라는 식의 질문을 저에게 던진 기억이 납니다. 통계학적으로는 어려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런저런 어려운 문제들을 제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자녀 결혼은 믿음으로 시키는 것이지 통계학적으로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자녀 결혼시키기’에서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자부될 사람을 택할 때에, 그가 살고 있는 가나안 족속 중에서 택하려 하지 않고, 멀리 자기의 고향인 메소보다미아로, 그의 종 에리에셀을 보여 택하여 오게 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결혼 문제에 있어 얼마나 신중하게 고려하였는가를 보여 줍니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인 창세기 24장7절 말씀을 순종하였습니다: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를 내 아버지의 집과 내 본토에 서 떠나게 하시고 내게 말씀하시며 내게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이 땅을 네 씨에게 주리라 하셨으니 그가 사자를 네 앞에 보낼지라 네가 거기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할 지니라”

 

오늘 우리들도 결혼 문제를 이처럼 신중히 해야 합니다. 우리의 결혼 문제에 있어, 여호와 하나님의 지시하심을 따라 행할 것이며, 불신자와의 결혼은 단연코 거절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남녀 간 신자로서 금전, 명예, 지위, 용모 등 허영에 끌려 불신자와 결혼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이처럼 자기의 욕심에 끌려서 결혼을 한다면 그 가정이 온전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진리가 없고, 하나님이 주장하시지 않는 가정은 무너질 위험을 염려해야 합니다.

 

마지막 셋째로, 우리 책임지는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은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느헤미야 10장 31절을 보십시오:

“혹시 이 땅 백성이 안식일에 물화나 식물을 가져다가 팔려 할지라도 우리가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사지 않겠고 제칠 년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빚을 탕감하리라 하였고.”

 

말씀의 부흥 가운데 결심을 하고 있는 느헤미야 시대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들과 절교한 후 하나님의 율법을 좇겠다고 헌신하였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그들은 자신들의 자녀들을 이방인과 결혼시키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과 더불어 모세의 십계명 중 4번째 계명인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31절). 어떻게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겠다는 것입니까? 가나안 땅의 이방인 백성들이 “물화나 식물”을 가져다가 팔려 할지라도 안식일이나 성일에는 안 사겠다는 결심입니다. 또 한가지는, 제 칠년마다 땅을 쉬게 하고 모든 빛을 탕감하겠는 결심이었습니다. 즉 칠년째 되는 해 1년 동안은 경작지 않고 그대로 땅을 두겠다는 말입니다(그러므로 땅이 비옥해 짐). 그 뿐 아니라 그들은 그 해에 채무자들의 빛을 탕감해 준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채무자들은 다시 한 번 경제적 기반을 새로 닦아 나아갈 소망과 기회를 얻게 해주었습니다. 그 결과 사회에는 빈부의 격차가 줄어들었습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 말은 매매 자체를 정죄함이 아니고 육신의 안식을 방해할 정도로, 또는 신령한 예배에 지장을 줄 정도로 취해지는 상업 행위를 금지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육신이 쉰다는 것은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는 정지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날에 쉰다는 것은 세상 일로 인한 고역을 하지 않고 육신과 영혼이 함께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평안을 누림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안식일인 주일을 어떻게 지켜야 합니까? 저는 자라나면서 주일 돈을 쓰면 안 되는 것으로 배우고 자라났습니다. 언젠가는 주일에 학생으로서 공부하는 것도 하면 안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신학교 가서 바뀌었습니다. 한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주일 돈을 사용하는 것, 즉 매매하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담임 목사가 된 후 주일 매매하는 것을 중단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주일을 어떻게 지키는 것이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까? 우리 교회가 소속돼 있는 PCA(Presbyterian Church of America) 헌법 48장을 보면 이런 규칙이 있습니다:

“주일을 기억하는 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며 주일이 닥치기 전에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모든 세상일을 정리하여 합당한 때에 중지하여, 성경이 요구하는 대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48:3)

“온 하루를 온전히 주께 드리는 날로 지켜야 하며 공적이나 사적으로나 신앙적 활동에 종사해야 한다. 그러므로 온 종일 불필요한 노동으로부터 거룩하게 쉼을 얻어야 하며, 다른 날에는 합당하게 여기는 오락일지라도 삼가며, 또한 할 수 있는 한 세속적인 생각이나 대화를 피해야 한다”(48:4)

 

이 얼마나 도전적입니까? 주일을 닥치기 전에 미리 준비한다는 것, 얼마나 우리는 습관화 되어있습니까? 오히려 주일날 몰아서 주중에 못했던 것을 다 하려고 하지는 않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성경이 요구하는 대로 안식일을 거룩하게 못 지키고 있지는 않습니까? 주일 날 오락을 삼가야 하는데 오히려 주일 날 오락하는 것이 습관화 되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미국 12대 대통령 재커리 테일러 장군은 헌법에 의거,1849년 3월4일 대통령에 취임해야 되는데 그날이 주일이라 취임을 거부하여 에치슨 상원의장이 24시간 대통령 임무를 대신했습니다. 주일성수는 대통령 취임식보다 우선하는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입니다.

법정 총기난사 살인범인 브리이언 니콜스(33)에게 인질로 잡혔던 26세 미망인 애쉴리 스미스는 니콜스에게 릭 워렌 목사님의 저서 “목적이 이끄는 삶”을 읽어주었다고 합니다. 그 책에 ‘Day 33’에 나와 있는 진실한 종의 행동지침을 읽어주면서 애쉴리 스미스는 니콜스에게 이렇게 설득했다고 합니다:

“나를 인질로 잡게 된 일이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것이며, 살인행위로 인해 가게 될 교도소에서의 전도활동이 당신의 삶의 목적임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를 들은 후, 니콜스는 이성을 잃은 살인마에서 중심을 잡은 사람으로 돌아왔으며, 급기야 애쉴리를 풀어주고 순순히 투항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책임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까?

그러나 너무나 많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인으로서 양심을 버리고 책임을 지는 삶을 살아드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책임을 지지 못하는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책임지시고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과연 우리의 구원을 책임지실 필요가 있으셨습니까? 세상과 절교하지 못하고 짝지어 죄를 거듭 범하는 우리를 위하여 가정의 자녀 결혼 등 자녀 양육에 책임을 못 지는 우리를 위하여 성수주일을 하지 못하고 주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나타내지 못하는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책임시지고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