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괴로울 때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민수기 1111, 14-15).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지 않나요? 지금까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버터 보았는데 이젠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심신이 지치고 마음이 괴롭지 않나요?

 

제가 2000년 초반에 한국에 가서 살면서 그 때 처음으로 들어본 말이 바로 ‘버티기’였습니다. 그 때 저는 사역 가운데 만난 몇몇 청년들은 자신들의 힘든 삶 속에서 나름대로 최선을 대해서 자신들의 힘든 상황 속에서도 견뎌내고 있으면서 계속해서 버티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버틴다는 단어를 사용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각자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서 견뎌내고 있었을 텐데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을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저는 그들의 고충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저 제 마음은 그 청년들의 힘든 마음을 어떻게 해서든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해서 주님 안에서 교제를 나눴었습니다. 그리고 그 교제 가운데 저는 여러 청년들이 속마음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모습을 엿보았습니다. 혼자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것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쉽지 않았을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뎌내고 버티며 묵묵히 나름대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신앙생활 하고 일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을 엿볼 때에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들었던 생각은 언제까지 그들이 견뎌낼 수가 있을까 하는 염려였습니다.

오늘 본문 민수기 11장 11, 14-15절을 보면 우리는 홀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책임이 심히 중하여 괴로움 가운데서 즉시 자신을 죽여 더 이상 자신이 고난당함을 보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모세의 모습을 봅니다.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웠기에 모세는 하나님께 자신을 즉시 죽여 달라고까지 기도를 드렸을까요? 얼마나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이 무거운 짐으로 다가왔기에 하나님께 자신을 즉시 죽여 달라고까지 간구했을까요?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맡기신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심히 무거운 짐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11절). 더 이상 모세는 그들을 품을 수가 없었습니다(12절). 더 이상 모세는 그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치 유모가 젖 먹는 아기를 품듯 품고 주님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가나안 땅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12절). 그 이유는 그들이 자기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므로 자신들도 다시 울며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고 원망했기 때문입니다(4절). 그러면서 그들은 과거에 노예 생활을 하던 애굽에 있었을 때에 먹었던 음식들을 그리워했습니다(5절).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만나를 먹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6-9절, 현대인의 성경). 그래서 그들은 각기 자기 장막 문에서 울었습니다(10절). 그 우는 소리를 들은 모세는 괴로워했습니다(10절, 현대인의 성경). 섞여 사는 외국인들의 탐욕에 영향을 받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만나를 거부하고 고기를 먹고 싶다고 불평하는 그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는 소리를 듣고 있었던 모세는 그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에게 홀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무거운 짐으로 다가온 것입니다. 어디서 어떻게 그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먹일 수 있는 고기를 구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모세를 향하여 울면서 고기를 달라고 아우성치는데 말입니다(13절, 현대인의 성경). 더 이상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책임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책임이 심히 중하여 모세는 자기 혼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14절) 더 이상 그는 자신이 고난당함을 보고 싶지 않아 하나님께 차라리 자기를 죽여 달라고 간구한 것입니다(15, 현대인의 성경). 이렇게 죽고 싶을 정도로 마음이 무겁고 괴로워하고 있었던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3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 노인 중에 백성의 장로와 지도자가 될 만 한 자 70명을 모아 하나님께 데리고 와 회막에 이르러 함께 서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11장 16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에 네가 알기로 백성의 장로와 지도자가 될 만 한 자 칠십 명을 모아 내게 데리고 와 회막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하나님께서 그리 말씀하신 이유는 더 이상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짐을 홀로 지지 않고 그 70명과 함께 백성들의 짐을 담당하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17절).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모세 홀로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심히 중한 책임을 지지 않고 그 책임을 함께 질 수 있는 70명의 지도자들을 세우신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간구한 엘리야 선지자가 생각났습니다(왕상19:4).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을 상대하여 승리한 후 이세벨 왕후가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하니까(2절) 엘리야는 두려워하여 자기의 생명을 위하여 도망하여(3절) 스스로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 오직 나만 남았거늘 저희가 내 생명을 찾아 취하려 하나이다”(10, 14절). 엘리야는 이세벨에게 쫓기면서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서는 다른 선지자들은 다 칼로 죽임을 당하고 자기만 남은 줄 알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8절). 비록 엘리야는 다른 선지자들이 다 칼로 죽임을 당하고 자기 혼자만 남았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7,000명을 남겨두신 것입니다. 저 이 두 말씀을 연관해서 묵상하면서 교회 지도자들에게 적용해 보았습니다. 교회 지도자는 주님께서 맡겨주신 주님의 양들을 돌보며 하나님의 말씀을 먹이면서 그들을 섬길 때에 책임이 너무 무겁게 여겨지고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어 괴로움 속에서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낙심 속에서 자기 자신을 더욱더 힘들게 하는 것은 나 혼자라는 생각입니다. 즉, 극심한 외로움입니다. 주위에 사람들이 아무라 많다 한들 아무도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그는 낙심이 심화되어 외로움과 탈진 속에서 절망까지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때 비록 교회 지도자에게는 큰 위기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보기에 그 큰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 기회란 하나님께서는 교회 지도자로 하여금 다시금 하나님을 갈망하는 기회요, 하나님을 소망하는 기회요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불안해하고 낙심한 영혼을 소성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주어진 막중한 책임을 더 이상 홀로 질 수 없음을 아시고 그에게 돕는 자들, 또는 협력자들을 세워주시던지 또는 보내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하여금 교회 지도자를 돕게 하시사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계속해서 섬기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은혜요 교회 지도자에겐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섞여 사는 외국인들의 탐욕에 영향을 받아 불평하면서 구했던 고기를 그들에게 주워 먹게 하시되 냄새도 싫어하기까지 한 달 동안 먹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11장 18-20절을 보십시오: “또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 너희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좋았다 하는 말이 여호와께 들렸으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워 먹게 하실 것이라 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스무 날만 먹을 뿐 아니라 냄새도 싫어하기까지 한 달 동안 먹게 하시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중에 계시는 여호와를 멸시하고 그 앞에서 울며 이르기를 우리가 어찌하여 애굽에서 나왔던가 함이라 하라.”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탐욕가운데 원했던 고기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특히 그들이 하나님 앞에 울며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좋았다”(18절), “우리가 어찌하여 애굽에서 나왔던가”(20절)라고 말하므로 그들 중에 계시는 하나님을 멸시하였는데도(20절) 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고기를 주워 먹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일까요?(18절) 멸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고기 대신 진노하셔서(10절) 벌을 내리셔야 하는 것이 아니었나요?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서 내는 원망의 소리까지 들으시고 응답하신 것일까요?(참고: 출16:7-9, 12) 어쩌면 그 이유가 그들로 하여금 더 이상 모세에게 불평하지 못하게 하므로 모세의 괴로움을 덜어 주시고자 하신 것은 아닐까요? 저는 출애굽기 16장 12절 하반절에서는 그 대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서 내는 원망의 소리까지 들어 응답하신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줄을 알게 하시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교회 성도님들에게 적용해 보았습니다. 만일 교회 성도님들이 이 세상에 비그리스도인들과 섞여 살면서 그들의 탐욕에 영향을 받아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일용할 양식 등을 감사, 만족하지 않고 불만족 속에서 거듭 교회 지도자에게 울면서 불평을 쏟아내면 그 교회 지도자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더 나아가서, 만일 교회 성도님들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가 더 잘 먹고 더 좋았다는 식으로 말을 하면서 하나님께 그리 울부짖는다면 교회 지도자는 어떻게 반응할까요? 만일 그가 모세처럼 괴로워하다가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 교회 성도님들이 저의 자녀들입니까? 제가 그들의 아버지라도 됩니까? 어째서 저에게 유모가 젖 먹는 아기를 품듯 이 백성을 품고 천국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까?’라고 부르짖는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어떻게 반응하실까요? 과연 하나님께서는 울며 불평 속에서 부르짖는 교회 성도님들의 간구를 들어주실까요? 불만족 속에서 불평하면서 울며 부르짖는 간구인데도 불구하구요? 그것도 세상 사람들처럼 탐욕을 품고 하나님께 울면서 부르짖은 것인데 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비춰볼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그러한 기도도 들어주시지 않으실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그들로 하여금 더 이상 교회 지도자에게 불평하지 못하게 하시사 그의 괴로움과 그의 중한 책임을 덜어 주시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교회 지도자로 하여금 계속해서 주님께서 맡겨주신 양들을 섬기게 하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요 교회 지도자에겐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모세에게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민수기 11장 2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하나님께서는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워 먹게 하랴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좋았다”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의 소리도 들으시사 그들에게 고기를 주워 먹게 하시되(18절) 냄새도 싫어하기까지 한 달 동안 먹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20절). 그 약속의 말씀을 받은 모세는 하나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가 육십만 명이온데 주의 말씀이 한 달 동안 고기를 주워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 무슨 말입니까? 모세는 하나님께 인간의 계산적이고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어떻게 광야에서 보행자 60만 명을 한 달 동안이나 고기를 주워 먹게 할 수 있는지 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부족하고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부족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22절, 현대인의 성경). 이러한 불가능한 상황에서 모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현대인의 성경) “내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느냐? 너는 내 말대로 되는지 안 되는지 보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23절).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대로 바람을 보내 바다에서부터 메추라기를 몰아 진영과 그 주변 일대에 내리게 하시자 진영에서 사방으로 하룻길 떨어진 지역까지 메추라기가 지상에서 약 1미터 높이로 날아다니게 하시사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 날 밤과 낮, 그리고 그 다음 날 저녁까지 메추라기를 잡도록 하셨습니다(31-32절, 현대인의 성경). 결국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약속하신 대로 이루시는 신실하심을 모세에게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알게 하셨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교회에 적용해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의 말씀을 주셨는데(마16:18) 담임 목사인 저는 그 약속의 말씀을 주신 전능하시고 진실하신 주님을 믿지 못하고 자꾸만 교회 상황을 바라보고 있는 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 때 그 때마다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 내가 … 내 교회를 세우리니 …”(마16:18)라는 약속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고 그 말씀을 붙잡게 하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는 그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 기도케 하시므로 말미암아 다시금 그 말씀을 저에게 주신 진실하신 주님을 믿고 의지케 하시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성령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기도하는 가운데 기대케 하시고 기다리게 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주님의 방법으로 주님의 때에 세우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저희 교회에게 약속하신 마태복음 16장 18절 말씀을 이루시는 것을 저와 우리 교회 식구들로 하여금 보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저와 우리 교회 식구들에게는 위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 성가 “너는 내 아들이라” 가사가 생각납니다: “힘들고 지쳐 낙망하고 넘어져 일어설 힘 전혀 없을 때에 조용히 다가와 손잡아 주시며 나에게 말씀하시네 나에게 실망하여 내 자신 연약해 고통 속에 눈물 흘릴 때에 못 자국 난 그 손길 눈물 닦아 주시며 나에게 말씀하시네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너는 내 아들이라 나의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힘들고 지쳐 낙망하고 넘어져 일어설 힘조차 전혀 없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고 그 약속하신 말씀을 이루어 주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가 홀로 지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짐을 홀로지게하지 마시고 함께 지고 함께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을 감당할 수 있게 해주시길 기원합니다. 또한 주님께서 우리의 불평스러운 기도조차도 들어주시사 응답해 주시되 그 응답을 통하여 우리의 탐욕의 죄를 들춰내시고 또한 사랑으로 우리를 징계해주시사 주님 한분만으로 만족하며 풍부할 때나 궁핍할 때나 자족의 비결을 가르쳐 주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교회 지도자로서 책임이 막중한 저에게 그리고 저희 교회 온 식구들에게 마태복음 16장 18절 약속의 말씀을 이루어주시사 주님의 손이 결코 짧지 않음을 명백하게 보여주시어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걷게 해 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