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옳게 보이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누가복음 10장 29절).

 

 

여러분은 성경에 나오는 간음한 다윗 왕의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경고로 받아들이십니까? 아니면 위로로 받아들이십니까? 왠지 요즘 목회자의 성추행이 일어날 때마다 인터넷 기사를 보면 간음한 다윗 왕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다윗 왕 이야기의 초점은 회개보다 용서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목회자들이 성추행까지 범하고 나서도 다윗 왕의 이야기를 논하면서 철저한 죄에 대한 회개가 없이 그냥 대충 넘어가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들은 간음죄에 대한 정직한 마음의 자백이 없이 그저 간음죄를 숨기려다가 들키면 그때서야 할 수 없이 우리 자신들의 간음죄를 인정하는 것 같습니다. 인정하되 우리는 그 들킨 죄에 대한 인정도 교회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죄를 지적한 사람과 몇몇 사람들 앞에서만 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계속 우리가 범한 죄를 은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죄악된 본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의 범죄를 철저히 들춰내셨을 뿐만 아니라 성경에 기록하시므로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다 알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을 가리켜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행13:22)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다윗은 철저히 회개하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다시금 쓰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죄를 철저히 들춰내심을 받은 자는 복 받은 자입니다. 더 나아가서 그 죄를 철저히 회개케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는 자는 참 복 받은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를 들춰내심에도 불구하고 죄를 계속 숨기려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 종을 더 이상 쓰지 않으십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죄를 들춰내심에도 불구하고 계속 죄를 덮고자 하며, 철저한 회개가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그 종을 버리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덮어주실 때 그것이 진정한 축복인데(시32:1) 사람이 자신의 죄를 덮으려고 함은 저주입니다.

그런데 버림받는 종은 마치 사울 왕처럼 죄를 지적 받고나서도 이런 저런 변명과 합리화 속에서 계속 사람들 앞에서 높임을 받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삼상15:30). 교만의 끝은 어디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성경 누가복음 10장 29절에 나오는 ‘이 사람’은 ‘어떤 율법사’입니다(25절). 그 율법사는 예수님께 나아와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으로 예수님을 시험하였습니다(25절). 그 때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26절). 그 때 그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27절). 그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28절). 그 대답을 들은 율법사는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님께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질문하였습니다(29절).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질문에 선한 사마리안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30-35절).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말씀하셨습니다(37절).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사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왜 예수님께서는 28절에서 “이를 행하라(Do this)”고 말씀하신 후 이렇게 37절에 와서도 “이와 같이 하라(Do likewise)”고 두 번이나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사가 율법은 잘 알고 있었지만 그 율법을 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두 번이나 ‘행하라’고 말씀하신 것 같습니다. 특히 그 율법사는 율법의 잘못된 해석의 틀 안에 자기 자신을 집어넣어 이방인을 이웃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기에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을 행하라고 강조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이 율법사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웃 사랑을 행하였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성경은 그 율법사가 예수님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37절)는 말씀을 듣고 돌아가서 이방인들을 이웃으로 생각하고, 사랑했는지 침묵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추측은 그 율법사는 예수님의 계명에 순종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이유는, 그는 예수님을 ‘시험’하는 자였기 때문입니다(25절). 이보다 더 큰 둘째 이유는 그는 교만하여 자기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29절). 스스로 옳게 보이려고 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들어도, 개가 다시 자기의 토한 것으로 돌아감 같이 자기의 미련함으로 돌아갑니다(잠26:11).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는데(눅10:27) 교만한 사람은 그 명령을 불순종하고 또 불순종합니다. 그리고 그는 불순종하면서 자신의 불순종을 합리화시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의 이웃을 마음으로 정해놓데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이웃으로 여기고 사랑합니다(마5:46-47). 그는 자기를 미워하던지 또는 자기가 미워하는 사람은 이웃으로 여기지 않기에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무서운 것은 교만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 옳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의 계명에 불순종하고 있으면서도 순종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죄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죄를 회개할 수도 없습니다. 설상 그가 자신의 죄를 지적받는다 하여도 마음이 교만하여 작은 죄책감 속에서 죄를 덮고 또 덮고자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죄를 들춰내시고 또 들춰내심에도 불구하고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힘으로 죄를 덮고 또 덮고자 애씁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입니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만한 사람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가 미련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전10:3). 혹시 저와 여러분이 스스로 옳게 보이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아닌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