갇혀 있을 때에

 

 

 

내가 아직 궁중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천지의 창조자이신 여호와께서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예레미야 331, 현대인의 성경).

 

 

감옥에 갇혔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동서남북 다 돌아보아도 문제의 해결점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참 막막하게 여겨져서 그저 멍하니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저는 사방이 다 벽처럼 보이는 그런 상황에서 제 자신의 무능력함과 무기력함을 많이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 때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간구하면서 성경책을 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입니다. 특히 저는 새벽기도회 때 기도하면서 교회 사역이나 가정 사역이나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무능력함과 무기력함 속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찾곤 합니다. 그리할 때 제 안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저로 하여금 저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잡게 하십니다. 그 때 저는 그 하나님의 말씀들을 붙잡고 하나님께 선포하며 기도하며 나아갑니다. 그 때 제가 누리는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께서 저에게 약속하신 말씀들을 반드시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신다는 믿음에 조금이나마 더 견고히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저로 하여금 인내하며 견디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 예레미야 33장 1절을 보면 하나님의 종 예레미야 선지자가 궁중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충분히 하나님께 이렇게 질문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 왜 제가 이 궁중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하나요?’, ‘제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러한 일까지 겪어야 하나요?’, ‘저는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전하라는 말씀만 전한 것 밖에 없는데 왜 제가 이러한 억울한 일을 당해야 하나요?’ 등등. 그리고 그는 충분히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가다가 광야에서 홍해 바다 앞에서 갇혔을 때(출14:3) 뒤에 쫓아온 애굽 왕 바로와 그의 군대로 말임아 심히 두려워하여 원망하였던 것처럼(8-12절) 예레미야 선지자도 충분히 두려워하고 원망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고 또한 아무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그 궁중 감옥에 갇혀 있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습니다(렘33:1). 어쩌면 우리가 감옥에 갇혔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아무리 동서남북을 다 돌아보아도 문제의 해결점이 보이지 않을 때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비록 우리는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하여 매일 수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은 결코 매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딤후2:9). 궁중 감옥에 갇혀있었던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저는 간략하게 2 가지로 묵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궁중 감옥에 갇혀 있었던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라는 사실입니다.

 

성경 예레미야 33장 2절을 보십시오: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일을 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예레미야 선지자는 감옥에 갇혀있어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만드셨고 또한 그 일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예레미야처럼 감옥에 갇혀 있는 느낌이 든다 할지라도 주님은 주님의 일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이루시되 주님은 우리를 쓰실 수도 있으시고 안 쓰실 수도 있으십니다. 우리는 그저 주님의 도구입니다. 그리고 도구인 우리는 주님께서 쓰시면 쓰임을 받는 것이고 쓰지 않으시면 쓰임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래도 감사, 저래도 감사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관심은 우리가 쓰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주님의 뜻이 이뤄짐에 있어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감옥에 갇힌바 된 것과 같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더라도 주님의 일을 행하십니다. 그 주님의 일은 구원입니다. 이 구원의 일을 사도 바울은 “착한 일”로 표현했습니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1:6). 우리도 바울처럼 이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되 감옥에 갇혀 있는 느낌이 들지라도 우리는 주님께서 주님의 구원의 일을 시작하셨고 또한 성취하시고 완성하신다는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우리가 감옥에 갇혀 있는 느낌이 든다할지라도 믿음으로 주님의 일을 이뤄지길 기도하며 또한 그 일을 주님께서 이루실 줄 믿는 확신 속에서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둘째로, 궁중 감옥에 갇혀 있었던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임한 하나님의 말씀은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였습니다.

 

예레미야 33장 3절을 보십시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하나님께서는 궁중 감옥에 갇혀 있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너는 네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생각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배를 타고 도망가던 요나에게 배가 거의 깨지게 될 정도로 바다 가운데 큰 폭풍이 일어나(욘1:1-4) 그는 바다에 던진바 됩니다(11-15절). 그 때 하나님은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고(17절)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합니다(2:1). 그는 물고기 뱃속에서 갇힌바 되었지만 그곳에서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기도하되 그는 다시 주님의 성전을 바라보았습니다(4절). 그리고 그의 기도의 결론 고백은 “구원의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였습니다(9절).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였고(10절) 요나는 두 번째 임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한 바를 니느웨 백성들에게 선포했습니다(2:1-4). 우리의 삶을 뒤돌아보아도 우리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부르짖었던 때가 바로 우리가 감옥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매우 힘들고 어려웠을 때였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었습니다. 동서남북, 아무리 돌아보아도 문제의 해결점을 보이지 않고 벽같이 느껴지는 것만 보일 때 우리는 위에 계신 주님을 바라보면서 주님께 간절히 도움을 청하곤 했습니다. 그 때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왜 하나님께서 궁중 감옥에 갇혀 있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셨는지 좀 이해가 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궁중 감옥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그에게 보여주시므로 그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렘33:3). 여기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크고 은밀한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유다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징계와 유다 백성들의 회복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올라와서는 입술로는 하나님께 경배하였지만 성전 밖에서는 우상을 섬기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던 유다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종인 선지자들을 부지런히 보내시사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도 않고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으면 불순종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약속하신 재앙을 내리시되 바벨론을 사랑의 징계의 도구로 사용하셔서 유다를 침략하게 하시고 예루살렘은 불타고 훼파되고 죽음을 당하지 않고 남은 자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징계의 약속 외에도 70년이 지난 후 유다 백성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회복의 약속도 하셨습니다. 그 회복의 말씀 중 오늘 본문 예레미야 33장 1절의 문맥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내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6절). 흥미로운 점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사용하셔서 유다 백성들을 징계하시므로 그들 중 남은 자들이 바벨론에 포로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케 하시사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하나님께 범한 모든 죄악에서 그들을 정하게 하시며 사하여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8절).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7절). 처음과 같이 세우시되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읍을 치료하여 고쳐 낫게 하시사 그들에게 평안과 견고함(“진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6절). 이 회복의 약속의 말씀을 예레미야 선지자는 궁중 감옥에 갇혀 있었을 때에 하나님께 부르짖으므로 하나님께서 응답하시사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예레미야 선지자가 궁중 감옥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을 묵상할 때 창세기 39장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그 이유는 요셉도 감옥에 갇혔었기 때문입니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요셉은 아무 죄도 없었는데 그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창39:14-18) 왕의 죄수를 가두는 옥에 갇혔습니다(20절). 그는 충분히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불만족 속에서 불평이나 원망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었을 까요? 또한 요셉은 그 옥에서 2년 동안이가 있었습니다(41:1).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2년이나 갇혀있다고 생각하면 별의 별 생각이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저는 제가 만일 요셉의 입장에 있었다면 감옥에서 내 인생을 허비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의 시간을 허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다른 형들보다 더 사랑을 받고 있었던 요셉(37:3)이 17살 때(1절) 두 번이나 꿈을 꾸게 하시사(37:5, 9) 그의 형들에게 더 미움을 받는 가운데서(5절) 결국에는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게 하시고(25-28절)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2년을 거하게 하셨습니다(39:7-23, 41:1). 그리고 13년 후인 요셉의 나이 30세 때 하나님께서는 요셉으로 하여금 애굽 왕 바로의 꿈을 해석케 하시므로 바로가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게 됩니다(41장). 이렇게 요셉의 나이 17살부터 30살까지 13년의 기간에 그는 2년 동안은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우리가 보기엔 그 젊은 나이에 2년이란 귀한 세월이 허비한 것 같아 보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생각할 때 그 2년의 감옥 생활은 결코 허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기간에 요셉은 그 감옥에서 바로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를 만났습니다(40:1-4). 그리고 요셉은 그들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5-15절). 그 결과 2년 후에 전직을 회복한(21절) 바로 왕의 술 맡은 관원장의 소개로 요셉은 바로 왕의 꿈도 해석을 합니다(41:9-36). 그 결과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41절). 왜 하나님께서 이리 일하셨을까요?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었습니까? 나중에 요셉에 애굽으로 내려온 그의 형들에게 한 말을 들어보십시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45:4-5).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의 계획에 요셉은 쓰임을 받기 위하여 그 과정 속에서 감옥에 갇혀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 저는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더욱더 희망을 갖게 됩니다. 비록 제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왜 이런 저런 상황들을 접하게 하시고 그 상황들로 인하여 제 자신이 무능력함과 무기력함 속에서 허덕일 때가 있지만 오늘 주신 말씀을 생각하면서 제 자신에게 적용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감옥과 같은 상황도 사용하신다는 믿음과 확신 속에서 인내하며 견디며 희망을 갖게 됩니다. 그리할 때 저의기도 제목은 사도행전 16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과 실라처럼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길 원합니다(행16:25). 그들이 감옥에서 하나님께 기도한 것은 좀 이해가 되는데 어떻게 그들은 하나님께 찬송을 하였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즘 제가 읽고 있는 시편 책 주석(“The Book of Psalm” by Mark D. Futato)을 토대로 시편 기자와 바울과 실라를 생각할 때 저는 감옥에 갇힌바 된 힘든 상황에 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믿음으로 기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시편 기자 다윗처럼 또한 바울과 실라처럼 하나님께 기도하되 그 기도하는 과정에서 전능하신 구원의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에 견고히 서게 될 때 아직도 감옥에 있지만 바울과 실라처럼 하나님께 찬송을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가운데 감옥에서 자유를 누리는 상황의 변화가 일어난 것이 아니라 바울과 실라의 마음의 변화가 일어났기에 믿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결과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서 자유를 누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감옥을 지키던 간수와 그의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고 죄에서 자유를 누리는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행16:26-34).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요 구원의 역사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