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를 아는 그리스도인

 

 

 

“…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 (스바냐 3장 5절 하반절).

 

 

스테판 씨맨즈는 그의 책 《마음의 상처를 십자가로 가져가라》에서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죄책은 우리의 행위에 관한 것이다. 수치심은 우리가 말하거나 행한 어떤 것에 의해 유발되기는 하지만 우리 존재에 관한 것이다. 수치심의 핵심에는 자기 노출로 인해 느끼는 예민한 느낌이 있다.”

우리 사람의 본능은 자기가 수치스럽게 여기는 것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다른 사람들에게 숨기고자 포장합니다. 누군가 나 자신의 수치스러운 점들을 알까봐 노심초사 두려움 속에서 긴장하며, 그러한 긴장감 속에서 자기의 수치스러운 점들을 여러 겹으로 포장하여서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본능인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인간의 본능에 이끌려서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제대로 보여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도 볼 수도 없습니다. 때문에 본인의 가치를 하찮게 보는 가운데 그러한 자신을 보호하고자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진실을 인정하기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손가락질함으로써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데 애씁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한 후 남을 탓했던 것처럼 우리는 주위 사람들과 환경 등을 탓합니다.

이렇게 자기 존재를 하나님의 관점으로 보지 못하게 만드는 수치심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뿐만 아니라 삐뚤어진 자아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무력감을 느끼게 하며 또한 자신감을 잃게 만듭니다. 더 나아가서 수치심은 모든 중독성 행동을 부추길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통스러운 자기 노출을 견뎌내기가 너무나 벅차기 때문에 위로와 인정을 받기 위해 마약, 일, 음식, 섹스, 기타 자신의 창조한 무감각의 세계로 빠져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자신의 창조한 무감각의 세계로 빠져든 사람은 마음 깊은 속에 수치심의 썩은 뿌리는 존재하고 있지만 그 사실을 잊고 살아갑니다. 결국 착각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고 사람들에게 말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은 수치를 알지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도둑질을 하고도 수치를 모릅니다. 그들은 성폭행 및 간음을 하고도 수치를 모릅니다. 그들은 살인을 저질러 놓고도 수치를 모릅니다. 세상이 온통 범죄로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죄를 범하는 세상 사람들은 수치를 모릅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더 심각한 죄악이 교회 안에서 행해지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십일조와 같은 헌금을 도둑질하고도 수치를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성추행과 폭행 및 간음을 하고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성경에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살인과 같다고 하였는데 그러한 살인을 하고도 수치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입술로는 하나님을 경배하며 찬양을 드리면서 우리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손과 발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참으로 수치스러운 것은 그러한 위선 속에서도 우리 마음에는 수치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마비되었고 우리의 얼굴은 너무 두꺼워졌습니다. 우리의 얼굴과 양심은 거짓과 위선으로 너무나 두껍게 포장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오늘 본문 스바냐 3장 5절 하반절인 “불의한 자는 수치를 알지 못하는도다”라는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수치를 알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불의한 자는 자기 자신의 수치를 알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불의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교훈도 받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있습니다(2절).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치 않는데 있어서 너무 고집스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지 않고(2절)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좇지 아니하고 있습니다(1:6). 우리는 우리의 ‘바알(우상)’(4절)을 좇고 있습니다. 마치 재판장들이 뇌물을 받아먹는데 있어서 기탄없이 생각하여 받을수록 만족을 느끼지 않았던 것처럼(3:3) 우리는 돈을 우상화하여 좇으면서 우리의 탐욕을 만족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더 심각한 죄는 마치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경솔하고 간사했던 것처럼 우리 교회 지도자들이 진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제사장들이 성소를 더럽히고 율법을 범했던 것처럼, 우리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의 성결을 파수하지 못하고 오히려 거짓으로 교회를 더럽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행위를 더럽게 하고 있습니다(8절). 그러면서도 우리는 수치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저는 오늘 새벽기도회 때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오라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주여 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 오라 하실 대에 날 부르소서”(찬송가 337장 1절과 후렴)를 반복하여 계속 조용히 불렀습니다.

 

이것이 저의 기도였습니다: “주님, 수치를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들춰내시는 죄악을 직시하면서 수치심을 갖고 싶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할 줄 아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저는 저의 수치심을 가지고 수치스러운 죽음을 십자가에서 당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수치의 나무에 돌아가신 예수님, 그 십자가의 수치(부끄러움)를 개의치 아니하시고(히12:2) 벌거벗기신 채 저주의 나무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 이 예수님을 바라볼 때 스바냐 3장 11절 상반절인 “그 날에 네가 내게 범죄한 모든 행위를 인하여 수치를 당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말씀 묵상 나눔 형제, 자매들, 우리 더 이상 우리의 수치를 숨기지 마십시다. 더 이상 거룩 하나님 앞에서까지 우리의 수치를 포장하지 마십시다. 우리 모두 예수님의 수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바라보십시다. 그리고 우리의 수치를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자복하며 회개하십시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는 수치의 나무에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수치를 덮으실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