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하지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 하느냐 간음하지 말라 말하는 네가 간음하느냐 우상을 가중히 여기는 네가 신사 물건을 도적질 하느냐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 도다 네가 율법을 행한즉 할례가 유익하나 만일 율법을 범한즉 네 할례는 무할 례가 되었느니라.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를 지키면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또한 본래 무할례자가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너를 판단하지 아니하겠느냐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 서니라.” (로마서 2장17-29절)

 

21세기의 선지자로 불렸던 A. W. 토저 목사님이 쓴 《나는 진짜인가, 가짜인가?》라는 책을 보면 「진짜 그리스도인의 자기 진단법」 장이 나옵니다. 그 장에서 토저 목사님은 진짜 크리스천임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 자기 발견을 위한 7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이 질문들이 우리의 모든 것을 밝혀주지 못할지라도 부분적으로는 도움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한 번 자신에게 이 7가지 질문들을 던져 보길 바랍니다.

 

첫째,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둘째, 내가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셋째, 나는 돈을 어떻게 쓰는가?

넷째, 나는 여가를 어떻게 보내는가?

다섯째, 나는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는가?

여섯째, 나는 누구를 존경하고, 어떤 것에 열광하는가?

일곱째, 나는 무엇을 보고 웃는가?

 

이 질문을 던진 후, 토저 목사님은 「누가 가짜인가?」에 대해 8가지로 이야기합니다.

 

  1. 가짜는 인스턴트이다: 인스턴트 기독교는 한 번의 신앙의 행위로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가르치는 경향이 있다. 이는 더 이상의 영적 전진을 갈망하는 욕구를 억압한다.
  2. 가짜는 인격의 변화를 소홀히 한다: 세월이 흐르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첫걸음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아 아니라 변화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변화시키실 수 있다.
  3. 가짜는 하나님의 징계를 십자가 지는 것으로 착각한다: 하나님께 매를 맞아 아플 때 우리는 우리가 잠시 옳은 길에서 벗어나 있다고 느껴야 한다. 반면 십자가의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우리가 옳은 길에 있음을 말해준다.
  4. 가짜는 행함으로 죄사함을 받으려 한다: 행함을 통해서 죄사함을 얻겠다는 시도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잘못을 상쇄하려면 얼마나 많은 선행을 쌓아야 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5. 가짜는 신조를 무시한다: 우리가 교리적 지식 없이 하나님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으며,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면 안 된다. 진리는 명문화 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을 명문화한 것이 곧 신조이다.
  6. 가짜는 신학을 경시한다: 이 세상에서 올바로 살고 영원한 하늘나라에 이르게 하는데 필수적인 것은 신학이다. 우리는 어렵게 배우고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굳게 결심하고 신학을 연구해야 한다.
  7. 가짜는 감정을 등한시 여긴다: 우리는 감정들을 두려워하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만드실 때 주신 우리의 정상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8. 가짜는 영적 균형감이 없다: 진리는 새와 같기 때문에 날개 하나로는 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어리석게도 한쪽 날개를 아래로 쑤셔 박은 채 다른 한쪽 날개를 미친 듯이 퍼덕이며 날아보려고 애쓴다.

 

성경 로마서 2장 28-29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로마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표면적 유대인(a Jew who is one outwardly)’과 ‘이면적 유대인(a Jew who is one inwardly)’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왜 이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영적 우월감 속에서 이방인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고 정죄(판단)하는 유대인 성도들에게 표면적 유대인이 진정한 유대인이 아니요, 이면적 유대인이 참 유대임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이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묵상하면서 ‘그렇다면 과연 참된 그리스도인은 누구이며, 표면적 그리스도인, 즉 겉으로 보기에만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겉으로 보이게만 그리스도인인 ‘표면적 그리스도인’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표면적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칭합니다.

 

성경 로마서 2장 17절을 보십시오: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바울은 표면적 유대인들이 자기 자신들을 가리켜 ‘유대인’이라고 칭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보기에 참된 유대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왜 스스로 ‘유대인’이라고 자칭하였을까요? 그들에게는 특권의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 시대의 유대인들은 오직 자신들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특별한 권리(자격)가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 자신들이 ‘유대인’임을 자랑스럽게 자칭하였습니다.

이들이 자랑스럽게 여겼던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특별한 권리는 무엇이었습니까? 이는 크게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선택 받은 백성에게 소속돼 있는 것(belonging to the chosen people)입니다. 둘째, 율법을 의지하는 것(reliance on the law)입니다. 셋째,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a special relationship with God).

표면적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과 특수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선민의식을 가지고 영적 우월감에 젖어 한 공동체 안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 앞에서 하나님을 자랑한 것입니다(17절).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면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일이었습니다.

표면적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권리를 교회 안에서 행사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지만 깊은 마음속에서는 자신들의 영적 우월감, 교만함 가운데에 있습니다. 자기 자신들을 자랑하기를 좋아합니다. 그것을 통해 사람들로부터 자기 자신이 영광 받고 인정받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자들은 사람의 칭찬을 갈급해 합니다. 성경은 이렇게 특권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며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 교회 안에서 특별한 권리를 주장하려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진노(1:18-32)’와 ‘하나님의 심판(2:1-16)’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표면적 그리스도인은 스스로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성경 로마서 2장 19-20절을 보십시오: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표면적 유대인들은 자기들 스스로가 소경 된 자, 어둠 속에 있는 자, 어리석은 자와 어린 아이를 지도하며 인도하는 ‘선생’이라고 믿었습니다. 놀랍게도 이 표면적 유대인들은 자기 자신들이 바로 소경 된 자, 어둠 속에 있는 자, 어리석은 자이며 어린 아이인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 무지의 원인은 영적 우월감, 곧 교만이었습니다.

교만은 이렇게 우리를 맹인으로 만듭니다.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뒤돌아보며 자아성찰하게 하지 못하게 합니다. 영적 교만은 다른 성도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끄집어내어 자기 자신과 비교하고, 스스로가 그 성도보다 더 훌륭한 성도임을 자랑하게 합니다. 이것은 스스로 성경을 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더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자신이 성경에 대해 잘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의 무지함 속에서 겸손하며, 배우고자 하는 마음과 열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성경에 대해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이 바로 영적 우월감 속에서 자기 자신을 내세우느라 교회의 평안을 깨트리고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

 

셋째로, 표면적 그리스도인은 남을 가르치기를 좋아하면서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 로마서 2장 21절을 보십시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제가 도둑질하느냐.”

 

유대 신자들은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 율법을 받은 자들로서, 그 율법을 의지하였고(17절) 또한 율법의 교훈을 받았기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였습니다(18절). 그들은 착각과 교만함 가운데서 다른 이들을 가르치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에 나와 있는 대로 ‘도적질 하지 말라(21절)’, ‘간음하지 말라’, ‘우상을 미워하라(22절)’ 등 이를 가르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그들 스스로는 자기 자신을 가르치지 못하고 동일한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면책하였습니다:

“율법을 자랑하는 네가 율법을 범함으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느냐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 도다”(23-24절)

 

겉으로 보기에 유대 신자들은 성경을 많이 알고 있고, 그들이 가르치는 교훈도 성경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위선적인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 스스로를 가르치는 것에는 소홀했기 때문입니다.

부모로서 자식에게 성경적 교훈을 가르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부모 된 자로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가르치는 것을 게을리 한다면 자녀들의 마음에 감화를 줄 수 없습니다.

 

박윤선 박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런 사람의 교훈은 남을 긍휼히 여기는 동기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능욕에서 난 것이다. 그러한 교훈은 피교육자에게 감화를 주지 못하고, 도리어 반감을 일으킨다.”

 

마지막 넷째로, 표면적 그리스도인은 외면적 생활을 위주로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유대인 신자들에게 율법과 할례, 이 두 가지에 대해 말하면서 율법을 가지고 있고 듣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을 행해야 한다고 권면하였습니다(13절).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율법을 행하지 않으면 할례가 아무 유익이 없는 ‘무할례’가 된다고 말했습니다(25절). 바울이 로마에 있는 유대인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던 이유는 그들이 특권의식과 자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이 율법(the Law)과 할례(circumcision)를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율법과 할례는 하나님께 선택 받은 백성들의 증표이었기에 그들에게 이 두 가지는 엄청난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온전히 행하지 않음에도 율법과 할례를 자랑삼고, 영적 우월감 속에서 교만하게 이방인들을 정죄하는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표면적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표면적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외면적 신앙생활에 치중하느라 참된 믿음이 없이 외식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사람 앞에서 보이고자,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데 힘쓰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과연 참된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참된 그리스도인은 표면적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이면적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면적 그리스도인은 다음 세 가지를 따릅니다.

 

첫째로, 이면적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압니다.

 

성경 로마서 2장 29절을 보십시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찌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면적 유대인은 ‘성령님께서 마음에 할례를 행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성령님께서 마음에 할례를 행하심으로 ‘이면적 유대인’이 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랑 안에서 선택하시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심으로 구원을 얻은 자들입니다. 결코 그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은 자들이 아닙니다. 바울이 로마에 있는 유대인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던 이유는 유대인들이 구원이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라고 믿기보다 조건적, 즉 율법을 행함으로써 구원 받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은 예수 십자가의 공로보다 인간의 공로에 더 크게 의지하는 죄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편지로나마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를 가르쳐 주었던 것입니다.

 

이면적 그리스도인들, 즉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에베소서 2장 8-9절 말씀을 전적으로 믿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구원도 하나님의 선물인 줄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이 결코 자신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들에 대해 아무 것도 자랑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자랑 할 수도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둘째로, 이면적 그리스도인은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들은 표면적 그리스도인들처럼 율법과 할례에 대해 자부심을 갖거나 교만함 가운데서 입술로만 신앙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로 떠드는 자들이 아니라 듣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열매를 맺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에 나아가서도 입술로만 ‘나는 교회 다닙니다.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어두운 세상 속에서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 빛을 드러내는 삶을 삽니다.

만일 우리들이 참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창피해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으로 나아갈 때 빛 된 삶을 살아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의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입술은 예수님을 닮은 것 같지만 우리의 행동이나 삶은 예수님과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는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살아 있는 바른 믿음 생활을 해야 합니다.

 

셋째로, 이면적 그리스도인은 외면적인 생활에 치중하기보다 내면적인 신앙생활에 초점을 맞추며 살아갑니다.

이면적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게서 칭찬 받는 것이지 결코 사람에게서 칭찬 받는 것이 아닙니다(29절하). 그들은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하기보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사람들이 되고자 힘씁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내면을 가꾸는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앙생활은 아름답습니다.

찬송가 518장 ‘신자 되기 원합니다.’란 찬송가 가사가 생각납니다. 이 찬송가 가사에는 ‘진심으로’라는 말이 20번 나옵니다: ‘진심으로 신자 되길 원합니다’. ‘진심으로 사랑하길 원합니다’, ‘진심으로 거룩하길 원합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예수 닮기 원합니다.’ 이 찬송은 흑인 영가라고 합니다. 흑인영가는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끌려와 얼굴 색깔이 검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노예로서 갖은 수모와 멸시를 당했던 흑인 노예들의 신앙적 바람과 정한이 오랜 세월을 거쳐 노래로 형상화된 것입니다. 노예로서 혹독한 세월을 보내야만 했던 흑인들이 유대인 신자들처럼 영적 우월감 속에서 자기들이 진정한 신자라고 말하면서 남을 가르치려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마음 중심에서 우러러 나오는 간절함으로 ‘진심으로’ 신자 되길 원한다고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표면적 그리스도인들이 아닌 이면적 그리스도인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진심으로 참된 신자가 되길 기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줄 알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행함이 있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길 기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내면을 아름답게 가꾸는 참된 신자가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