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

 

 

 

[시편 121]

 

 

여러분은 자신이 도움이 필요한 존재임을 알고 계십니까? 만일 알고 계시다면, 여러분은 도움이 필요할 때 어떻게 하십니까? 누구에게 도움을 청하고 계십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도움이 필요할 때 새찬송가 214장 “나 주의 도움 받고자”를 즐겨 부르곤 합니다.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 그 구원 허락하시사 날 받아주소서”(1절). 특히 저는 3절 가사를 좋아합니다: “내 힘과 결심 약하여 늘 깨어지기 쉬우니 주 이름으로 구원해 날 받아주소서.” 제 자신의 힘과 결심이 약하여 신앙생활 하다가 이리 저리 쓰러질 때가 많을 때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껴서 하나님 앞에 “나 주의 도움 받고자” 찬송을 부르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아가곤 합니다. 그 때 마다 생각나게 하시는 말씀이 바로 시편 121편 1-2절입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저는 오늘 이 말씀 중심으로 “나의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이란 제목 아래 시편 121편 전체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시편 121편 1-2절을 보면 시편 기자는 산을 향하여 눈을 들고 과연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나 생각했습니다. 그 때 그의 결론은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였습니다. 과연 저와 여러분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할 때 누구를 바라보며 도움을 청하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나 하면서 하나님 외에 다른 사람이나 또는 다른 것들을 바라보면서 도움을 청하려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우리의 본능은 철저히 우리 자신의 무력함을 깨닫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여 도움을 청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 도움을 청하기보다 그 분이 만드신 “산들”과 같은 큰 세상 세력을 바라보며 도움을 구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이 세상의 “산들”에게서 진정한 도움을 받지 못할 때 우리는 낙심하고 절망하다가 결국은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 산들까지도 지으신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은 후 시편 기자처럼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시편 기자가 고백하는 나의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은 과연 저와 여러분을 어떻게 도우시고 계신다고 오늘 본문은 말씀하고 있는지 3가지로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나의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실족지 않게 하십니다.

 

오늘 본면 시편 121편 3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너로 실족치 않게 하시며 ….” 이 말씀은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으로 하여금 진리에서 탈선하지 않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박윤선). 이 얼마나 귀한 하나님의 축복이요 은혜입니까? 우리는 이사야 53장 6절 말씀처럼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려고 할 때가 많은 연약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진리의 길에서 탈선하지 않도록 해주시고 계시니 이 얼마나 큰 축복이요 은혜입니까? 한국 청소년들의 탈선 이유가 궁금해서 한 번 인터넷을 찾아보니까 이러한 조사 결과가 나와서 나눕니다(인터넷). 삼성서울병원 소아청소년정신과 홍성도·김지혜 교수 팀은 서울시내 중고생 431명(남 224명·여 207명)을 대상으로 비행행동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각각 남학생은 ‘불안감과 부정적 정서’가, 여학생은 ‘자신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비행행동의 주원인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고 합니다. 홍 교수팀은 “남녀별로 비행행동을 하게 되는 원인이 다른 이유는 남학생의 경우, 불안감 등 부정적 정서를 해소하기 위해 일시적인 비행행동을 표출하는 경우가 많은 반면 여학생들은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 및 사고가 비행행동을 일으키는 주요한 요인으로 조사됐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조사 결과를 읽으면서 청소년 남녀의 탈선 원인이 ‘부정적 정서(남)와 부정적 자기 평가(여)’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과연 우리 진리가 되시는 예수님을 믿고 그를 좇는 제자들인 우리 크리스천들이 진리에서 탈선하는 원인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는 그 원인 중 하나를 의인이 받는 고난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제가 생각하는 이유는 시편 73편에서 시편 기자 아삽이 거의 실족할 뻔 하였던 원인인 ‘의인의 고난 그러나 악인의 형통’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의인이 받는 고난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진리에서 탈선하는 원인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예”라고 생각하신다면 우리가 고난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 대답을 빌립보서 1장 29절에서 찾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알고 그 은혜를 감사하므로 받고 누릴 줄 알게 된다면 우리는 진리에서 탈선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것을 위하여 기도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고난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임을 알게 해주셔서 진리에서 탈선하지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리십시다. 이렇게 기도할 때 우리는 오늘 시편 121편 3절에서 시편 기자가 말씀해 주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실족치 않게 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기도하십시다.

 

둘째로, 나의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십니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어떻게 지키십니까?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면서 저와 여러분을 지키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121편 3절 하반절에서 4절을 보십시오: “너를 지키시는 자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몇 년 전 제 아들 딜런이 밤마다 악몽 때문에 잠자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딜런에게 성경책 읽고 기도하고 자라고 권면했습니다. 제 아내를 지난 주일과 월요일 밤에 딜런에게 꿈에서 고릴라를 보았다고 하기에 무서워하는 아이에게 그 고릴라를 죽이고 딜런이는 죽이지 않는 작은 풍선에 약이 들어있으니까 그것을 들고 자라고 하니까 아마 아이가 주일 밤에는 잠을 잘 잤나 봅니다. 우리 부부가 딜런이를 아무리 사랑한다고 하여도 악몽을 꾸는 아이 옆에서 계속 머리에 손을 얻고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저희 부부가 어떻게 졸지도 않으면서 아이들을 지켜 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면서 지켜 주신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도움이 더딜 때에,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고 있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무시고 계신 것은 아닌가라는 식으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께서는 주무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난관에 처한 성도를 도우시는 것은, 그의 정하신 때에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오래 참기를 배워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늘이 되어 주셔서 해로운 것들로부터 막아주십니다. 오늘 본문 시편 121편 5-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자라 여호와께서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 아니하리로다.”

 

저는 ‘하나님께서 제 우편에서 제 그늘이 되신다’는 말씀을 묵상할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햇빛이 사막에서 계속 나에게 쬐인다면 나는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의 그늘이 되신다는 이 진리의 말씀이 제 마음에 위로가 되었습니다. 마치 햇빛이 쨍쨍 재는 한 여름에 너무나 더워서 큰 나무 밑 그늘 진 곳을 사모하며 그 그늘 아래로 나아가는 것처럼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런 저런 일들로 인하여 시달려 지쳐 있을 때 그늘이 되어주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사모하여 그에게 나아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 살아갈 때에 낮에 해와 밤에 달 같은 해로운 것들이 저와 여러분을 해하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편에서 그늘이 되어주신다는 이 말씀, 우리에게는 위로가 됩니다. 우리의 그늘이 되어주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몰아닥치는 이 세상의 해로운 것들을 막아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방패가 되어주시는 하나님,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을 보호해 주시되 이 광야와 같은 세상에 모든 위험들로부터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윗이 시편 23편 4절에서 고백한 것처럼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 찌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마지막 셋째로, 나의 도움이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모든 환난에서 건져 주십니다.

 

오늘 본문 시편 121편 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실족치 않게 하시며 우리를 모든 위험에서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시며 또한 모든 환난에서 건져 주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보호해 주시며 지켜주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든 환난”을 겪어야 한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주로 우리가 생각할 때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신다면 환난을 당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을 지켜 주시되 여러 종류의 환난을 겪게 허락하셨다가 그 환난에서 건져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진리에서 탈선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 하시지만 환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우리를 단련시키시며 하나님의 축복의 자리로 더욱더 인도해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묵상한 호세아 2장 14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심에 있어서 광야로 인도하셔서 부드럽게 그들의 마음에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징계라기보다 하나님의 축복, 즉 고난은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삶 속에 닥치는 어려움과 역경, 모든 종류의 환난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비록 그 당시에는 힘들고 괴롭고 마음이 아프지만 그 가운데서도 진리에서 탈선하게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의 믿음과 신앙을 더욱더 깊게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케 하시사 그 기도를 응답하시어 구원의 은총을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찬송가 336장 “환난과 핍박 중에도”를 하나님께 찬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 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새찬송가 214장 “나 주의 도움 받고자”는 스코틀랜드의 엘리자 해밀턴(Eliza H. Hamilton)이란 분이 작사하고 D. Sankey라는 유명한 목사님이 작곡한 찬송가입니다. 이 찬송을 작곡한 아이라 D. 생키는 자기의 눈 실명 후 구슬로 출판한 “생키의 복음 찬송 이야기”에서 이렇게 회고 하고 있다고 합니다(인터넷): “여러 해 전, 나는 스코틀랜드의 대도시에서 부흥집회를 하고 있었다. 이때 참석한 어느 소녀가 구원에 관한 간절한 소망을 안고 자기 교회에 돌아가, 구원받는 길을 자세히 알려달라고 담임목사에게 물었다. ‘아가씨, 걱정하지 말아요. 간단해요.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리세요. 그러면 구원받아요.’ 담임목사는 쉽게 대답하였다. 그러자 가엾은 소녀는 울면서 부르짖었다. ‘목사님, 저는 글을 몰라요. 기도할 줄도 몰라요!’ 목사는 그를 위해 기도한 후 기도를 가르쳐주었다. 그러자 소녀가 이렇게 기도를 하였다. ‘주 예수님, 제 모습 이대로 받아주세요.’(Lord Jesus, Take me as I am!). 이렇게 하여 그 소녀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다. 이 소녀의 얘기를 들은 어느 여성이 감동하여 이 찬송을 썼다.” “후에 어느 영국 목사가 편지로 내게 이런 소식을 전해 왔다. -― 그 소녀는, 불신자로서 자기 집에 하숙하고 있는, 구둣방 남자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여자는 남자를 교회에 가자고 권했으나 듣지 않았답니다. 뿐만 아니라 좀 읽어보라고 마루에 놓아두었던 그의 성경을 찢어 놓기까지 하였습니다. 착한 그 여자는 화도 안 내고 정성 드려 도로 붙여서 제 자리에 두며, 제발 좀 읽어보세요, 하고 권하였답니다. 그러나 남편은 소설이나 신문만 읽을 뿐 거들떠보지도 않았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어느 봄날, 그 늙은이는 심한 기관지염에 걸려 병원에 입원하였습니다. 그 착한 여자는 혈혈단신인 그 늙은 남자를 정성껏 간호하였습니다. 그리고 기회만 있으면 영혼구원에 대해 얘기해주고, 성경을 읽어주며 친절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 착한 여자는「나 주의 도움 받고자 주 예수님께 빕니다」찬송을 읽어주었답니다. 그가 후렴을 읽자 그 늙은이가 소리쳤습니다. “그런 말은 책에 없잖아!” “왜 없어요?” 그 착한 여자는 대답하며 찬송을 드려댔답니다. 남자는 읽어보려 했으나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안경을 달라 해 그 구절을 읽고는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날 위해 돌아가신 주라니…!) 그는 찬송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 오! 날 받으옵소서….” 몇 주 후 아침, 그 늙은이가 말하였습니다. “여보, 나 퇴원할래. 난 이제 정말 행복하오. 정말….” 집에 돌아온 지 두 시간이 채 못 되어 그는 세상을 떠났답니다. “날 위해 돌아가신 주 날 받으옵소서.”라고 계속 중얼거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