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축복

 

 

 

그 때에 왕이 가드 사람 잇대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도 우리와 함께 가느냐 너는 쫓겨난 나그네이니 돌아가서 왕과 함께 네 곳에 있으라 너는 어제 왔고 나는 정처 없이 가니 오늘 어찌 너를 우리와 함께 떠돌아다니게 하리요 너도 돌아가고 네 동포들도 데려가라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 하니라”(사무엘하 1519-20).

 

 

고통은 그 당시에는 괴롭고 아프고 힘들지만 토기장이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을 통하여 우리는 빚으십니다. 빚으시되 특히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통하여 우리의 완강한 마음을 부서트리시고 녹이시사 우리에게 온유한 마음을 주십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빚으십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하 15장 19-20절을 보면 우리는 다윗 왕이 가드 사람 잇대에게 하는 말을 봅니다. 이 다윗의 말이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잇대란 사람은 우리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에게 다윗 왕이 한 말이 뭐 그리 중요하나 의문이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여태껏 이 말씀을 그냥 읽으면서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지난주부터 새벽기도회 때마다 다윗에 대하여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깨달음 속에서 오늘 새벽기도회 때에도 오늘 본문 사무엘하 15장 20절 말씀 중심으로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로운 깨달음이 있어 나눕니다. 그 나눔의 결론은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통하여 다윗의 마음을 빚으시되 한 충성된 자기의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다윗의 고통입니다: (1) 다윗의 첫 번째 고통은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을 때 그가 두려움 속에서 도망 다닐 때 당한 고통들입니다. 왜 다윗은 고통을 당한 것입니까? 그 원인은 다윗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블레셋 장수 골리앗을 죽이고(삼상17:45-50) 돌아올 때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읍에서 나와서 뛰놀며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18:6-7)라고 노래하므로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살인적인 질투로 주목하였기 때문입니다(9절). 그 후로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고 다윗은 추격자 사울으로부터 도망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부터 다윗은 고통을 당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고통 가운데서도 다윗의 마음을 빚으시사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 왕을 귀하게 여기게 하시고(삼상24:10, 26:21, 24) 또한 그를 선대하게 하셨습니다(24:17). (2) 다윗의 두 번째 고통은 다윗이 왕이 된 후 자기의 아들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키므로(삼하15:12) 자기의 신하들과 도망 다닐 때(14절) 당한 고통들입니다. 왜 다윗 왕은 고통을 당한 것입니까? 그 원인은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목욕을 하는 것을 보고(11:2-3) 그 여자를 빼앗아 자기 아내로 삼고 그녀의 남편 충성된 군인 우리아를 치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였기 때문입니다(12:9). 그 당시 다윗 왕은 우리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전령을 통하여 요압 장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일로 걱정하지 말라 칼은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삼키느니라 그 성을 향하여 더욱 힘써 싸워 함락시키라 하여 너는 그를 담대하게 하라”(11:25). 그는 충성된 군인 이였던 우리아의 생명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이 다윗의 행한 일로 인하여(27절) 결국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가 다윗에게 낳은 아이는 죽고(12:14, 18) 다윗의 아들 암논이 또 다른 아들 압살롬의 누이 다말(13:1)을 강간하였으며(14절) 그 결과 만 이 년 후에(23절) 압살롬은 결국 암논을 죽이게 됩니다(29절). 결국 다윗 왕은 왕궁에 있으면서 자기가 범한 간음과 살인의 죄로 인하여 자기의 아들이 자기의 딸을 강간하며 또 다른 아들이 강간한 그 다윗의 아들을 살인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아버지 다윗에게 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약 이 년 동안 암논을 죽이고자 계획하고 때를 기다렸던 압살롬이 이젠 이 년 동안 아버지 다윗의 얼굴을 보지 못하였으므로(14:28) 아버지 다윗 왕을 권자에게 물러나고 자기가 왕이 되려고 반역을 계획합니다(15장). 그리고 그는 계획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을 훔칩니다(15:6). 더 나아가서 그는 아버지 다윗 왕에게 참으로 중요한 모사 아히도벨을 자기 고문으로 청빙합니다(12절). 아히도벨이 중요한 인물이었던 이유는 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과 대등할 만큼 판단력과 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16:23). 그 결과 압살롬의 반역하는 일이 커가므로 압살롬에게로 돌아오는 백성들이 많아졌습니다(15:12). 이스라엘의 인심이 다 압살롬에게로 돌아간 것입니다(13절). 그 소식을 전령을 통해 접해 들은 다윗은 예루살렘에 함께 있는 그의 모든 신하들과 빨리 도망합니다(14절). 이 도망하는 가운데 다윗 왕이 가드 사람 잇대에게 “너도 돌아가고 네 동포들도 데려가라”고 말하면서 “은혜와 진리가 너와 함께 있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한 것입니다(15:19-20).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깨달음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다윗 왕이 왕궁에 있었을 때에는 충성된 군인 헷 사람 우리아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그가 도망 다니고 있었을 때에는 유대인도 아닌 블레셋인 잇대를 귀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흥미롭지 않습니까? 사울 왕에게 쫓겨 도망 다닐 때에도 사울 왕을 귀하게 여겼던 다윗이 자기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도망 다닐 때에도 블레셋 사람 잇대를 귀하게 여기는 모습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고통이 없이 평안히 왕궁에서 거하고 있었을 때에는 안목의 정욕과 육체의 정욕 속에서 남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 범한 죄를 덮으려다가 결국 충성된 군인 우리아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이방인의 손에 죽게 한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징계로 압살롬에게 도망 다니면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이방인 잇대의 생명을 귀히 여기는 모습이 흥미롭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고통의 축복입니다.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마음을 빚으셨던 것입니다.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던 다윗이 고통을 통하여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으로 세움을 받은 것입니다. (2) 다윗 왕이 자기의 아들 압살롬에게 쫓기고 있었을 때 왕이 되기 이전에 사울 왕에게 쫓기고 있었을 당시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의 사랑을 더욱더 귀히 여기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자기 아들 압살롬도 자기를 죽이려고 쫓는데 요나단은 자기 아버지 사울 왕을 도와 자기를 죽이려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자기를 살리려고 아버지 사울 왕에게 죽임을 당할뻔하기까지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압살롬에게 쫓기고 있었을 때 그 여인의 사랑보다 승한 형 요나단의 사랑이 얼마나 그리웠겠습니까?(참고: 1:2) 그 사랑이 얼마나 귀하게 여겨졌겠습니까? 다윗은 도망 다니는 고통 속에서 요나단의 사랑을 더욱더 귀하게 여기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즉, 다윗은 고통의 광야(15:24)에서 귀한 요나단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시63:3)을 더욱더 깊이 깨닫게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결국 고통의 축복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깨달은 것입니다. 비록 아들 압살롬의 미움으로 광야로 쫓겨나 도망 다니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지만 다윗은 그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오히려 왕궁에서 깨닫지 못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다윗과 같은 고통의 축복이 있길 기원합니다. 우리도 고통을 통하여 한 사람을 귀하에 여기는 사람으로 세움을 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세움 받음이 우리에게도 절실히 필요한 이유는 요즘 우리들은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리 교회 지도자들은 우리의 입술로는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고는 말하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의 마음으로는 한 영혼을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빌1:8) 귀하게 여기고 있지 않고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교인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는 더욱더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서 한 영혼, 한 영혼이 우리 지도자들로 인하여 상처 받는 일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도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고통의 축복이 필요합니다. 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에게는 고통을 통하여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더욱더 깊이, 넓게, 높게 그리고 많이 깨달아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통하여 예수 십자가의 고통과 죽으심을 바라보며 묵상하므로 말미암아 주님의 놀랍고 굉장한 구원의 사랑을 더욱더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사랑의 물댄 동산이 되어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으로 한 영혼, 영혼을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고통의 축복이 우리에게 있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