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때

 

 

 

우리 하나님이여 그들을 징벌하지 아니하시나이까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 하고”(역대하 2012).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아니,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때가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제가 열두 살 때 영어 알파벳 하나도 모르고 부모님 좇아 미국에 와서 처음 학교에 갔었을 때 그 다음 날에 영어 단어 20개 본다고 하여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그날 밤 울면서 영어 단어 20개를 다 외운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저는 그 다음 날 저는 학교에 가서 시험 보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너는 어제 새로 들어 왔으니 시험을 안 봐도 된다’는 말에 어이가 없어했습니다. ㅎㅎ 제가 사춘기 때에는 미국 문화에 어떻게 적응해야 좋을지 몰라 방황한 기억도 납니다. 또한 저는 대학교 들어가서는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한답시고 해도 점수가 안 나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해맨 기억이 납니다. 제가 신학대학원 들어가서는 너무나 공부가 힘들고 체력이 바닥이 나서인지 결핵성 늑막염이 걸려 수술한 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그냥 6개월 쉰 기억도 납니다. 여태까지 살면서 제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을 때에는 첫째 아기 주영이가 어린이 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해 있었을 때 담당 의사 선생님이 아기를 빨리 죽게 하겠느냐 천천히 죽게 하겠느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저에게 말했을 때였습니다. 그 때 저는 망치로 뒤통수 맞은 기분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그 의사 선생님에게 뭐라고 답해야 좋을지 몰라 참 난감했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제 삶을 뒤돌아 볼 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때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때가 참 많고, 자녀 양육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때도 많으며 특히 하나님의 말씀에 제 자신을 비춰볼 때 제 자신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때가 참 많습니다. 뭐, 이거뿐이겠습니까. 살면 살수록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때가 점점 더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 때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 역대하 20장 12절을 보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유다 왕 여호사밧와 유다 백성들이 나옵니다. 그들이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던 상황은 모압 사람과 암몬 사람이 일부 마온 사람들과 함께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와서 유다를 침략하러 온 상황이었습니다(대하20:1-2, 현대인의 성경). 그 상황을 보고 받은 여호사밧 왕은 두려워하여 하나님께로 낯을 향하여 간구하고 온 유다 백성에게 금식하라고 공포했습니다(3절). 그러자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려고 전국 각처에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습니다(4절, 현대인의 성경).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 새 뜰에 모여들 때 여호사밧 왕은 군중 가운데 서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4-12절). 그 기도 내용 중 한 부분이 바로 오늘 본문 역대하 20장 12절입니다. 저는 그 기도 내용을 3 가지로 간략하게 요약해 보았습니다: (1) ‘하나님, 우리는 우리를 치러 오는 이 엄청난 대군을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습니다’, (2) ‘하나님, 우리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3) ‘하나님, 우리는 오직 주님만 바라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사밧 왕의 기도를 들으시고 스가랴의 아들인 야하시엘을 통하여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에게 응답하셨습니다(14-15절). 저는 그 하나님의 응답 말씀 중심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3가지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교훈을 받아 순종하므로 그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는 상황을 극복하며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

 

첫째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때 우리는 그 두려운 상황이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역대하 20장 15절을 보십시오: “야하시엘이 이르되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과 여호사밧 왕이여 들을지어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너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이 큰 무리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유다 왕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야하시엘을 통하여 응답하신 하나님께서는 온 유다와 예루살렘과 여호사밧 왕에게 유다를 치러 온 그 큰 무리(엄청난 대군)인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과 일부 마온 사람들로 말미암아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유다를 치러 온 그 엄청난 대군과의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15절).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적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생사화복도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목회도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지금 영적 전쟁 중에 있습니다. 나 자신과, 죄악과, 세상과 사단과 죽음과 싸우고 있습니다. 특히 저는 제 자신과의 영적 싸움에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회개를 해야 한다는 것은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마음으로는 회개가 되지 않습니다. 지금 저에게는 애통하고 회개할 마음이 없습니다. 회개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제 자신의 모습을 볼 때에 참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 역대하 20장 15절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메시지는 제 자신과의 영적 싸움도 제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것입니다. 생사화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족하나마 질병과 고통 중에 있는 사랑하는 형제, 자매님들을 생각할 때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생사의 갈림길에 계셨다가 먼저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의 품 안에 앉긴 사랑하는 우리 교회 어르신들을 생각할 때 우리 하나님은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진리를 조금이나마 마음으로 깨달아 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오늘 성경 역대하 20장 15절을 읽다가 “이 전쟁이 …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는 말씀을 묵상할 때 생사화복도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에게 제일 큰 고민 중 하나는 바로 목회입니다. 어떻게 목회 사역을 감당해야 좋을지 모를 때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성경 역대하 20장 15절 말씀을 읽다가 목회도 저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생각이 들었을 때 제 마음에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베드로전서 5장 7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영적 전쟁이든 생사화복이든 목회도 저를 돌보시는 주님께 다 맡기길 원합니다. 그리고 저는 더 이상 염려하며 걱정하며 두려워하지 않길 원합니다. 앞으로도 제 삶에 어떠한 위기가 찾아와도 저는 두려워하지 않길 원합니다. 저희 어머님이 제일 좋아하시는 성경 구절 이사야 41장 10절인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는 말씀을 붙잡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인 줄 믿고 하루하루 살아갈 것입니다.

 

둘째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때 우리는 구원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역대하 20장 17절을 보십시오: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 유다 왕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야하시엘을 통하여 응답하신 하나님께서는 온 유다와 예루살렘과 여호사밧 왕에게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각자 자기 위치를 정하고 서서 나 여호와가 어떻게 너희를 구원하는지 보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17절, 현대인의 성경). 출애굽기 14장 13-14절이 생각납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모세의 믿음대로 구원의 하나님께서는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뒤집어 엎으셔서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살아남은 자가 없게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셨습니다(출14:27-30). 동일하신 구원의 하나님께서는 유다 왕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들에게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대하20:17).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17절). 그리고 주신 약속의 말씀은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였습니다(17절).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고 놀라지 않으면서 우리의 대적 자들을 맞서 나가는 이유는 구원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임마누엘 믿음이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는 어떠한 위기와 역경에 처해있을지라도 우리는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 볼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그 위기와 역경을 극복할 능력이 없고 또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른다 할지라도 우리는 임마누엘 믿음으로 오직 주님만 바라볼 수가 있습니다. 복음성가 “주만 바라볼지라” 후렴이 생각납니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 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써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춰 주시고 너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 곳에 있든지 주를 향하고 주만 바라볼지라.” 우리 하나님은 인자한 귀로서 언제나 우리에게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 소리도 들으시고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이요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고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아니하시며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수1:5). 그리고 이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여 우리를 건지시는 하나님이십니다(렘1:8). 우리는 이 구원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명철을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잠3:5, 대하20:20). 만일 우리가 임마누엘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우리가 접한 두려운 상황을 맞서 나아가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건져주실 것입니다.

 

셋째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를 때 우리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 합니다.

 

역대하 20장 18-19절을 보십시오: “여호사밧이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니 온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들도 여호와 앞에 엎드려 여호와께 경배하고 그핫 자손과 고라 자손에게 속한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니라.” 야하시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15-17절) 유다 왕 여호사밧과 유다 백성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고 레위 사람들은 서서 심히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그 다음 날에도 유다군이 드고야 광야를 향해 출발하려고 할 때에도 여호사밧 왕은 백성들과 의논한 후에 찬양대를 조직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그들을 진군하는 부대 선두에 세워 이렇게 찬양하도록 하였습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사랑은 영원하다!”(20, 21절,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찬양대가 찬송을 부르자 하나님께서 침략군들에게 혼란을 일으켜 자기들끼리 서로 치게 하시므로 다 죽게 하셨습니다(22절, 현대인의 성경). 유다 사람들이 광야가 내려다보이는 곳 이르러 적군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을 때에는 이미 죽은 시체만 땅에 엎드러져 있었고 살아남은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24절, 현대인의 성경). 여호사밧 왕과 유다 사람들은 가서 시체를 샅샅이 뒤져 금품과 의복과 그 밖의 전리품을 거둬들였는데 물건이 가져갈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아서 그것을 거둬들이는 데 3일이나 걸렸습니다(25절, 현대인의 성경). 그리고 그들은 4일째가 되는 날에 브라가 골짜기에 모여서 거기서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26절, 현대인의 성경).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적인 구원의 역사입니까(27절, 현대인의 성경). 결국 여호사밧 왕과 유다 사람들은 비파와 수금과 나팔을 합주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하나님의 전에 나아갔습니다(27-28절). 모든 인접국들은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대적과 싸우셨다는 말을 듣고 하나님을 몹시 두려워하였고 그 결과 여호사밧은 평화로운 가운데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방으로 그를 안전하게 지켜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29-30절, 현대인의 성경).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이런 생각들이 들었습니다: “이 큰 위기도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을 신뢰하므로 하나님의 영원하신 인자하심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양을 시작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역사하시사 우리의 대적들을 물리치실 것입니다”, “두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간구하며 임마누엘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는 그리스도인은 구원의 기쁨과 승리의 기쁨을 맛볼 것입니다.” 어떻게 두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있을까요? 우리의 명철로는 이해가 안 되는 마음과 행동입니다. 우리는 두려운 상황에 지배를 받으면 결코 하나님께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에 두려움이 있으면 하나님께 전심으로 찬양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두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양을 드리기 위해선 우리는 두려운 상황에 지배를 받기보다 하나님에게 지배를 받아야 하며 우리 마음에 두려움이 있기보다 구원의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16장 17절 말씀이 생각납니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어떻게 바울과 실라는 깊은 옥에 가둔바 되고 그들의 발에는 쇠고랑을 든든히 채워져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었을까요? 물론 우리는 우리 능력 밖의 일을 접할 때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하나님께 기도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가 그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두려운 상황에서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으로서 우리의 기도 응답입니다. 결국 우리가 그러한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믿음으로 구원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간구하는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사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구원의 확신이 있을 때에야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 경험적인 생각으로는 이보다 더 정확한 답은 우리가 두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찬양케 하시기 때문입니다. 첫째 아기 주영이의 담당 의사가 저에게 아기를 천천히 죽게 하겠느냐 아니면 빨리 죽게 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저는 천천히 죽게 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저는 그 다음 날 성경책을 읽다가 시편 63편 3절 말씀에서 은혜를 받았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주님의 영원하신 사랑이 주영이의 55일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님을 찬양할 것이다.’ 그래서 저는 아내에게 이 말씀을 나누면서 주영이를 ‘let her go’(떠나보내자) 하자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주영이를 빨리 죽게 하겠다고 담당 의사에게 연락한 후 저의 부모님과 형 부부와 여동생과 함께 주영이가 누워있었던 중환자실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 후 아기는 제 품 안에서 잠들었습니다. 그 후에 저희 부부는 아기를 화장한 후 뼛가루가 든 조그마한 박스를 들고 배를 타고 나가서 물에 뿌렸습니다. 그런 후 저는 작은 배 뒤편에서 배를 조정하고 다시금 육지로 가고 있는데 갑자기 배 앞에 앉아 있었던 아내가 뒤를 돌아보면서 저에게 “타이타닉”(타이타닉 영화)이라고 말하였는데 저는 그 말을 듣고 눈물을 줄줄 흘리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영어 복음성가 “My Savior’s Love”(나의 구원자의 사랑)을 크게 찬양하였습니다. 지금 다시금 그 순간을 생각해보면 진정 하나님께서 그러한 극심한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을 찬양케 하셨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우리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큰 위기 가운데서도 오히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 사랑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케 하십니다. “호흡이 있는 자마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할렐루야”(시 15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