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울증에 걸린 엘리야 선지자?

 

 

 

그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러 자기의 사환을 그 곳에 머물게 하고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열왕기상 193-4).

 

 

전에 저희 교회 다니시던 분 중에 조울증으로 고생하시던 분이 있으셨습니다. 그분은 기분이 좋으실 때는 사시는 아파트 이웃들에게 1년 넘도록 매우 잘해주셔서 그 이웃 세 분들을 교회로 데리고 오셨다가 우울증 상태일 때에는 기분이 매우 안 좋으셔서 그 이웃 분들을 미워하시면서 그들과 크게 싸우시고 하셔서 결국 교회로 데리고 오신 그 세 분들도 교회를 떠나셨습니다. 그러시던 중 수년 전 1월 첫째 주일 예배 후에 그 분이 자살 시도를 하신 것인지 해서 교회 장로님과 제 아내가 급히 그 분이 사시는 아파트로 간적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 분은 머리를 크게 다치셔서 병원에 실려 가시고 결국 수술 후 양로원으로 들어가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그 과정 속에서 저는 그분의 아파트에 있었던 수첩들을 넘겨받아 거기에 있는 한국 전화번호들까지 연락을 시도했지만 그 분의 식구나 친척을 한명도 연락이 안됐습니다(그 전화번호들은 다 오래되어서 끊겨진 전화번호였음). 저는 아직도 그 분이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께 기도한 순간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요즘 저는 전보다 더 많이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작년부터 개인적으로 우울증에 관한 책들도 사서 읽고 인터넷 기사들도 정신질환에 대한 글들을 읽으면서 점점 더 이 정신질환의 심각성을 부족하나마 조금씩 피부 적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 정신질환은 큰 위험성도 조금이나마 엿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주위 사람들에게서 조울증이 우울증보다 훨씬 더 무섭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울증으로 고생하는 사람과 조울증으로 고생하시는 분을 보았기에 그 말의 동의를 합니다. 인터넷을 보니까 “조울증”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를 내린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조울증은 기분, 기운, 생각, 행동이 극단적으로 변하는 질환입니다. 대개 조증 상태와 우울증 상태의 두 가지 "기분 상태"가 존재합니다. 조울증 상태일 때에는 기운이 넘치고 매우 활동적이 됩니다. 반면 우울증 상태일 때에는 매우 슬프고, 절망적이며, 만사가 귀찮습니다”(인터넷). “기분, 기운, 생각, 행동이 극단적으로 변화는” 모습을 저희 교회 나오시던 분을 통해서 엿본 저로서는 그 극단적인 변화 때마다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서 헤매던 모습도 생각납니다.

 

저는 오늘 새벽기도회 때 열왕기상 18장과 19장을 읽으면서 그 두 장에 등장하는 엘리야 선지자의 모습을 생각할 때 어떻게 적응하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그 이유는 열왕기상 18장에 나오는 엘리야 선지자의 모습은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18:1)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2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아합에게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18절)고 말한 반면에 열왕기상 19장에 나오는 엘리야 선지자는 아합 왕의 부인인 왕후 이세벨이 사신을 엘리야에게 보내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반드시 네 생명을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면 신들이 내게 벌 위에 벌을 내림이 마땅하니라”(19:2)고 말하니까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자기 생명을 위해 도망”하였습니다(3절). 아니 어떻게 이렇게 엘리야 선지자의 모습이 저리도 극과 극일까요? 꼭 조울증 걸린 사람 같지 않나요? 어떻게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대결할 때(18:20, 22) 믿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하여(36-37절)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는(38절) 것을 목격한 후 바알 선지자들을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기손 시내로 끌고 가서 모조리 죽도록 한(40절) 엘리야 선지자가 왕후 이세벨이 “내가 내일 이맘때까지 반드시 너를 죽여 네가 죽인 내 예언자들처럼 되게 하겠다”(19:2, 현대인의 성경)고 말하니까 두려워서 일어나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갈 수가 있나요(3절)? 혹시 이세벨 왕후가 전에도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인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을까요?(18:4, 13) 좀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엘리야 선지자가 두려워서 도망간 이유는 이세벨 왕후가 하나님의 선지자-킬러(killer)였기 때문이었을까요?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그녀가 죽였기에 그녀가 죽일 때에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하는 오바댜(3절)는 “선지자 백 명을 가지고 오십 명씩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먹였”던 것일까요?(4, 13절) 분명히 그녀는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한 두 명만 죽인 것은 아니었을 텐데 말입니다. 오바댜가 100명이나 굴에 숨기고 떡과 물을 공급해 준 것과 엘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다(19:10, 14, 참고: 18:22)고 말한 것을 보면 이세벨 왕후가 죽인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많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그녀가 자기의 450명 바알의 선지자들이 갈멜산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자기 남편인 아합 왕에게 전해 듣고(1절) 그 죽임당한 바알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선지자인 엘리야를 죽여 버리겠다고 말했으니 엘리야 선지자의 입장에선 충분히 두려워서 자기의 생명을 위해 도망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3절). 그런데 엘리야 선지자는 도망가는데서 끝나지 않고 하루 종일 혼자 광야로 들어가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4절). 아니, 어떻게 갈멜산에서 모인 모든 백성에게 “당신들은 언제까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을 작정이오? 만일 여호와가 하나님이면 여호와를 섬기고, 만일 바알이 하나님이면 바알을 섬기시오”(18:21, 현대인의 성경)라고 말했던 엘리야 선지자가 그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죽기를 작정하고 하나님께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19:4)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엘리야의 모습이 이렇게 극과 극이었을까요? 엘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 죽기를 구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자기의 조상들보다 나은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습니다(4절하, 현대인의 성경). 왜 그는 자기 조상들과 비교를 했을까요? 왜 그는 그들과 비교하면서 자기는 그들보다 나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 것일까요? 자기를 죽이겠다고 말한 왕후 이세벨이 두려워서 도망가는 자신의 모습이 그리도 한심하고 너무나 부족하고 연약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서 그랬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담대하게 믿음으로 아합에게 보이려고 했을 때 오바댜가 죽임을 당할 수 있었던 것(18:12)조차도 신경을 쓰지 않았던(?) 엘리야 선지가가 왜 자기 조상들은 신경을 쓴 것일까요?(19:4) 그 정도로 그는 여러모로 연약해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엘리야 선지자는 육체적으로 많이 연약해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하면 그는 로뎀나무 아래에 누워 잠이 들었습니다(5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일어나 먹으라’고 했을 때(5절) 엘리야 선지자는 일어나 자기 머리맡에 있는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먹고 마신 후 다시 누운 것(6절)과 그렇게 다시 누운 엘리야 선지자를 하나님의 천사가 또 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7절)고 말한 것을 보면 그는 육체적으로 매우 피곤하고 허기진 상태에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탈진 상태에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엘리야 선지자는 아합 왕에게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17:1)고 말한 후 그를 피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처음엔 그릿 시냇가로 가서 숨고(2-3절) 그 시내가 말랐을 때에는(7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르밧으로 가서 한 과부를 만나 하나님의 기적적인 역사로 그 식구들과 함께 여러 날 동안 음식을 먹었습니다(15절). 한 마디로, 엘리야 선지자가 육체적으로 탈진 상태에 있었을 정도로 육체적으로 연약한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는 적어도 3년 동안(18:1) 자기를 찾는 악한 아합 왕으로부터 피신하며 도망 다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다시 이세벨 왕후가 자기를 죽인다고 하니까 두려워서 도망하는 엘리야 선지자는 충분히 육체적으로 탈진하다시피 지쳐있을 수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는 열왕기상 19장 1-7절을 읽으면서 어쩌면 엘리야 선지자는 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생각되었습니다. 물론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책 제목처럼 저는 엘리야 선지자가 “영적 침체”(spiritual depression)를 겪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인터넷 설교문을 보니까 영적 침체에 대해 이러한 글이 적혀 있어 나눕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여정에서 영적 침체는 언제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단 발생하면 치료하기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영적 침체의

원인도 다양합니다. 때로는 장기적인 육체의 질병이 영적 침체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우울한 기질이 원인이 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장애와 죄들이 영적

침체를 일으키는 직접적인 요인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영적 침체는

거창한 죄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사소한 죄들이 서서히

하나님과의 관계를 멀어지게 합니다.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되면 예배에

대한 열정을 상실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줄거나 사라집니다. 그리고

영적 침체가 깊어지면 다른 영혼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자기 문제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의 영혼은 불안하며 고통 속에 빠지게 됩니다.

신앙생활의 기쁨을 상실하고, 영적 상태가 메마르게 됩니다”(인터넷).

 

실제로 엘리야 선지자는 영적 침체에 빠진 사람처럼 다른 영혼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오히려 자기 문제에 집중하지 않았나요? 열왕기상 19장 10절을 보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여, 나는 주를 위해 열심히 일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와 맺은 계약을 어기고 주의 제단을 헐며 주의 예언자들을 모두 죽이고 살아남은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는데 그들은 나마저 죽이려고 합니다”(현대인의 성경, 참고: 14절). 또한 실제로 엘리야 선지자는 영적 침체에 빠진 사람처럼 그의 영혼이 불안하며 고통 속에 빠져 신앙생활과 주님의 일을 함에 있어서 기쁨을 상실하고 그의 영적 상태가 메마르게 되지 않았나요?

저는 이렇게 영적 침체와 마치 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열왕기상 18장과 19장의 극과 극인 엘리야 선지자의 모습을 보면서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까지 바랐던 엘리야 선지자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다시 일으켜 주셨는지에 더 궁금해졌습니다. 더 궁금해진 이유 중 하나는 약 10년 전에 정신질환으로 고생하시다가 결국에 가서는 암이 퍼져서 소천하신 사랑하는 고 김 목사님이 저희 교회에서 설교하셨을 때 그 설교 제목이 “다시 일어선 엘리야”였기 때문입니다. 잊혀지지 않는 설교 제목입니다. 아니 어쩌면 잊을 수 없는 설교 제목이라 말해야 더 적합할 것입니다. 오늘 새벽기도회 때에도 기도하면서 그 목사님을 생각할 때에 정신질환으로 고통당하고 계셨을 때 얼마나 힘드셨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장례식을 치룬지 얼마 되지 않아 꿈속에서 환한 미소로 저를 품어주셨을 때 엉엉 울었던 그 꿈을 다시 생각하니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 위로 가운데 저는 지금 우울증과 조울증과 공항장애로 고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지금 어누 누구보다 그들이 제일 힘들고 제일 어려울 텐데, 어느 누구도 그들이 격고 있는 고통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을 텐데 … 라는 생각 속에서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제일 잘 아시고 그들을 제일 사랑하시는 주님께 그들을 위하여 마음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의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루만져주시고 위로해주시사 소망을 주시며 건져주시고 치유해 주시길 간절히 기원하면서 저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영적 침체와 마치 조울증에 걸린 사람처럼 보이는 엘리야 선지자를 다시금 일으켜 주셨는지 3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어 천사로 하여금 엘리야를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는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한 후 누워 자고 있었던 엘리야를 어루만지셨습니다. 그것도 한번이 아닌 두 번이나 말입니다(19:5, 7).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영적 침체나 정신질환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아버지 하나님의 어루만지심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심신이 지쳐 누워 자는 고통당하는 형제, 자매들에게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과 사랑으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품고 기도하면서 어루만져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어루만짐을 통하여 고통당하는 그들은 하나님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랑을 느낄 필요가 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통하여 엘리야로 하여금 먹고 마시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는 누워 자고 있었던 엘리야를 어루만지셨을 뿐만 아니라 그를 깨워 그에게 “일어나서 먹으라”고 두 번이나 말했습니다(5, 7절). 그리고 하나님의 천사는 숯불에 구운 떡과 물 한 병을 엘리야에게 공급해주셨습니다(6절). 이 하나님의 공급하심 속에서 엘리야 선지자는 두 번이나 떡을 먹고 물을 마시므로 힘을 얻었습니다(8절,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엘리야는 힘을 얻어 40일 동안 밤낮 걸어 하나님의 산인 시내산에 도착했습니다(8절,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영적 침체나 정신질환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육체적으로 힘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언제가 우울증으로 고생했던 어느 자매에게 물었더니 우울증이 걸렸을 때 운동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에게 말해준 기억이 납니다. 물론 운동을 하기 위해선 잘 먹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저는 하나님의 천사가 잠을 자고 있었던 엘리야를 어루만져 깨운 후 먹고 마시게 한 이유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영적 침체나 정신질환으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들은 잘 먹고 마시며 운동도 규칙적으로 하여 육체적인 건강을 도모해야 합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먹고 마시고 힘을 얻어 40일 동안 밤낮 걸어 하나님의 산인 시내산에 도착한 엘리야(8절, 현대인의 성경)는 그 곳이 있는 어느 굴에 들어가 그 날 밤을 보내게 되었습니다(9절, 현대인의 성경). 그가 그 굴속에 있었을 때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9, 13절). 그 말씀을 들은 엘리야는 하나님께 이렇게 답변했습니다: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10, 14절).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고 말씀하신 후(11절) 엘리야에게 세미한 소리를 들려주셨습니다(12절). 저는 이것이 광양의 축복이라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광야에 있는 엘리야에게 “부드럽게 속삭이는 소리”(12절, 현대인의 성경)를 들려주신 것은 광야의 축복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호세아 2장 1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바알을 같이 섬기는 혼합주의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으로 징계하심에 있어서 광야로 데리고 가셔서 그들을 “말로 위로”하셨습니다”[(현대인의 성경) “부드러운 말로 잘 타이르고”].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광야로 인도하셔서 부드러운 말로 위로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나만 남았다’고 말하는 엘리야에게(왕상19:10, 14) 하나님께서는 부드럽게 말씀하시되(12절) “내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아직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그 우상에게 입을 맞추지 않은 사람 7,000명을 남겨 두었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18절, 현대인의 성경). 이 얼마나 엘리야에게 큰 위로의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다 죽임을 당하고 자기 혼자 남은 줄 알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 아직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그 우상에게 입을 맞추지 않은 사람 7,000명이나 남겨 두셨다고 말씀하시니 이 얼마나 엘리야에게 큰 힘이 되었을까요.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가 영적 침체나 정신 질환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스스로 광야로 들어갈 필요가 있다고 다시 생각되었습니다. 심신이 치치고 심지어 절망적일 때에라도 우리는 광야로 들어가 하나님 앞에서 홀로 서(무릎을 꿇고)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성경책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확신 가운데 붙잡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붙잡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 말씀에 붙잡힌바 돼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건지심, 치유)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으로 우리의 침체된 영혼을 소성(restore)시키실 것이며 부흥(revive)시키실 것입니다.

 

저는 조울증을 겪고 있는 사람의 감정의 기복이 극에서 극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당사자는 스스로 컨트롤 안 되는 그 감정의 기복으로 인하여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울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감정의 기복뿐만 아니라 신앙의 기복을 겪고 있는 그리스도인들도 무척이나 괴롭고 힘들리라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뜨겁게 하다가도 어느 순간부터는 식어져서 냉랭한 마음으로 일상적인 종교 생활을 하게 되면 주체할 수 없는 자신의 신앙의 기복으로 말미암아 괴로울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의 경우를 보면 열왕기상 18장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하는 모습 속에서 자신의 생명을 조금도 아끼지 않고 담대히 아합 왕에게 나타나 책망까지 하였는데 열왕기상 19장에서는 이세벨 왕후가 죽이겠다고 하니까 두려워서 광야로 도망을 갔습니다. 열왕기상 18장에서는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 450명하고 대결하면서도 승리한 엘리야 선지자가 19장에 와서는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 하나님께 죽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리도 다를 수 있을까요? 마치 그는 영적 조울증을 겪고 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한 엘리야를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어루만져주시고 또한 음식물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광야로 들어온 엘리야에게 부드럽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엘리야의 영혼을 소성시켰으면 부흥케 하였습니다. 동일한 소성과 부흥의 역사가 우리의 삶에 있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