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자가 없도다

 

 

 

[전도서 41-3]

 

 

언제가 새해를 시작하면서 첫 주일에 마지막으로 교회 지도자들과 기도 모임을 갖은 후 두 가지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가지 일은 저희 교회 집사님이 한 분이 수면제 약인지 많이 드시고 자살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그 날 주일 오후 제 아내와 교회 장로님과 전도사님 및 한 자매가 그 집사님을 집으로 찾아가 도와드렸습니다. 그 다음 날인가 제 아내가 그 집사님을 아파트에 가서 찾아뵈려고 했을 때 그 집사님은 앰뷸런스에 실려 집 근처 병원으로 가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 집사님은 머리 수술을 하시고 양로원으로 퇴원을 해서 젊으신 나에게 양로원에서 지내고 계십니다. 또 다른 일은 제가 한국에 있었을 때 섬기던 교회에서 대학생이 선교지에 나아갔다가 익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함께 영어사역에서 그 형제의 어머님과 봉사하면서 그 형제가 중학교 때 영어 예배 때 본 기억이 나는데 이렇게 선교지에 나아갔다가 익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놀람 속에서 어떻게 그 형제의 부모님을 위로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가운데 기원하는 마음으로 그 형제의 어머님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저는 아빠 아버지 하나님께서 친히 그 형제의 부모님과 누나, 그리고 친구들 및 교회 식구들을 위로해 주시길 간구했습니다.

 

참으로 이 세상은 근심된 일이, 곤곤한 일이, 죄악 된 일이, 죽을 일이 쌓인 세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이런 저런 아픔과 고난 중에 있는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아픔과 고난 중에 있는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개인적으로 “위로”란 단어를 생각하면 욥기 16장 2절에 나오는 욥의 친구들과 사도행전 4장 16절에 나오는 바나바가 생각이 납니다. 욥기 16장 2절 말씀은 욥은 자기를 위로하려고 온 친구들을 가리켜 “번뇌게 하는 안위자”(sorry comforters)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 4장 16절에 나오는 바나바를 가리켜 사도행전 저자 누가는 “권위자”(Son of Encouragement)라고 말했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고통 중에 있는 욥을 위로하기보다 오히려 번뇌케 하는 번뇌케 하는 위로자였지만 초대 교회에 나오는 바나바 선생은 참된 위로자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제 자신을 놓고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곤 합니다: “사랑에 불타는 위로자와 전도자가 되게 하옵소서.” 그런데 저는 이렇게 주위에 힘들고 고통 중에 있는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기에 위로를 드리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가 참 많습니다.

 

로버트 스트랜드 목사님이 쓰신 “위로의 영성”이란 책을 보면 상처 입는 영혼을 위로하는 101가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책 머리말을 헨리 나우웬 신부님이 쓰셨는데 거기서 그는 “위로”라는 말은 외로운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을 뜻한다고 말했습니다. 또한 그는 위로한다는 것은 고통을 가져가 버리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함께 있어 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함께 있어 주는 것을 가리켜 나우웬은 “돌봄”(care of soul)라고 말했습니다. 같이 울어 주는 것, 같이 고생하는 것, 같이 느껴 주는 것, 돌봄은 측은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헨리 나우웬 신부님은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흔히 우리 슬픔은 우리들을 춤추게 합니다. 또 우리 춤은 우리 슬픔을 위한 공간을 창조해 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친구를 잃고 흘리는 눈물 속에서 우리는 알지 못하는 기쁨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성공을 축하하는 파티 한가운데서도 우리는 깊은 슬픔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마치 우리를 울리기도 하고 웃기기도 하는 어릿광대의 얼굴이 슬퍼 보이기도 하고 기뻐 보이기도 하는 것처럼 슬픔과 춤, 비통함과 웃음, 애통함과 기쁨은 모든 한 곳에 속해 있는 것들입니다. 인생의 아름다움은 이렇듯 슬퍼하는 것과 춤추는 것이 서로 맞닿는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슬퍼하는 것과 춤추는 것이 서로 맞닿는 곳에서 인생의 아름다움을 보시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전도자 솔로몬 왕도 자기가 본 것을 전도서 4장 1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오호라 학대 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솔로몬 왕이 이 세상에서 목격한 것은 바로 권세 잡은 자들이 사람들을 학대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즉, 그는 학대 받는 사람들을 본 것입니다. 그리고 솔로몬 왕은 학대 받는 사람들의 흘리는 눈물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바로 이 학대 받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솔로몬 왕은 학대 받는 사람들에게 위로자가 없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모습을 보면서 솔로몬 왕은 오늘 본문 전도서 4장 2-3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살아 있는 산 자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를 복되다 하였으며 이 둘보다도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서 행하는 악을 보지 못한 자가 더욱 낫다 하였노라.” 무슨 뜻입니까? 이 말씀은 결코 학대 받으면서 살바에 아예 죽는게 낮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결코 솔로몬 왕은 학대 받는 것보다 자살하는 게 더 낮다고 자살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자살을 권하는 세상인 것 같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요즘 인터넷을 보면 자살 웹사이트가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는 이러한 자살 웹사이트를 통해서 모르는 사람들도 같이 만나 함께 자살하는 경우도 한국 인터넷 뉴스를 통해서 과거에도 접했습니다. 제가 주위에 아는 사람들을 통해서 들은 것만 해도 스스로 목숨을 끊은 자살한 사람들이 몇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 세상이 지금 경제적으로 더욱더 힘들어지면서 삶에 고통 속에서 많은 이들이 자살 충동 속에서 자기의 귀한 생명을 스스로 앚아가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공하여 자살하는 경우도 점점 더 늘어가고 있는 듯 해 보입니다. 어쩌면 이러한 자들에게 있어서 오늘 본문 전도서 4장 2절은 자살의 관점에서 해석하여 ‘아 지혜자 솔로몬 왕도 학대 받으면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낮다고 하는가 보다’라고 잘못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사는지 죽지’라고 말하면서 스스로 목숨을 앗아가서는 아니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솔로몬 왕은 결코 자살을 권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솔로몬 왕은 오늘 본문에서 이 세상에서 행해지는 권세 잡은 자들의 학대로 인하여 학대 받는 사람들의 눈물을 보면서 그렇게 학대 받는 사람들의 삶이 죽음보다 못하다는 사실이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솔로몬 왕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 자체를 죽음보다 못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불의한 압제를 받는 고통스러운 생활이 죽음만 못하다는 것뿐입니다(박윤선). 과연 죽음만 못한 고통스러운 생활 하면 어떤 생활일까요? 저는 이 질문을 생각해 볼 때 탈북자들 생각이 났습니다. Wall Street Journal이 2006년 5월 1일 북한인권법에 따라 처음으로 미국으로 입국한 탈북 여성들의 증언을 통해 중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탈북자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소개한 인터넷 기사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기사를 보면 가명인 한나라는 여인(36세)에 대해 소개를 하고 있는데 그 여인은 평양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어려운 살림에 도움을 주기 위해 옷감 장사로 나섰는데 옷감을 얻기 위해 국경마을에 갔다 저녁 식사 도중 의식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이미 인신매매를 당해 중국 땅에 있었다고 합니다. 거기서 중국 사람에게 팔여 중국인 남편으로부터 “너 같은 북한사람을 죽이는 것은 닭을 죽이는 것보다 쉽다”는 폭언과 함께 뼈가 부러질 정도로 구타를 당하면서 한때 자살까지 생각했었다면서 당시에는 “마치 지옥에서 사는 것 같았다”고 증언했다고 합니다(인터넷). 이런 탈북자들의 증언이 한두 개이겠습니까? 저는 잘 모르지만 언젠가 어느 목사님이 저에게 한 말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탈북자를 접하다 보니까 출애굽기가 읽혀지더라.’

 

이러한 자들에게 있어 오늘 본문 전도서 4장 3절에의 말씀이 얼마나 더 피부로 느끼며 공감하겠습니까? 죽은 자나 산자보다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서 행하는 악을 보지 못한 자가 더욱 낮다.” 아예 태어나지도 않았으면 탈북자들은 이 세상에서 행해지는 악을 보지도 않고 또한 죽는 것을 원할 만큼 이 세상에서 고통을 받지 않아도 되고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지난 온 삶을 뒤돌아 볼 때 참 죽지 못해 사신 적이 있으십니까?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숨 쉬고 산다는 자체가 죽음만 못한 적이 있으셨습니까? 그래서 한없이 눈물 속에서 거하셨던 적이 있으십니까? 그런데 이렇게 죽는 것을 원할 만큼 이 세상에서 고통을 받을 때에 고통 자체보다 더 힘든 것은 오늘 본문 1절에서 솔로몬 왕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위로자가 없다’는 사실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제일 힘들고, 제일 괴롭고, 마음이 너무 아플 때 우리 마음을 더욱더 괴롭게 하는 것은 주위에 진정으로 나의 힘듦과 괴로움과 아픔을 이해해주고 공감해 주며 위로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참으로 더욱더 괴로운 사실은 주위에 나를 사랑해주고 나를 위로해 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무도 진정으로 나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악인의 악행은 끝이 없어 보일 때, 학대와 압제의 행위가 끝날 기미기 보이지 않을 때 우리로 더 이상 꿈을 꾸지 않게 됩니다. 더 이상 우리는 희망을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소망이라는 마지막 끊을 놓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절망케 합니다. 소망이 없는 삶은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절망 속에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성경에서 한 3가지로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절망 속에 있을 때 우리 자신의 영혼에게 말해야 합니다.

 

제가 아직도 잊지 못하는 책 중에 하나는 바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쓰신 “영적 침체”(Spiritual Depression)란 책입니다. 제가 그 책을 읽으면서 도전 받은 것은 우리가 낙망하고 절망할 때 시편 기자처럼 자기 영혼에게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합니까? 그 한 예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시편 42편 5, 11절과 43편 5절 말씀을 들고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그래서 저는 가끔 낙심이 될 때에 이 시편 말씀을 기억하고 제 자신에 선포하며 나아가곤 합니다: ‘제임스야, 너는 왜 낙망하며 왜 불안해 하는냐. 제임스야,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러면서 저는 나의 도움이 되시는 주님을 의도적으로 바라보고 기도하고자 애씁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저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도 한번 해보시길 바랍니다. 마음이 낙망하며 절망 될 때 여러분 자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나아가 보세요. 꼭 시편 말씀이 아니래도 예를 들어 교회를 섬기다가 힘들 때 마태복음 16장 18절 말씀인 “… 내가 … 내 교회를 세우리니’라는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선포하며 나아가 보세요. 분명히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절망 속에서 예수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우리는 절망 속에 있을 때 예수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고통으로 인하여 절망 속에 있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왜 우리는 고통을 당할 때 절망 속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그 이유는 우리가 그 분의 고통을 잠잠히 바라보며 묵상하므로 말미암아 우리의 고통이 예수님의 고통과 연결될 때에야 참된 위로와 치유가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낙망될 때 요나서 2장 4절이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 찌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제가 이 요나서 말씀을 생각하는 이유는 비록 주님의 종 요나처럼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징계의 폭풍을 맞아 바다 깊은 속에 있었던 요나처럼 절망 가운데 있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습니다’라고 결심하고 주님을 간절히 사모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낙망하며 절망될 때 이 요나서 말씀을 의지하여 다시 주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오히려 낙망과 절망을 주님을 갈망하는 기회로 삼으실 수 있길 바랍니다.

 

셋째로, 우리는 절망 속에서 예수님을 소망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저는 절망이란 예수님을 소망케 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이런 저런 일들로 절망하게 될 때 그 절망이란 주님을 갈망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일 뿐만 아니라 결국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주님만 바라보며 소망케 할 수 있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좀 철저히 이 세상에 실망하며 절망까지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도 좀 철저히 실망하며 절망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이러한 절망감이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을 좀처럼 갈망하며 소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찬송가 539장 “이 몸의 소망 무엔가”의 3절 가사를 좋아합니다: “세상에 믿던 모든 것 끊어질 그 날 되어도 구주의 언약 믿사와 내 소망 더욱 크리라.” 제가 이 가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세상에 우리가 믿던 모든 것 다 끊어질 때에 그 때야 비로소 우리는 더욱더 주님을 믿고 의지하므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절망이 사라지고 오히려 주님 안에서 소망으로 더욱더 가득 채워지는 역사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이렇게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1절)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쉰 마음뿐일세, (5절) “나의 진정 사모하는 예수여 음성조차도 반갑고 나의 생명과 나의 참 소망은 오직 주 예수뿐일세”[찬송가82장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1절과 5절].

 

소망되신 주님께서 여러분을 위로해 주시길 기원합니다. 어느 누구도 여러분을 위로할 수 없을 때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을 위로해 주시길 기원합니다. 고통이 너무 커서 어느 누구의 위로도 여러분이 거절할 때에라도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주님을 향한 갈망하는 마음과 주님을 소망하는 마음으로 가득 채워 주시길 기원합니다. 슬퍼하는 것과 기뻐하는 것이 서로 맞닿는 그 곳에서 인생의 아름다움, 즉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을 보실 수 있길 기원합니다. 이 말씀 묵상을 마치면서 하나님께서 저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아름다움을 보게 하신 한 권사님을 생각하면서 쓴 글을 여러분과 나눕니다:

 

 

“권사님은 아름다우십니다

마음의 눈물 속에서도 얼굴에 미소를 띠시는 권사님,

권사님은 아름다우십니다.

사랑하는 아드님의 잠듦 속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시는 권사님

권사님은 아름다우십니다.

자기 가정보다 사랑하는 교회 식구들을 더 생각하시는 권사님,

권사님은 아름다우십니다.

위로 받기보다 위로하시는 권사님, 권사님은 아름다우십니다.

받기보다 주기를 좋아하시는 권사님, 권사님은 아름다우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품고 영혼 구원에 힘을 쓰시는 권사님,

권사님은 아름다우십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권사님, 권사님은 아름다우십니다.

 

I see Christ in you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