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람의 노래 (1): 우리의 종말을 노래하십시다!

 

 

 

[민수기 237-10]

 

 

여러분은 여러분의 죽음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장례식 때 유가족 식구들과 조문객들이 무슨 노래를 부르기를 원하십니까?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요 세월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연습이라는 것이 없습니다. 젊은 시절 잘못 살았다고 돌릴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하루하루가 우리에게는 마지막이고, 최후요, 전부입니다. 따라서 시간의 매듭을 잘 짓는 것이 중요합니다. 끝마무리를 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이 더 중요합니다. 만날 때보다 헤어질 때가 더 중요하고, 태어날 때보다 죽을 때가 더 중요합니다(인터넷).

 

성경 민수기 23장 7-10절을 보면 발람이라는 선지자의 첫 번째 노래가 나옵니다. 그 노래 내용 중 10절 하반절을 보면 발람 선지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 나는 의인의 죽음 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발람의 노래(1): 우리의 종말을 노래하십시다!”란 제목 아래 발람의 첫 번째 노래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그러기에 앞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 봐야할 것은 “발람”이란 누구인가?” 입니다. 발람이란 인물은 민수기 22장 5절을 보면 “브올의 아들”로서 브돌 지방의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민수기 22-24장에서만 50번이나 나타나는데 그 외에도 구약 성경에는 민수기 31장 8, 16절, 신명기 23장 4-5절, 여호수아 13장 22절, 24장 9-10절, 느헤미야 13장 절 그리고 미가 6장 5절에도 나타납니다. 신약 성경에는 “발람”이란 이름인 베드로후서 2장 15절과 유다서 11절 그리고 요한계시록 2장 14절에도 나와 있습니다(Wood). 이 모든 성경구절들을 보면 우리는 좀 혼동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어느 성경 구절들을 보면 발람이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 같이 보이는데 또 어떤 성경 구절들을 보면 발람은 거짓된 선지자 같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민수기 22장 18절을 보면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이(4절) 이스라엘이 아모리인에게 행한 모든 일을 보았고(2절) 지금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3절) 요단 건너편 곧 여리고 맞은편 모압 평지에 진을 치고 있는데(1절) 모압이 이스라엘을 심히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3절). 그래서 모압 왕 발락은 발람 선지자를 불러 그로 하여금 자기를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들 저주케 하려고 했을 때(6절) 발람은 발락이 아무리 은, 금을 가득히 채워서 자기에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고 말했습니다(18절; 24:13). 이것을 보면 왠지 우리는 발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참된 선지자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발람은 “내가 네게 이르는 말만 준행할지니라”는 하나님의 말씀(22:20)에 순종하여 발락이 원하는 데로 이스라엘 백성을 저주하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성경구절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이 발람이란 선지자는 거짓된 선지자라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민수기 22장 7절을 보면 모압 왕 발락이 발람 선지자를 불러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케 하기 위해서 모압 장로들과 미디안 장로들을 그에게 보냈을 때 그들의 손에는 “복술의 예물”(the fee of divination)이 있었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복술의 예물”이 무엇이겠습니까? 점을 치는 점술가(점쟁이?)에게 갖다 주는 것이 아닙니까? 아니 어떻게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복술의 예물을 가지고 갔다고 성경은 말씀할 수가 있겠습니까? 실제로 여호수아 13장 22절을 보면 이스라엘 자손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아모리 사람들과 미디안 사람들을 죽이는 과정에서 “브올의 아들 술사(the diviner, one who practiced divination) 발람도 칼날로 죽였었더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두 구절만 보아도 발람이란 사람은 하나님의 선지자라기보다 점술가라고 말하는데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신약 성경 구절들을 보면 발람은 점술가였을 뿐만 아니라 물질을 사랑하였던 사람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 15절을 보십시오: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또한 신약 성경 유다서 11절을 보십시오: “화 있을찐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좇아 멸망을 받았도다.” 이 말씀들을 볼 때 발람은 하나님의 선지자이기보다 점술가로서 불의의 삯을 사랑하고 그 삯을 위하여 일을 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우리가 요한계시록 2장 14절을 보면 분명히 발람은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가 아닌 것을 우리는 확인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느니라.” “발람”이란 이름의 뜻이 그에게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바로 “백성을 파멸시키는 자”입니다(인터넷).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여러분은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발람과 같은 거짓 선지자요 점술가를 통해서도 발락의 저주를 돌이켜 세 번이나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케 하셨는지 좀 의아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민수기 22장 12절 하반절에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들이기에 하나님께서는 모압 왕 발락이 거짓 선지자요 점술가인 발람을 불러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시므로 발람을 말을 듣지 않으시고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하셨”다(신23:5), “나는 너희를 그 손에서 건져 내었”다(수24:10)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을 주시고 구원해 주셨습니까?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들이 된 것입니까? 창세기 12장 1-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언약의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맺으신 언약대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들로 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발람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복 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하는 것을 허락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저주를 변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결국 민수기 23장 7-10절에 나와 있는 발람의 첫 번째 노래는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언약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축복해 주셨다는 사실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노래의 내용을 한 네 가지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로, 발람의 노래 내용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을 변하여 복되게 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민수기 23장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 지금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맹렬히 비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교회를 저주하고 있습니다. 과연 저와 여러분은 그들의 비난과 저주에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저는 이 질문을 생각할 때 죄를 범한 다윗이 자기 아들 압살롬을 피해 도망가는 과정에 시므이란 사람에게 저주 받았을 때가 생각납니다. 다윗이 뱌후림이란 곳에 이르렀을 때 베냐민 지파 사울의 집 족속인 시므이란 사람이 나오면서 다윗을 연하여 저주했을 때(삼하16:5, 7-8) 다윗 왕 곁에 있었던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데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라고 다윗에 요청했습니다(9절). 그 때 다윗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주시리라”(10-12절). 이 얼마나 귀한 자세입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심지어 저주를 받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다윗처럼 겸손히 이 세상 사람들의 저주를 듣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원통함을 감찰하시사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우리에)게 갚아주시리라”는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들어야 합니다(12절). 그 이유는 우리 하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의 저주를 변하여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 민수기 23장 7절을 보면 발람이 예언을 지어 말하되 모압 왕 발락이 자기를 아람에서 데려다가 발락 왕을 위하여 야곱(이스라엘)을 저주하고 꾸짖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모압이 이스라엘 백성의 많음으로 인하여 심히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22:3). 모압 백성들은 이스라엘 자손의 연고로 번민하였기에(3절) 모압 왕 발락은 사자들을 보내어 발람을 데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발람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저주케 하므로 발락은 이스라엘 자손을 쳐서 이기어 그 땅에서 몰아내려고 했던 것입니다(6절). 그러나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모압 왕 발락이나 모압 백성들은 이스라엘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모압을 해하지 않도록 이미 방침을 세우셨기 때문입니다(박윤선). 신명기 2장 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모압을 괴롭게 말라 그와 싸우지도 말라 그 땅을 내가 네게 기업으로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롯 자손에게 아르를 기업으로 주었음이로라.” 그러나 모압 왕 발락은 그것을 몰랐기에 큰 두려움 속에서 점술가 발람을 데리고 와서 이스라엘을 저주케 하여 그들을 그 땅에서 몰아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발락의 계획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발람을 불러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케 하려는 발락의 계획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신명기 23장 5절을 보십시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사랑하시므로 발람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그 저주를 변하여 복이 되게 하셨나니.” 하나님께서는 발람의 말을 듣지 않으시고 그 저주를 변하여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복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기에 저주를 변하여 우리에게 복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교회를 맹렬히 비난하고 저주를 퍼붓는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변하여 교회를 축복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묵상할 때 저는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이 그의 형들에게 한 말이 생각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하나님께서 사랑하시사 함께 하셨던 요셉, 비록 형제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시사 요셉을 애굽에서 높이셨고 그로 하여금 야곱과 그의 자손들의 생명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성경 에스더서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들을 그들의 대적인 하만 장군에게서 벗어나게 하시되 유대인들의 슬픔을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셨고 그들의 애통을 변하여 길한 날이 되게 하시지 않았습니까? (에9:22)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슬픔과 애통을 돌이켜 기쁨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진노를 십자가에 달리신 독생자 예수님께 다 쏟으시사 우리에게는 모든 죄를 다 사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4장 6절을 보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최고의 “행복”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찬송가 28장 “복의 근원 강림하사”를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1절)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송하게 하소/ 한량없이 자비하심 측량 할길 없도다/ 천사들의 찬송가로 나를 가르치소서/ 구속하신 그 사랑을 항상 찬송 합니다.”

 

둘째로, 발람의 노래 내용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이 세상에서 구별하셨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민수기 23장 9절을 보십시오: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그를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발람은 모압 왕 발락이 데리고 간 바위 위 높은 곳에서 모앞 평지에 진을 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았을 때(22:1)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고 말하였는데 그 말의 의미는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 복 받은 자들로서(12절) 다른 나라들(이방 나라들 혹은 열방들)과 떨어져 살되 안전하고(safety) 미래의 보장(security)을 받았다는 말입니다(Cole). 그래서 발람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보면서 “그를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고 말한 것입니다(23:9).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구별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구별되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오직 자기들을 사랑하사 선택하여 구별하신 하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면서 세상의 하나님의 영광들 들어내는 하나님의 특별한 민족입니다. 신명기 26장 18-19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도 네게 말씀하신 대로 오늘날 너를 자기의 보배로운 백성으로 인정하시고 또 그 모든 명령을 지키게 하리라 확언하셨은즉 여호와께서 너의 칭찬과 명예와 영광으로 그 지으신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그 말씀하신대로 너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성민이 되게 하시리라.” 무슨 뜻입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보배로운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그들은 “여호와의 성민”, 곧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14:2). 우리가 이미 묵상한 모세의 두 번째 노래인 신명기 32장을 보아도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 택하신 기업이로다”라고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노래하고 있습니다(32:9).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사랑하사 그들을 선택하시어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을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되 자기 눈동자 같이 지키셨다는 말입니다(10절).

 

이와 같이, 지금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시사 모든 죄 사하시고 의롭다 하신 하나님의 교회인 저와 여러분을 보호하시고 지켜 주시되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면서 지켜주시고 계십니다(시121). 또한 주님께서는 사랑하사 선택하신 하나님의 백성들에 구원을 베풀어 주시고 또한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사 구별된 저와 여러분을 위하여 지금도 중보 기도해 주시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7장 9절을 보십시오: “내가 저희를 위하여 비옵나니 내가 비옵는 것은 세상을 위함이 아니요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로소이다.” 예수님의 중보기도는 분명히 이 세상을 위함이 아니라 세상과 구별된 세상 중에서 예수님께 주신바 된 사람들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6절). 누가 세상과 구별된 사람들입니까? 누가 이 세상 중에서 예수님께 주신바 된 사람들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바 된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바로 하나님께 축복받은 교회요 하나님께서 세상과 구별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로 삼으신 성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찬송가 245장 “시온성과 같은 교회” 3절 가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의 은혜 내가 받아 시온 백성 되는 때 세상 사람 비방해도 주를 찬송하리라 세상 헛된 모든 영광 아침 안개 같으나 주의 자녀 받을 복은 영원무궁하도다.”

 

셋째로, 발람의 노래 내용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땅에 티끌처럼 많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민수기 23장 10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야곱의 티끌을 뉘 능히 계산하며 이스라엘 사분지 일을 뉘 능히 계수할꼬 ….” 여기서 ‘야곱의 티끌을 뉘 능히 계산하며”라는 말씀은 동양의 과장법으로서 야곱의 후손들이 엄청나게 인구가 많은 것을 나타냅니다(MacArthur). 그 많은 인구들 중에 오늘 본문에서 발람이 바라본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체 인구의 4분의 1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 평지에 진을 치고 있었을 때 회막 중심으로 네 부분으로 나뉘어 진을 치고 있었기에(민2장)(박윤선) 발람은 그 네 부분 중 한 부분의 이스라엘 백성들만 보았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람은 누가 능히 야곱의 티끌과 같은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을 셀 수가 있는가 라고 말했다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 인구의 4분의 1도 이렇게 많이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면 이스라엘 전체 인구의 숫자는 티끌처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언약의 하나님께서 첫째 아담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 성취입니다. 창세기 13장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무슨 뜻입니까? 사람이 땅의 티끌을 셀 수 있으면 하나님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들도 셀 수가 있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다시피 티끌은 셀 수가 없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엄청나게 많게 하시사 마치 티끌을 셀 수가 없듯이 이스라엘의 그 많은 인구의 숫자를 셀 수 없게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의 말씀을 성취하심에 있어서 출애굽기 1장 12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왕 바로와 그의 사람들에게 학대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케 하셨습니다. 그래서 출애굽기 1장 7절을 보면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이 중다하고 번식하고 창성하고 심히 강대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이 얼마나 놀라운 언약의 하나님의 역사입니까? 약속하신 바를 이루시는 하나님께서는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들과 그 시대 사람들이 다 죽었음에도 불구하고(6절) 이스라엘 자손들을 더욱 번식시키시고 창성케 하시되 애굽 사람들에게 학대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더 창성케 하시사 온 땅에 가득하게 하신 것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 민수기 23장에서 발람은 이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부분적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오늘 본문 10절 상반절에서 “야곱의 티끌을 뉘 능히 계산하며 이스라엘 사분지 일을 뉘 능히 계수할꼬”라고 노래를 지어 불렀던 것입니다(민23:10상). 저는 이 발람의 노래를 묵상할 때 복음성가 “물이 바다 덮음 같이”라는 찬양이 생각났습니다: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주의 심장 가지고 우리 이제 일어나 주 따르게 하소서/ 세상 모든 육체가 주의 영광 보도록 우릴 부르시는 하나님/ 주의 손과 발 되어 세상을 치유하며 주 섬기게 하소서/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 가득하리라/ 물이 받다 덮음같이(3x)/ 보리가 그 날에 주의 영광 가득한 세상 우리는 듣게 되리 온 세상 가득한 승리의 함성.” 여러분, 상상이 되십니까?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 동서남북에 편만한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이(창28:14) 함께 모여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인정하면서 부르게 될 “온 세상 가득한 승리의 함성”이 상상이 되십니까? 우리 모두 다 함께 복음성가 “물이 바다 덮음 같이”를 하나님께 찬양하십시다.

 

마지막 넷째로, 발람의 노래의 내용은 발람은 복 받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처럼 자기도 의인의 죽음(종말)을 원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민수기 23장 10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 나는 의인의 죽음 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 하매.” 모압 평지에 회막 중심으로 사면에 진을 치고 있었던(22:1) 하나님께서 구별한 이스라엘 백성들(23:9), 모압 왕 발락이 보기에도 모압 지면을 덮힌(22:5) 티끌처럼 셀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4분이 1만 보고서도(23:10)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들임(22:12)을 알았던 발람은 자기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께 복을 받은 자들 중에 한 사람이길 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발람은 자기의 후손들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께 축복 받아 안전과 평화를 누리기를 원하였기에(Cole) 그는 “나는 의인의 죽음 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이 종말은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라고 노래를 불렀던 것입니다(23:10). 그러나 발람은 민수기 25장에 와서 모압 지도자들을 조언하여 우상 숭배와 음행으로 이스라엘을 전복시키려고 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 여인들과 음행하였고 더 나아가서 그들은 바알브올, 즉 브올이란 곳의 바알이란 우상을 섬겼습니다(25:1-2) (Cole). 그래서 사도 요한은 요한계시록 2장 14절에서 “... 발람이 발락을 가르쳐 이스라엘 앞에 올무를 놓아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였고 또 행음하게 하였”다고 말한 것입니다. 결국 브올의 아들 발람은 오늘 본문 민수기 23장에서 하나님께 복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고 그들의 죽음 같이 죽기를 원하고 그들의 종말과 같기를 바랬지만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음행케 하고 바알이란 우상을 숭배케 하는 죄를 범하게 하므로(31:16) 민수기 31장 8절에 와서 미디안의 다섯 왕과 더불어 칼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의인의 죽음과 같기를 원했지만(23:10) 결국에 가서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므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바른 길을 떠나 미혹케 하므로 악인의 죽음을 맞이하였던 것입니다(벧후2:15).

여러분은 어떠한 죽음을 맞이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어떠한 인생의 종말을 맞이하기를 원하십니까? 우리 모두가 다 의인의 종말을 맞이하고 싶은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의인이 된 저와 여러분은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걸어가서는 아니 됩니다(15절). 그 길은 어그러진 길입니다(유11). 우리는 발람처럼 입술로는 “아무리 은, 금을 가득히 채워서 나에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어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민22:18; 24:13)고 말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불의의 삯(벧후2:15)인 물질을 사랑합니다. 만일 우리가 발람처럼 입술로만 주님 사랑하고 마음으로는 불의 삯인 물질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만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정과 심지어 우리 교회까지 파멸시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발람의 어그러진 길이 아니라 주님의 바른 길, 즉 주님께서 걸어가신 갈보리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그 길을 걸어감에 있어서 우리 각자 자신을 부인하고 우리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야 하기에 험난하고 심지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야 할지라도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에 대속 죽으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그 길을 믿음으로 묵묵히 걸어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 모두가 찬송가 511장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3절인 “이 세상 떠날 때 찬양하고 숨질 때 하는 말 이것일세.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을 찬양할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이 시간 다 일어나셔서 찬송가 511장을 하나님께 찬양하겠습니다.

 

 

 

 

숨질 때 되도록 사랑의 하나님을 찬양하길 원하는,

 

 

 

제임스 김 목사 나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