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심치 말라!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데살로니가후서 313).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어(엡2:8) 하나님의 걸작품이 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습니다(10절). 그러므로 우리는 선을 행해야 합니다(시34:14; 롬13:3, 벧전 3:11). 선을 행하되 우리는 악에서 떠나 하나님을 의뢰하여 선을 행해야 합니다(시37:3, 27).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했습니다(요삼1:11). 그런데 우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왜 우리는 낙심하는 것입니까? 4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우리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는 이유는 선행을 받는 상대방이 우리에게 고마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한답시고 섬기고 베풀며 선을 행함에도 불구하고 그 누군가가 우리에게 아무 감사하는 마음도 표현을 하지 않으면 우리는 섭섭해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섭섭해 함의 원인은 우리가 선을 행함에 있어서 상대방에게 기대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조건적인 선행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상대방의 반응에 민감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상대방이 기대한 만큼 반응을 하지 않을 때 섭섭해 하고 또한 낙심하기도 합니다.

 

둘째로, 우리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는 이유는 선행을 받는 상대방이 고마워하기는커녕 우리에 대해서 비판하고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상대방이 우리에게 직접 비판의 목소리를 내면서 정죄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누군가에게 했을 때 그 비판의 목소리와 정죄한 말이 다른 사람을 통하여 우리 귀에 들릴 때 우리는 충분히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왜 내가 이런 소리를 들어가면서 선을 행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충분히 들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선을 악으로 갚는 그 사람에게는 선을 계속 베풀기란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셋째로, 우리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는 이유는 선행을 받는 상대방에게 변화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선을 열심히 행함에도 불구하고 선행을 받는 그 상대방의 삶에 변화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충분히 낙심할 수가 있습니다. 마치 농부가 씨앗을 심고 거름과 물을 주면서 열매를 맺기를 기다리는데 아무 열매가 없을 때에 우리는 낙망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영적 농부로 선한 씨앗을 심어서 기도의 눈물과 말씀의 거름을 부지런히 주려고 애씀에도 불구하고 선한 열매를 맺기는커녕 죄악 된 열매를 맺을 때 우리는 충분히 낙심할 수 있습니다.

 

넷째로, 우리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는 이유는 나 자신때문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은 “나 자신”이 선을 행하다가 제일 낙심케 하는 이유라 생각합니다. 상대방이 고마워하던 말든, 상대방이 나에 대하여 비판을 하던 정죄를 하던 그리고 그 상대방의 삶에 열매가 맺히지 않아 보이던 죄악의 열매를 맺는 것 같이 보이던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면서(시34:8) 무조건적으로 선을 행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계속, 그리고 충분히 맛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로 낙심하는 것입니다. 특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나아가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체엄하지 못할 때 우리는 누군가에게 선을 행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보고 낙심할 뿐만 아니라 절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기 때문입니다(고전15:58). 오늘도 내일도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선을 행하기에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