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받기를 거부하는 애통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창세기 3734-35).

 

 

저희 교회에는 여섯 자녀들 중 세 자녀들을 먼저 이 세상에서 떠나보내신 팔십 넘으신 할머님 한 분이 계십니다. 남편을 일찍이 떠나보내신 이 할머님은 여섯 자녀들 중 세 자녀들도 다 적지 않은 나이에 이 세상을 떠나보내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떠나보낸 아드님은 56세 나이로 몇 년 전에 주무시다가 숨을 거두셨습니다. 아직도 저는 그 때 그 순간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 할머님께서 통곡하시면서 저에게 “목사님, 목사님”라고 눈물을 흘리시면서 말씀하시던 그 모습이 생각납니다. 또한 저에게 ‘목사님, 하나님이 원망스러워요’라고 우시면서 말씀하시던 모습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시고 통곡하시는 어머님의 눈물을 보면서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생각해 보아도 저는 상상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먼저 보내는 부모의 마음은 어느 누구도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각자의 아픔과 고통이 다르리라 생각합니다. 문제는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어느 누구도 위로해 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랑하는 가족 식구들이, 친척들이, 친구들이, 교회 식구들이 등등 위로하려고 노력들은 하겠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은 너무나 고통스러워 어느 누구의 위로도 받고 싶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37장 34-35절에 나오는 야곱이 그랬습니다. 그는 그가 노년에 얻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창37:3)이 죽은 줄 알고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고 있었을 때 요셉 외에 다른 자녀들이 위로하려고 했었지만 야곱은 그들의 위로를 받지 아니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의 죽음 소식으로 인하여 애통하고 있었을 때 다른 자녀들의 위로 받기를 거부했습니다[“he refused to be comforted”(NASB)].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야곱은 자녀들의 위로를 거부했겠습니까. 이러한 극심한 고통은 오직 성령 하나님만이 위로해 주실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위로할 수 없는 하나님만이 위로할 수 있는 애통이 있습니다. 그 애통은 바로 사랑하는 자녀의 죽음입니다. 다시는 이 세상에서 볼 수 없는 이 땅에서의 이별의 고통이야 말로 오직 하나님만이 위로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친히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고 슬픔과 애통 가운데 있는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을 위로해 주시길 간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긍휼이 여겨주시사 우리의 기도를 들어 응답해 주시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더 사랑하는 그 형제, 자매들을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힘주시고 붙잡아 주시므로 그 큰 슬픔과 고통을 견뎌 이겨 나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게 만드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형제, 자매들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주위엔 위로가 필요한 분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 주위엔 고통과 아픔, 슬픔과 괴로움 가운데 있는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로의 도구로 사용하시길 원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로 받기보다 위로하는데 하나님의 위로의 도구로 쓰임받기를 기원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우리가 위로할 수 없는 애통을 가진 형제, 자매들이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잠잠히 그리고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성령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위로해 주시사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오히려 조문객들을 위로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