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위로하라!

 

 

 

무리를 모으고 말로 위로하여 가로되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하고 앗수르 왕과 그 좇는 온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우리와 함께하는 자가 저와 함께 하는 자보다 크니 저와 함께하는 자는 육신의 팔이요 우리와 함께하는 자는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 하매 백성이 유다 왕 히스기야의 말로 인하여 안심하니라”(역대하 326-8).

 

 

언젠가 욥기 1-2장을 읽으면서 많은 위로를 받았습니다. 제일 먼저 생각하게 만들었던 구절은 욥기 1장 5절 이였습니다. 욥은 자기 자녀들이 혹시나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봐 자녀들의 숫자대로 아침에 일어나서 번제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말씀은 참으로 놀랍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부모가 자녀의 마음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특히 자녀가 마음으로 하나님께 죄를 범하고 있는지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저는 욥처럼 혹시나 자녀가 마음으로 하나님께 죄를 범하였을까봐 아버지로서 새벽기도회 때마다 자녀를 위하여 회개기도를 드리지도 않았습니다. 두 번째로 주목을 끌었던 것은 모든 고난의 소식을 들은 후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는 1장 20절 말씀 이였습니다. 어떻게 모든 것을 잃고 자식들까지 다 죽었는데 욥은 하나님께 엎드려 경배할 수가 있었을까요? 더 나아가서, 저는 욥기 1장 22절과 2장 10절을 보면 “이 모든 일에 욥이 입술로 범죄치 아니하니라”고 말씀하고 있는 점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충분히 인간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원망할 수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욥은 입술로 죄를 범치 아니했습니다. 이렇게 극심한 고난 중에 있는 욥에게 우리는 어떻게 위로를 할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볼 때에 그의 친구들이 “칠일 칠야를 그(욥)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는 고로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다는 2장 13절 말씀이 마지막으로 마음에 다가왔습니다. 1주일 동안이나 함께 있으면서도 한 말도 안했다는 사실, 이 얼마나 극심한 고난에 욥이 처해있음을 보았기에 그의 친구들은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함께 있었을까 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언젠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면서 “refuse to be comforted”(위로 받기를 거절하다)라는 문구를 사용한 기억이 났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마음이 아프고 극심한 고통 중에 있을 때에 위로 받기를 거절합니다. 우리에게는 아무에게도 위로 받을 수 없는 마음, 아무 말도 위로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역대하 32장 6-8절 말씀 중 6절 하반절애 히스기야 왕은 ‘무리를 모으고 말로 위로하였다’는 말씀이 눈에 들어와 “말로 위로하라!”라는 제목을 걸고 2 가지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언제 우리는 말로 위로해야 하는 것인가요?

 

히스기야 왕이 백성들을 말로 위로한 때는 바로 “이 모든 충성된 일 후에”였습니다(대하32:1). 다시 말하면, 역대하 30-31장에 진술된 히스기야 왕의 종교개혁이 견고히 이루어진 후에 임한 위기 또는 시련인 앗수르 왕 산혜립이 유다에 쳐들어왔을 때 히스기야 왕은 백성들을 말로 위로했던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이 때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님의 충성된 종 히스기야 왕은 종교개혁을 견고히 이루었는데 왜 하필이면 이 종교개혁 완성 후에 이러한 어려운 시련이 닥치는 것입니까? 어느 면으로 보면 진정으로 종교개혁이 견고히 이루어졌는지 하나님께서 이방인 나라를 들어 일으켜 시험하시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위로의 말이 절실히 필요할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때가 다양하겠지만 오늘 본문에 비추어 생각해 볼 때 무엇인가 견고히 이루어져가고 있을 때 닥치는 위기나 시련 가운데 우리는 위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당면하는 위기나 시련은 무엇인가 견고히 이루어져 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 둘째로, 어떻게 우리는 말로 위로를 해야 하는 것인가요?

 

히스기야 왕은 백성들을 모아놓고 말로 위로하여 가로되 ‘너희는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히 하라… 두려워말며 놀라지 말라’고 말했습니다(7절). 어떻게 히스기야 왕은 큰 위기 가운데서 이렇게 말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할 수 있었을까요? 저는 히스기야 왕 자신이 큰 위기 가운데서 자기와 함께하시는 크신 하나님으로부터 큰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서 히스기야 왕은 큰 위로 혹은 큰 문제를 바라보면서 낙심하며 걱정, 불안에 하는 불신앙의 모습을 보여주기보다 참 신앙인 큰 위기 혹은 큰 문제 가운데서 크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을 그의 백성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참 신앙인인 히스기야 왕에게는 확고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우리와 함께 하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싸우시리라’는 확신 이였습니다. 어떻게 히스기야 왕은 이러한 신앙과 확신 있었는가 생각해 볼 때에 저는 역대하 32장 1절에 나와 있는 “충성”(진실)이란 단어가 생각이 났습니다. 다시 말하면,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께 충성한 자, 즉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자였기에 참 신앙과 확신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충성(진실)은 초점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인간의 진실은 우리 주님의 진실과 비교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의 진실하심에 그 해답을 찾아야 합니다. 결국 히스기야 왕의 참 신앙과 확신의 근거는 주님의 진실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신실하게 이루어 나아가심에 있어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 우리를 반드시 도와주시겠다는 말씀, 우리를 대신하여 영적 싸움을 하시겠다는 말씀, 이 말씀이 우리 마음을 강하게 하며 담대하게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