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33: 마땅히 행할 길을 자녀에게 가르치라!

 

 

 

[잠언 22장 6절 말씀 묵상]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잠언 22장6절)



       언젠가 북한 평안북도 룡천역 폭발 참사 소식을 뉴스를 통해서 접한 기억이 납니다.  그 때 그로 인하여 부상자가 상당히 많았습니다.  엄정난 후폭픙과 유리 파편으로 눈에 심한 부상을 입어 수 많은 사람들이 실명위기에 처했었습니다.  특히 룡천 소학교에서 부상을 입은 어린이들 대부분이 안구를 다쳤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접해 들었습니다.  이 룡천 소학교 어린아이들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해 들은 시인 김용택씨는 그의 시 "룡천 소학교 아이들아"에서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 룡천의 아이들아!  언 땅을 뚫고 돌아나는 새 풀잎 같은 이 땅의 아이들아!  학교를 잃어 버린 아이들아   동무들을 잃어버린 아이들아  돌아갈 집과 부모 형제들을 잃어버린 아이들아  뜨거운 불길에 데인 얼굴들   아!  아!  이 느닷없는 죽음, 고통, 슬픔, 추위, 배고픔, 이 공포를 어찌 할까나   내가, 내가 지금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냐 ...".  저는 "내가 내가 지금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냐"란 부분에 도전을 받았습니다.  안타까운 현실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가 우리의 인생에는 너무만 많지 않나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의 자녀들이 육의 안구가 아닌 영의 안구가 부상을 입어서 영적 실명에 놓여 있는 우리의 자녀들을 볼 때에 과연 우리는 부모로서 "내가 내가 지금 어떻게 해야 한다 말이냐"라는 탄식의 질문을 우리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자녀들이 영적 실명에 놓여 있음을 보지 못하는 우리 부모들의 영적 실명입니다.  이것은 곧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격입니다.  과연 우리 부모가 우리 자녀들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마땅히 행할 길을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과연 우리가 무엇을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쳐야 합니까?   


       첫째로, 우리 부모는 우리 자녀들에게 바른 가치관(Right Value)을 마땅히 가르쳐야 합니다.  

 

과연 우리 부모들은 우리 자녀들에게 무엇이 참 가치가 있다는 것을 가정 삶 속에서 보여 주고 있는지 한 번 뒤돌아 봐야합니다.  신앙입니까?  믿음이 얼마나 귀한지, 그 귀하 가치성을 우리 자녀들이 과연 우리 가정의 믿음 생활에서 보고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세상 사람들의 가치관(눅16:15)을 가지고 살아가기에 바쁘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  우리가 값지게 여기는 것 혹은 귀하게 여기는 그 "보물"은 무엇입니까?  거기에 우리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태복음 6장 21절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바른 가치관을 가졌던 인물은 바로 모세였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히11:26).  누가 고난을 좋아합니까?

보화를 더 좋아하는게 우리의 본능 아닙니까?  그러나 모세는 믿음으로 상주심을 바라 보았기에 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의 보화를 세상의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바른 가치관을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마땅히 가르쳐야 한다는 성경 말씀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우리 부모는 우리 자녀들에게 뚜렷한 목적관(Clear Purpose)을 마땅히 가르쳐야 합니다.  

 

너무나 많은 우리 자녀들이 뚜렷한 목적이 없이 삶을 방화하며 허비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우와좌왕하면서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면서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이 잘못된 목적관을 가지고 헛되고 헛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턴 소요일 문답 제 1문을 보면 "인간의 제일되는 목적은 무엇인가?"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 대답은 "인간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우리 부모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려고 노력한다고 말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즐거워하기보다 하나님을 부담스럽게 여기고 있습니까?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것조차도 부담스러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다니엘의 뚜렷한 목적관은 배워서 우리 자녀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그는 뜻을 정하여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려고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습니다(단1:8).  세상에 관점에선 기회인데 그가 그 기회를 마다한 이유는 그에게는 뚜렷한 목적관인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추구하겠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뚜렷하고 분명한 목적관에 다니엘은 이끌림을 받은 것입니다.  이러한 삶을 우리 자녀들이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마지막 셋째로, 우리 부모는 우리 자녀들에게 영원한 인생관(Eternal View of Life)를 마땅히 가르쳐야 합니다.  

 

너무나 많은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귀하 여기지 않고 자살을 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왜 그렇게 쉽게(?) 자기의 귀한 생명을 앚아 가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그들에게 영원한 인생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삶의 의욕을 잃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영원한 나라인 천국에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소망을 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우리에게 하루도 살아갈 수 있는 소망을 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헛되고 헛된 이 세상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바로 절망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이 절망을 줄 수 밖에 없는 헛된 세상에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위로는 바로 영원한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생명은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입니다(약4:14).  잠간 보이다가 없어질 짦은 인생, 그런데 왜 우리는 영원히 이 땅에서 살것 처럼 지금 살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죽음에 대한 깊은 묵상과 기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영원한 인생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관문을 생각하는 사람 만이 영원한 나라의 관문을 바라봅니다.  바울은 그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고 이 땅에 사는 동안 그의 많은 영혼들에게 삶을 다 바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통하여 맺으신 복음의 열매를 가리켜 바울은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빌4:1).  

 

과연 우리의 기쁨이요 면류관은 누구입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진정으로 아름다운 사람은 인생의 종착점에서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이 많은 사람입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사람은 영원한 인생관을 가지고 영원한 사람에게 온 삶을 바칩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우리 자녀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게 마땅히 아름다운 인생관을 가르쳐야 합니다.


       안구를 다쳐 실명 위기에 놓인 룡천 소학교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내가, 내가 지금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이냐"라고 탄식한 한 시인처럼 우리는 과연 영의 눈이 실명을 당한 우리 자녀들을 바라보면서 우리가 과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우리는 그 대답을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마땅히 행할 길을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바른 가치관과 뚜렷한 목적관, 그리고 영원한 인생관을 가르쳐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바른 가치관과 뚜렷한 목적관 그리고 영원한 인생관을 가지고 살다가 영원한 나라, 그리운 주님의 품 안에 안긴 사랑하는 그리운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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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김 목사 나눔

(어린이 주일을 하루 앞두고)