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고난을 당해야 하는 것인가요?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스르므로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마태복음 1424).

 

 

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난을 당해야 하는 것인가요? 어떻게 우리는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난을 이해해야 하는 것인가요? 과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고난을 당하게(당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과연 고난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우리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지식을 가지고 계십니다(시92:5; 전3:11). 우리는 그분이 행하시는 일을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욥5:9; 시145:3). 왜 하나님께서 욥에게 고난을 겪게 허락하셨는지, 왜 하나님께서 요나가 타고 있었던 배가 거의 깨지게 될 정도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사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게 하셨는지(욘1:4)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어느 누가 욥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어느 누가 요나에게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 33-34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비록 우리가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하여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지 그 분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추측해 볼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욥에 경우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난을 허락하신 목적은 그를 단련하시사 순금 같이 되어 나오게 하시려는 것인가 보다고 라고 추측해 볼 수가 있습니다(욥23:10). 또한 불순종한 요나와 같은 경우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로 하여금 고난에서(욘1:4) 또 다른 고난으로 건지시고 인도하시사(17절)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간구케 하시고(2장, 특히 2절) 다시금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케 하시고자(3장) 하나님께서 그에게 고난을 주셨구나 라고 추측해 볼 수가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기가 당한 고난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시119:67, 71). 그는 자기가 그릇 행하여 고난을 당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그는 고난이 자기의 그릇 행한 죄의 결과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는 자기가 고난당한 것이 자기이게 유익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는 고난을 통하여 주님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어 고난당한 후에는 주님의 말씀을 지키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 마태복음 14장 24절을 보면 고난을 당하고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육지에서 수리나 떠난 배 안에 있었고 큰 바람이 불어 파도[“물결”(마14:24)]가 일어났고(요6:18) 또한 그 큰 바람과 파도(물결)이 배를 거스르므로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마14:24). 그 때 그들은 힘겹게 노를 저었습니다(막6:48).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요나 1장 13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다가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므로 능히 못한지라.”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12절)고 요나 선지자가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 사공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지지 않고 살려보려고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였습니다(13절). 그러면 그럴수록 바다가 그들을 향하여 점점 더 흉용하였습니다(13절). 이 말씀을 보면 왠지 하나님께서는 이방인 사공들과 싸우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그리 생각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은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던지시므로(4절) 이방인 사공들로 하여금 배 가운데 있는 물건들만 바다에 던지는 것(5절)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는 것(12절)인데 지금 그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지지 않고 그를 인간적으로 살려보려고 힘써 노를 저어 배를 육지로 돌리고자 하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바다 물결을 점점 더 흉용하게[점점 더 사나운 파도를 그 배에 밀어닥치게(현대인의 성경)] 하셨기 때문입니다(13절). 이 싸움에 누가 이겼습니까?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결국 이방인 사공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은 후 요나를 들어 바다에 던졌습니다(14-15절). 그 결과 바다가 뛰노는 것이 곧 그쳤습니다[성난 바다가 즉시 잔잔해졌습니다(현대인의 성경](15절). 오늘 본문 마태복음 14장 24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제자들도 큰 바람과 파도(물결)이 그들이 타고 있던 배를 거스르므로 그들이 고난을 당하고 있었을 때 힘겹게 노를 저었다(막6:48)는 것은 천지 창조하신 하나님과 그들과 싸우는(적어도 씨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바람과 파도 물결로 하여금 그들이 타고 있는 배를 거스르고 계셨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이 내리신 그 거스르는 큰 바람과 파도 물결과 싸우고자(씨름하고자) 힘겹게 노를 저어 그래도 십여 리쯤[4.5 킬로미터(현대인의 성경), 3 마일이나 또는 3.5 마일(NIV 성경)]까지 갔었습니다(요6:15). 그들은 하나님과 씨름하데 적어도 밤 사경(새벽 3-6시쯤)까지 그리했습니다(48절, 마14:25). 그러니까 그들은 밤새도록 하나님께서 내리신 큰 바람과 파도 물결과 씨름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심신이 지치는 씨름이었을까요. 야곱도 천사와 밤부터 날이 새도록 씨름을 하지 않았나요(창32:22-24). 그 씨름하는 모습, 즉 제자들이 거스르는 바람과 싸워 힘겹게 노 젓는 것을 보시고(막6:48) 밤 사경쯤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가까이(요6:19) 오셨습니다(마14:25).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출애굽기 3장 7-8절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고통당하고 있는 모습을 분명히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7절).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우리의 근심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7절). 그 하나님께서 고통당하여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시고 내려오사 모세를 통하여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인도하시겠다고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8절). 이렇게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분명히 보시고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며 우리의 근심을 아시고 우리에게 가까이 오시사 우리를 건져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고난당하고 있음을 보시고 바다 위로 걸어서 그들에게 가까이 오셨습니다(마14:25, 막6:48, 요6:19). 그 때 제자들은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분이 유령인 줄 알고 놀라 무서워하여 소리를 질렀습니다(마14:26). 극심한 공포 가운데 있었던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즉시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27절). 베드로는 예수님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라고 대답하였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28-29절). 그 때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갔고 그 때 그는 예수님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29-30절). 그 때 예수님께서는 즉시 손을 내미시사 베드를 붙잡으시고 그에게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31절). 우리가 볼 때에는 결코 믿음이 작은 자가 아닌 것 같은데 말입니다. 어느 누가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치는 바다 위로 예수님이 “오라”고 말씀하신다고 베드로처럼 배에서 내리겠습니까. 아마 우리는 한 발자국도 배에서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는 배 안이 물 위보다 더 안전하다고 믿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베드로처럼 물 위로 걷다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에 빠지는 것보다 배 안이 훨씬 더 안전하다고 우리는 확고히 믿고 있을 것이기에 우리는 베드로처럼 예수님이 “오라”고 하신다고 배에서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한번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배가 예수님이 계시는 물 위보다 더 안전한가?’ 중요한 것은 배나 물 위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는냐 안 계시느냐 가 아닌가?’(참고: 출33:15). 적어도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오라”고 하셨을 때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님께로 갔습니다(마14:29). 그런데도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에 빠져가는 베드로를 즉시 손을 내밀어 붙잡아 건져주신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31절). 그러신 후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함께 배에 오르사 배 안에 있는 제자들에게 가셨을 때 바람이 그쳤습니다(32절, 막6:51). 여기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함께 배에 오르셨다는 것은 베드로도 예수님과 함께 물 위로 걸어서 배까지 와서 배에 올랐다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베드로 혼자서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님께로 가려고 했을 때에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 물에 빠졌지만 예수님과 물 위로 걸어서 배까지 와서 배에 함께 오를 때까지는 그는 바람을 보았거나 무서워했다는 성경 말씀이 없습니다. 그 때 제자들은 마음에 심히 놀랐습니다(막6:51).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께 절하며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33절).

 

예수님의 제자들은 큰 바람과 물결(파도)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했습니다. 왜 그들은 고난을 당한 것일까요?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 가운데 행하신 일을 충분히 헤아릴 수가 없지만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고난을 당하게 하신 목적은 바로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을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합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목적은 바로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에 우리는 “왜?”(Why?)라는 질문(왜 이런 고난이 나에게 일어났는가?)이나 “어떻게?”(How?)라는 질문(어떻게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는가?)이나 심지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What is God’s will?)라는 질문을 던지기보다 우리는 하나님은 “누구이신가?”(Who is my God?)라는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고난 중에서 더욱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성경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더욱더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 속에서 자라나므로(호4:1, 6; 6:4) 사도 바울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합니다(빌3:8). 고난을 통해서라도 가장 고상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